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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근본(성령강림후 스물다섯번째 주일, 2023년 11월 19일)

김현식 | 2023.11.20 11:14 | 조회 180




신앙의 근본


성령강림후 스물다섯번째 주일                                                     창세기 1:1, 요한복음 3:16


우리는 모두 지금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화를 통해서 발전을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최소한 앞으로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서 있다는 것, 나아간다는 것은 발을 딛고 있는 기반이 어디인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진흙탕을 디디고 있다면 본인이 아무리 똑바로 서고 싶다고 해도 기울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높이 뛰기 선수가 점프를 잘하기 위해서는 발판이 필요하고, 달리기 선수는 빨리 달리기 위해서 흙길이 아닌 트랙을 달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변화 가운데 우리의 발 밑에 있어야 될 신앙의 기반, 신앙의 근본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인 창세기 1장 2절은 1장 1절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전제입니다.


논리 이전에 논리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가장 밑바탕에 깔고 들어가는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부분이죠. 성경을 기록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찾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록 안에는, 그들의 체험 안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 우리 안에서 생겨날 때가 있죠.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올바른 방법은 방금 찬양처럼 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극복하고 먼저 하나님께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작업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좀 더 쉬운 길을 쉬운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가장 편한 것, 우리가 평소에 했듯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 내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방법을 정합니다. 그다음에 거기에 하나님을 덮어 씌웁니다. 내 마음대로 했지만 마지막에 하나님을 끌어다 놓고 기도 한번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잘 될 거야 하는 식입니다. 합리화 시킵니다.


 아니면 이중적 태도를 갖는 방법도 있습니다. 앞에서는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야죠 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그건 너무 힘든 일인데?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고차원적인데? 이런건 장로님이나 목사님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하고 생각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참 맞는 얘기인데 좋은 얘기인데 너무 이상적이어서 내가 하기 힘들어. 내 신앙이 좀 성장한 다음에, 혹은 그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환경과 상황이 됐을 때 순종하고 아직은 아니다. 순종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말 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대로 해야 되지 않아? 라고 얘기할 때 아~ 상황을 모르시네,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말씀 그대로 하면 망하지, 그걸 어떻게 해.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상황을 잘 모르고 이상적인 이야기만 하시고 우리에게 좀 무리한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되버리고 맙니다.



이때 기억해야 될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여기서의 세상은 교회의 반대 의미인 세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 모든 피조세계, 온 세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속이라고 이야기하도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온 세상안에 교회와 세속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엄하기만한, 그래서 우리 사정도 모르시고 꼬장꼬장하게 이상적인 말씀만을 하시고 이걸 지켜야 돼! 라고 이야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17절은 이어서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목적이다.


 

이 두 가지의 사실이 우리 신앙의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그 주인은 우리를 일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려먹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이 사실을 발판으로 하는, 이 사실을 근본으로 하는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나아가야 될까요?


 변화의 과정 중에서 갈등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변화라 하더라도 내가 이것을 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하는 내면의 갈등은 물론이고, 조직의 변화에서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갈등을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덮어주고 피하기 쉽지만, 갈등이야말로 공동체가 살아 있음을 나타내주는 증거입니다. 갈등을 통하여서 서로의 다른 점을 알고 고쳐야 될 점을 알고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 가운데 갈등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에 맞추어서 갈등을 해결해야 될까요?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 고기 교회에 주신 생명, 정의, 평화의 가치에 먼저 비춰보면 됩니다.그런데 문제는 양쪽이 다 옳은 가치를 가질 때, 그 두 가치가 충돌할 때입니다. 럴 때는 어떻게 판단해야 될까요? 그때는 가치를 이루고자 하는 방법과 수단을 봐야 됩니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헌금은 성도들이 바친것이니다 허투루 쓰면 안 된다’ 물론 매우 맞는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허투루 써서는 안 되죠.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면 이렇게 됩니다.허투루 쓰여서는 안 되니까 낭비하면 안 된다. 그런데 낭비란 무엇인가? 이익 없는 곳에 쓰여지는 것이다.결과 없는 곳에 쓰여지는 것이다. 그러니 헌금은 효율적인 곳에 사용되어야 된다.결과가 나타나는 곳에 사용되야 된다. 결론적으로 마치 기업 논리와 똑같이 사용처가 정해지게 됩니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는 방식으로 사용되게 되는 거죠. 전제는 틀린 얘기가 아닙니다. 헌금이 허투루 사용되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 전제가 나타나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닌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을 유다의 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가 이와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 공동체에서 회계를 맡겼던 사람입니다. 돈 관리를 어떤 사람에게 맡기는가를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요건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튀지 않는 사람에게 맡기겠죠. 다시 말해서 그 공동체에서 가장 신뢰 있는 사람에게 돈 관리를 맡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는 돈 관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세리 마태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아닌 유다가 회계를 맡고 있습니다. 유다는 굉장한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돈 관리를 맡았던 사람이니 결코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겠죠. 이런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머리 좋고 명석한 유다가 보기에 예수님의 행보는 매우 답답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거죠.


 이제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 유월절이 코앞에 있습니다. 이날은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같은 날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광복절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 날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면 이때만큼 좋은 타이밍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우리를 반깁니다. 심지어 우리가 들어올 때 우리 선생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호산나라 부르며 종려나무 가지를 그 앞에 깔았습니다. 백성들이 우리를 우리 선생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이 유월절에 타이밍을 잡아서 로마 제국을 향한 반기를 든다면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타이밍이죠. 그런데 이 모든 움직임의 핵심이 되어야 될. 정작 우리 선생님은 아주 조용하십니다. 계획을 세워도 부족한 이 시간에 선생님의 행동은 전혀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불러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되는데, 선생님이 자신을 드러내게 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서 로마 제국을 물리칠 사람들을 모아야 되는데! 선생님을 나타나게 해야겠다. 드러나게 해야겠다. 어떻게 할까? 선생님을 고발하는 거죠. 선생님을 궁지에 몰아넣어 보자. 그렇다면 선생님도 더 이상 자신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선생님을 도와서 기회를 잡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끌려가는 양처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 오판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의 죽음으로 치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될 방식은 아닙니다. 복음서는 이에 대해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에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이때가 정말 중요한 데, 내가 보기에는 이때가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은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해보자. 내가 생각하는 그때에 맞는 방법을 내가 만들어보자는 생각.


 유다가 보기에 예수님은 무능해 보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봐도 예수님이 유능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12명의 제자 중에 1명은 예수님을 배반했고,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는 단 한 명만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제자는 자신의 스승이 잡혀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스승을 부인하기 바빴습니다. 실패자라고 치면 이보다 큰 실패자를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함께 살며 말씀을 전했는데 정작 그 선생의 위기에 함께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능해 보인다면 우리는 그의 무능을 배워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예수님이 실패했다면, 그 실패의 길을 따라가는 게 맞는 일이 아닐까요?


제가 청년시절을 보냈던 저의 모교회는 분쟁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2011년부터 한 9년 정도의 기간입니다.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정말로 말 그대로 시간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중에 가장 제가 힘들었던 것은 어느 쪽도 옳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양쪽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양측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어느쪽도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 많은 교우들이 우리와 함께한다, 이렇게 서명을 해주었다고 얘기하는데 사실을 그 서명중에는 허위 서명이 있고,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니까 용역을 동원하고. 저쪽에 용역을 동원했으니까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이야기해놓고 장애인 용역을 동원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들을 봤습니다. 결국 한쪽에서 용역을 동원해 와서 교회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반대편 사람들을 쫓아내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쫓겨나는 쪽에서 목사님 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거 봐라, 거룩하게 싸우면 진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게 목회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거룩한 싸워서 지는 거라면 지는 게 맞는 게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그 장소에 보내신 이유는 지라고 보낸 거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면 실패한다고 생각해서 사람의 방법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실패가 아님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터의 이야기는 바울 사도가 로마 교인들에게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풀어서 얘기해 주는 부분입니다. 특별히 9절부터 21절 단락은 단락 제목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이라고 붙어 있습니다.


단락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거짓이 없어야 됩니다. 열심히 해서 부지런히 일해야 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도를 꾸준히 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원수는 하나님께서 갚는 것입니다. 원수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모두가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이상적이신 거 아니십니까? 라는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단락은 이렇게 끝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선으로 악을 이야 합니다. 세속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가야 됩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는 그것이 패배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질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문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방법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그것은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서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들은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넘어지고 실패하는,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승리하는 방식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사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내가 보기에 나의 환경과 상황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같을 때가 있고, 어디로 갈지 몰라서 내 모든 것을 동원해서 찾아가기도 바쁘기에, 하나님께 눈을 돌리는 것은 그럴 만한 에너지가 없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옳은 방향을 찾는 방법입니다.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말씀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정말로 내 하나님이신 것. 그래서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하시는 것. 그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근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뢰하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의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기에는 어찌 흘러갈지 모르지만, 무엇을 대비해야 될지 모르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다는, 그래서 지금 내가 보기에는 이득이 될 것 같지 않고, 효율 없고, 실패하는 것같이 보이는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 이 사실을 근거에 두고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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