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참 생명이 태어난 날((성탄절, 2023년12월 25일)
참 생명이 태어난 날
성탄절 출2:1-10;눅1:46-55
신약 성경에서 처음 세례를 베푼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물로 세례를 주는 의식이 있었을까요? 레위기서에 보면 부정탄 것, 예를들어 죽음을 만졌다거나 할 때 물로 옷을 빨고,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게 물을 뿌립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교할 때도 세례를 베풀었다고 하며, 예수님 당시에 세례 요한이 속해있던 에세네 쿰란 공동체에서도 공동체에 들어올 때, 그리고 정결예식도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세례는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부정탄 것을 정화하려고 베푸는 예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례 요한은 막1:15에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개인의 어떤 종교적인 정결의식이 아니라 새로 도래하는 복음의 시작을 광야에서 선포하는 엘리야의 외침이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시작을 선포하고 알리는 구약의 예언 사건이었습니다. 요1:31은 “내가 와서 세례를 주는 것은, 이 분을 알리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찿아가 세례를 받았는데, 마3:15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머리 위에 임하고, 하늘 문이 열리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이 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성령 세례를 줄 분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물로 세례를 주는 회개와 정화의 차원과는 달리,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며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자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라도 들어가 다시 태어나야 하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요3:5에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마치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람과 같다고, 성령의 자유로움에대해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갓 태어나 이집트의 바로의 유아 학살을 피하여 나일강에 갈대 상자 바구니에 담겨 떠내려 가던 중에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가에 왔다가 갈대 숲 속에 상자 하나를 발견하여 가져 오게 하여 열어 보니, 남자 아이가 있는 것을 보게되고, 발 빠르게 모세의 누이가 달려가 유모를 구해 줄 수 있다고 하여, 극적으로 모세의 친 엄마의 품에 다시 안기어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공주는 강에서 건진 아이에게 ‘물에서 건졌다’ 하여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이렇게 건짐을 받았다는 의미이며, 이 전의 삶과는 다른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다시 태어난다, 구원을 받았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이 전과 이 후가 무엇이 다른가요? 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불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상속자로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아이들이 초등, 유치원에 다닐 때 였던 것 같습니다. 마침 아이들 내복을 사 주어야 할 때여서 성탄 선물로 내복을 결정하고 성탄절 아침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갔다고 하며 선물을 하나 씩 주었는데, 아이들이 신이나서 선물을 펴 보았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던 내복에 으앙~하고 울움을 빵 터트렸는데, 서러움이 복받치는 울음을 어~엉 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집사람 하구 나하구는 웃음이 빵 터졌고,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장난감 선물을 사가지구 다시 아이들에게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구원은, 다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값없이 베푸는 은혜인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오늘 세례, 입교자들에게 그리고 이 성탄의 아침에 우리 모두에게 무슨 선물을 주실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 받아야 할 선물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합니다. 정말 받아야할 선물은 무엇일까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어제 저의 집무실의 책들을 교우분들이 도와주어 정리하였습니다. 참 책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책은 사서 펴 보지도 않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 혹 주님이 값 없이 십자가의 보혈로 주신 평화를 그렇게 한 쪽 구석에 먼지가 가득 묻은채로 쳐 박아두지는 않았는지요? 정말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선물인 평화는 주먹 만 하게 보이고, 세상의 근심, 걱정, 미움, 싸움, 거짓 등은 집채만해 보입니다. 세상의 일들에 묶여 일희일비하며 인생을 소비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반복될까요? 우리의 것으로는 이 귀한 은혜를 볼 수도 받을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6:17에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세상의 지혜나, 나의 노력이나 수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비 바람으로 부터 나를 덮어 주는 외투와 같습니다.
그러니 교우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배와 말씀, 그리고 기도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기도와 예배 중에 말씀을 읽으며 그렇게 나를 감싸는 은혜를 받은 기억들이 생각납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주님의 평화가 이 성탄에 차고 넘쳐 세상을 이긴 이김을 사는 우리서로같이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