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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회복(창조절두번째주일, 2023년 9월 10일)

stephensh | 2023.09.10 13:09 | 조회 276



연민과 회복

 

창조절 두번째 주일                                                                                   누가복음 711-17



오늘 읽은 본문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되살렸었죠. 엘리야가 그랬듯 주님도 나인성 과부의 아이를 되살립니다. 엘리야는 모세와 함께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대표한다면,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거죠. 그래서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만난 이들도 모세, 엘리야였던거죠. 주님에게서 엘리야가 겹쳐 보인다는 건,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겐 희소식이었죠. 그래서 사람들은 16절처럼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고 외칩니다. 그 당시 주님을 따르던 이들에겐 이러한 발견은 주님께 전 삶을 걸만한 용기를 주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떻습니까? 과부의 아이를 살리신 주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먼저 본문을 따라가 보시죠. 주님께서 한 여성을 만납니다. 이 여성은 과부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이런 배경정보는 막 외아들을 잃은 이 여인의 고통이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는 것과 의지할 곳 없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추측케 합니다. 이 여성은 남편을 떠나 보낸 뒤에도 지켜야 할 이가 있으니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생활을 이어왔을 겁니다. 지독한 가부장 사회안에서 일자리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이 아이를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겠죠. 그러나 이젠 삶을 버틸 이유가 없어졌으니 꾹꾹 눌러담았던 슬픔, 그동안의 설움, 깊은 상실감이 휘몰아쳐 참을 수 없는 울음으로 터져나왔을 겁니다. 이 여인의 구멍난 마음은 어찌 메워질 수 있을까요. 고통에 짓눌린 이 여성에게 전할 위로의 말이 변변찮습니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책엔 옳은말이라는 시가 담겨있습니다. 이 시는 아이를 잃은 엄마가 쓴 시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요. 나인성 과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가 아닐까 합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제발 내가 그것을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주세요.

난 그것을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테니까요.

지금 그가 있는 곳이 이곳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는 지금 내곁에 없으니까요.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중략-

내게 다만 당신이 내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주세요. 만일 당신이 그를 잊지 않았다면.

신은 인간에게 극복할 수 있는 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다만 내게 가슴이 아프다고만 말해주세요.

내가 내 아이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단지 들어만 주세요.

그리고 내 아이를 잊지 말아 주세요.

제발 내가 마음껏 울도록 지금은 다만 나를 내버려둬주세요.

 

이 시를 읽다보면 우리는 참 위로에 서툴다 싶습니다. 종교적인 언어에 갇혀 설익은 말들, 마음에 가 닿지 못할 말들을 너무 자주 꺼내놓곤 합니다.

 

이 여인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지금 어찌 장례를 치르고 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충분하진 않지만 슬픔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12절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본문을 보니 많은 사람이 함께 애도하고 있습니다. 부조시스템이 그나마 잘 작동하고 있는거죠.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 여성은 전문적으로 곡해주는 사람들의 소리에 자신을 파묻어 마음껏 슬퍼할 수 있었고 장례를 마치고 돌아가서는 집에 준비되고 있는 북돋는 식사라고 이름붙은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공동체에 기대어 고통과 상실 속에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을테죠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아이잃은 이 여인이 진정한 위로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길이 되어주겠죠. 결론적으로 그 길은 주님의 연민을 경험하는 것이고 연민의 시선과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주님을 보시죠. 13절은 주님이 이 여인을 가엾게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연민한 것이죠. 그리곤 울지 말아라.” 합니다. 값싼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의례적인 말이었다면 앞의 시에서처럼 아무런 위로도 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권고는 연민의 말이기에 힘이 있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말이었기에 힘이 있습니다.

 

가엾고 불쌍히 여긴다 할 때 흔히 우리는 동정심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연민과 동정은 다른 단어입니다. 동정은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에 위계를 발생시키는 단어라고 합니다. 동정하는 나는 동정받는 너보다 여러 면에서 우월하기에 동정할 수 있다는 거죠. 헬라어 성경에서 이 단어는 스플랑크조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장이라는 고사성어를 보면 잘 나타나있습니다. ()나라때, 한 병사가 배를 타고 가다가 장난삼아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걸 본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며 배를 쫓아 40km를 따릅니다. 어미는 배가 정박하자 배 위로 뛰어 올라왔지만, 그만 죽고 맙니다. 배에 있던 자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어미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를 좇는 내내 창자가 뒤틀리다가 끊어지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했던 것이죠. 흔히 애간장이 탄다. 녹는다. 끊어진다 하죠. 이런 경험이 스플랑크조마이에 담겨있습니다.

 

미국 텍사스에서 신대원 교수를 하고 있는 강남순은 스플랑크조마이가 영어로는 컴패션, 우리말로는 연민으로 번역될 때 그 의미가 온전하다고 합니다. 연민은 주고받는 이들 사이에 윤리적 위계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민은 멀찍이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슬픈 감정만 헤아리며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며 적당히 돕는 것이 아닙니다. 연민은 고통하는 이의 삶 한복판으로 뛰어들어서 함께 살아가며 함께 고통을 당할 만큼 공감하는 겁니다. 함께 고통 당하기 때문에 너의 고통과 아픔이 내 것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민하는 이는 위험을 감수합니다. 연민은 감정이면서 동시에 의지이자 실천하는 행동이 됩니다


주님의 연민이 주님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시죠. 가버나움에 계셨던 주님은 나인성으로 옵니다. 걸어서 대략 10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유대인 장례는 보통 사망한지 하루 안에 치른다고 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흙으로 보내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11절 보시면. 이 본문은 그 뒤에 곧, 으로 시작합니다. 가버나움으로부터 10시간 걸리는 거리를 한걸음에 급히 온 것이라 읽어도 무리는 아닐 듯 합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 장례행렬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주님은 어미의 상실과 슬픔을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여긴 것이죠. 어서 이 어미를 만나야 했던 것이죠. 여인의 울음이 주님의 마음을 헤집고 여인의 슬픔이 주님의 마음을 토막내었기 때문입니다게다가 주님은 관을 만집니다. 관을 만지는 일은 부정해지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주저 없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십니다. 자신의 평판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게 연민입니다. 관을 메고 가던 이들은 이 뜻밖의 행위에 놀라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삶으로 뛰어들어 여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안으며 기어이 함께 웁니다. 그리곤 아이를 살려 돌려줍니다. 아이의 소생은 연민에 뒤이은 결과이며 열매입니다. 연민없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민을 빼버리고 기적만 봅니다. 진짜 기적은 연민임에도 말이죠. 연민이 아닌 기적만이 우리 눈길을 끈다면, 성경을 아무리 읽고 교회를 백날 나와도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기적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또 다른 고난에 빛바래지만 연민의 경험은 우리 안에 닻을 내려 주님을 단단히 신뢰하도록 합니다.

 

주님이 연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픔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히브리서를 좀 보시죠. 217절은 주님은 모든 점에서 사람들과 같아졌습니다. 18절은 주님이 몸소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했습니다. 415절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고통을 아셨고 상실을 경험했으며 눈물로 밤을 지새워 본 분입니다. 주님은 어린나이에 아버지 요셉과 사별했고 가부장 사회에서 맏아들이었던 주님은 슬픔에 무뎌지기도 전에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목수일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먹여 살렸겠죠. 가난의 무거움과 가장의 막막함, 버거움, 외로움을 아시지 않았겠습니까. 아비없이 길러진 자녀들의 피곤하고 외로운 삶과 남편없는 과부의 고단함을 알았겠죠.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죽음 앞에 남겨질 마리아의 슬픔을 내다보고 있기에, 나인성 과부의 슬픔에 함께 할 수 있었을겁니다. 물론 주님 역시 지리적, 시간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아픔을 다 경험했다곤 할 수 없겠죠. 그럼에도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인간 권리를 잃고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삶을 아셨고, 평생 혼외자라는 의심을 받으며 편견에 맞서 살아야 했을 것이고, 시대정신에 반하여 다른 가치를 설명하고 설득해야하는 모난 돌처럼 살아야 했고, 끝내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해야 했고, 충분한 소명의 기회를 얻지 못한 체 억울한 정치범으로 대중의 변덕에 희생자가 되어야 했기에 외로움과 버거움과 불안과 울분과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었죠. 주님은 고통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선 여러분들의 고통을 아십니다. 한분 한분이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불안한지 얼마나 두려운지 얼마나 억울한지요.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기까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시지요. 어떤 고민이 발걸음을 무겁게 하시나요? 어떤 아픔이 마음을 부수고 헐고 있나요? 여러분들의 삶에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나인성의 여인은 죽었던 아이를 돌려받음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여인처럼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가 응답받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대하고 바랬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곳으로 이끌어 가기도 하시고. 또 많은 경우엔 하나님은 여전한 문제 속에서, 우리가 연민의 시선과 마음을 배우도록 하십니다. 고통 안에서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의 고통에 연대할 줄 아는 연민의 시선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갑니다제 경우에도 한부모가정의 자녀로, 가난한 살림을 경험하며 고단하게 살았는데요. 저의 너덜너덜해진 삶에 찾아온 위로 역시 아들아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는 음성으로 찾아 온 주님의 연민이었습니다. 주님의 연민이 저를 위로하고 구원하셨죠. 문제는 여전했지만 내가 너의 고통을 알아, 니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하는 음성은 저를 비로소 쉬게 했습니다. 전 제가 신앙의 1대이거든요. 주님이 고통을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때, 주님이 내 삶을 연민하여 내 삶에 들어와 함께 버텨주시는 분임을 알 때, 주님께 내 인생을 걸어봐도 좋겠다 싶었죠. 다른 무엇보다 주님만 있으면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민은 제 꿈과 소원도 이끌어, 저 같이 절망하고 힘겨울 청소년들을 위해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더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무거운지를 이해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홀로 울고 있게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애끓이는 슬픔으로 우리의 삶을 안아 모든 순간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온전히 위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시는 주님께 여러분들의 불안하고 걱정스런 마음을 내어드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연민을 경험한 이들은 위로를 받아본 사람들은 연민의 시선과 마음을 가진 연민의 사람들이 되어 갑니다. 우리 영혼을 좀먹고 있던 원망과 슬픔, 분노로부터 풀려나 다른 이의 고통에 눈을 돌리고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길 마다하지 않는 연민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죠. 그리고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말하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펼쳐가는 구원의 일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연민이 그리고 우리가 배우는 연민의 시선과 마음이 우리 교회와 우리 삶 언저리마다 위로와 회복과 구원의 경험들을 이어져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연민 속에서 서로같이 위로와 구원을 경험하길 바라며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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