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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느니라(창조절세번째 주일, 2023년 9월 17일)

김현식 | 2023.09.17 20:28 | 조회 201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느니라

 고전 12: 18-25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는 큰 도시였습니다. 신약시대에 고린도는 아가야라는 로마 행정 구역의 수도였으며, 지역 총독의 거주지였습니다. 또한 고린도는 무역항이기도 했습니다. 북그리스와 남그리스 간의 모든 교통,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모든 해상수송교통을 관할하했습니다.

무역은 물건들을 이곳에서 다른곳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이러한 직업에 종사하다보면 모든 사물을 상업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대하기 쉽습니다. 즉 고린도인들은 정신보다는 물질을, 명예보다는 이윤을 더 가치있게 여기며, 저울에 달아 계량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 나라로부터 온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부두에서, 거리에서 만나 서로 다투기도 하고 크고 작은 분쟁들을 계속 일으켰습니다. 거기다 고린도에는 매춘을 하는 여성들이 많았는데 그 여성들의 상당수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성적인 타락이나 사치스러움을 이야기 할 때 고린도스럽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고린도에 바울이 2차 전도여행때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 구성원을 생각해봅시다. 지역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육체노동자이며,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도 못한, 자유가 없는 노예입니다. 로 다른 사회와 문화배경 뿐만 아니라 계급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한군데 모였으니, 여러 가지 충돌의 요소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고린도 교회 예배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임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던 것 같습니다. 즉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참석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성도는 성경 말씀을 봉독하고또 다른 성도는 기도를 하고또 다른 성도는 강론을 하고또 다른 성도는 찬송을 하는 식입니다. 이런 예배는 좋게 보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살아 숨쉰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아주 번잡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복잡했고, 크고 작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지게 되는 한편,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개척자였던 바울에게 질문을 적어 보내게 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고린도 전서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가장 먼저는 파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를 개척한 바울파, 성경 교사였던 아볼로파, 게바파, 심지어는 그리스도 파등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고 그 기준은 아마도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다툼을 판결하기 위해 교회 성도들간 소송과 고소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밖에서도 벌어지지 않을만한, 성적 타락: 계모와 결혼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고린도 교인들이 질의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도 이어갑니다.

 

바울은 7:1여러분이 적어 보낸 문제를 두고 말하겠습니다.”이라고 시작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질문했던 것들과 바울이 들은 그들의 소식중 몇가지를 지적합니다. 주님 오실날이 멀지 않았는데, 결혼하는 것이 옳은가?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을 해야 하는가? 다른 신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성도가 먹는 것은 옳은가? 이런 질문들, 그리고 바울이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들: 성만찬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린도 사회의 모습과 같이 여성이 교회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합니다.

 

이런 질문들로 짐작해보면, 고린도교회는 어떤 성격의 교회였을까요? 물자의 중심지였던 만큼 여러 뛰어난 사람도 많았지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잘 융화되지 못하고, 교회 밖의 성적이거나,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교회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고 있는 교회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물질주의적 발상이 잘 드러난 부분이 오늘 본문이 포함된 12장의 은사 주제입니다.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한 성령이 주신것임을 말하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짐작해보건대,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어떤 은사가 가장 뛰어난 은사입니까? 하고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 그 은사를 소유하려고, 그래서 자랑하고. 그리고 당대에는 눈에 잘 드러나는 방언이 높은 은사로 대우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는, 섬기는 일은, 일의 성과는 여럿이지만 주체는 하나님임을 계속 강조합니다.

 

8절에서 은사를 9개로 정리해서 말하는데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하는 은사, 영을 분별하는 은사,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방언을 뒤에 언급합니다.

 

이 문제 많은 성도들에게 은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가 아니라 자신이 잘나 보이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우리의 몸의 개념을 가지고 옵니다. 몸은 특정한 기관이 잘났다고 따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2절부터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한 몸입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이 아니다.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이 아니다. 라고 말할수 없다는 겁니다. 각각 다른 기능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룬다. 하나님이 지체를 각각 한 몸에 두셨으니 서로 쓸모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심지어 더 약하게 보이는 부분이 더 요긴하고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 모든 지체가 서로 같이 걱정하게, 개역개정은 돌보게 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이야기하면 앞서 나온 9가지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 기적, 방언. 외에 보통 뭔가 탁월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뛰어난 능력들. 뛰어난 언변, 리더십, 신체적 능력, 돌아가며 공동체 식사 준비를 하는 우리 교회에서는 요리를 잘한다던가,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인 능력주의의 관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은사를 직제를 섬기기 위한 재능,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한다고. 쉽게 생각하면 약한 자들을 아껴주자는 이야기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약한 지체라 하더라도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어디일까요?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뇌가 아닐까요? 뇌가 약하다고 쓸모가 없는가요? 눈은 하나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뇌가 없다면 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몸은 약한 부분일수록 더 필수적이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약한 부분일수록 몸 안에 있습니다. 또한, 몸은 각 기관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장이 팔보다 단단하지 않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요? 머리카락이 손가락처럼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서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대합니다.

 

보통 어떤 일을 추구할 때 그 작업을 잘하는, 재능이 있는, 관련되어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게 됩니다. 반면에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뚜렷한 의견제시나, 능력이 있어보이지 않는. 그래서 이런 사람은 배제하고 좀더 능력이 좋은 사람들로 구성해서 진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효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적 사고방식이지 하나님의 방식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효율이 좋은 방식, 높은 수준의 결과물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굳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천지창조의 순간에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서입니다. 일이 아닌 관계의 문제입니다.

 

직분자가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맡은 사람 외에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계속 담당하게 되고 밖에서 보기에는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담당했으니 자신도 뭔가 탁월한 능력이나 관련 경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쉽게 신청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면 일을 맡은 사람은 지치게 되거나 그만 두거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상처를 겪어 교회를 옮기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옮긴 교회에서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합니다. 뭔가 자리를 맡게 돼서 같은 경험을 하게 될까봐. 그래서 성도, 교우가 아니라 이름 없는 군중의 한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상처에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휴식은 게으름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름없는 아무개, 익명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셔서 교회의 몸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름 없는 군중은 바람직한 자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직분자가 아닌 성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몸은 각 지체가 모여서 이루어졌습니다. 각 지체는 그 목적이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다고 의미 없는게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체들이 몸을 이룹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몸에 참여함으로 존재한다. 예배에, 교회의 대소사에, 다른이의 아픔과 기쁨에.

몸에 상처가 났을 때 치유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가장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들이다. 몸의 어떤 기관도 처음부터 완성되어있지 않습니다. 모두 처음에는 작은 세포 하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룹니다.

 

바울은 은사에 대해 언급한 12장의 마무리를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 다루는 내용은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이라는 것인가요? 물론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셔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은사의 종류가 아닌, 은사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들어본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하는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13장은 교회에서 은사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교회는 누구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몸을 이루는 것은 우리입니다. 몸이 몸된 자세로 움직여야 합니다. 살아있어야 합니다. 움직인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판타지 게임이나 영화에 보면 죽었지만 움직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움직이는 해골, 움직이는 시체, 이런것들을 un-dead라고 부릅니다. 죽음의 반대는 생명인데, 생명이 없이 움직이는 것들입니다.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직분을 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받은대로, 직분자가 아닌 성도는 참여함으로.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서로 같이 걱정하여 돌보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여 서로를 걱정하여 주님의 한 몸을 이루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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