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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두루마리를 먹어라!(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2020년 2월16일)

하늘기차 | 2020.02.16 13:10 | 조회 1119


                  사람아! 두루마리를 먹어라!

2020216(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2:1-5;3:1-3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사람아하고 부릅니다. 우리도 종종 상대를 부를 때 이 사람아!’라고 부릅니다. 남 다른 친근감을 보일 때도 있지만, 질타를 할 때에도 이 사람아!’합니다. ‘사람아라는 말은 억양에 따라 묘한 의미를 전합니다. ‘이 사람아!’, ‘이 사람아!’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책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신앙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아!”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도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 한국교회에도 하나님으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사회는, 지구촌은 점점 병들어 갑니다. 우상의 하나님, 종교의 하나님은 차고 넘치는데, 참 사람은 없습니다. 독일의 D. Bonhoeffer 목사는 그래서 반 세기 전에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Ohne Gott, Vor Gott) 서자고 하였습니다. 마치 기계 장치 처럼 되어버린 하나님, 기계 장치의 신’(Deus ex Machina), 틈을 채우는 신을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참사람으로 서자는 것입니다. 기계장치의 신이란 그리이스 비극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이 극의 마지막에 기중기 같은 장치를 통해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극의 갈등을 풀어내며 마무리짓곤 하는데, 이를 비판하여 기계장치의 신이라 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416가족들과 목공을 통해 교감을 한지 5년이 넘어갑니다. 취미목공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을 하였습니다. 작년 개소식 때 우리 교우들도 많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습니다. 가족들은 지금도 아이를 잃은 트라우마로 매우 힘든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화를 삭히지 못해 사소한 일에 분노하며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를 줍니다. 이상하게 한 분이 유난히 자기 고집과 틀에 묶여 사사건건 의견 충돌을 특히 조합장과 일으켜 매일매일 살 얼음을 걷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래서 작년 말부터 심리치료선생님을 초청하여 상담을 받는데, 서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서로 너무나 잘 압니다. 인정해주고, 존중해 주고, 이해해 주면 되는데, 하다못해 근처 점심을 먹으러 가면 김치찌개를 먹느냐, 동태찌개를 먹느냐 같은 것으로 다투기가 일 수입니다. 그러던 중에, ! 매 주 목요일 마다 헤른후트 기도서 말씀을 읽고 서로 느낀점을 야기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목공가족 분들 중에는 교회를 떠났지만 모두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심리상담선생님에게 한 분이 좀처럼 사사건건 이견을 보여 모두를 힘들게하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참 의미 있는 이야길 해 주었습니다. 그 분에대해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 분에게 왜 그렇게 해!”라고 하면 벼랑 끝으로 모는 것 밖에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어렵고 지리하더라도 그분이 질문하고, 이견을 제시하는 내용을 받아들여 품을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나 역시도 무언가 전체가 함께 그 사람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하겠다는 생각을 어렴풋 하였지만 전문가를 통해 듣게되니 마음에 확실히 들어옵니다. 마음에 들어오면 무어합니까? 그 내용이 실현되어야지요.

   바로 이 부분입니다. 헤른후트라는 물론 좋은 기도서를 통해 일주일에 한 번 같이 묵상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틀이 416목공소 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성경, 묵상, 기도,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쉽게, 편하니까 하나님으로 넘어갑니다. 물론 기도, 묵상이 쉬울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등한시 하자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예배와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쉽게 종교적인 행위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책임전가가 될 수 있고, 보다 더 깊이 문제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답입니다. 편의적로 원하는 때 신을 불러 내는 무당 굿하는 식의 푸닥거리로 하나님 불러내는 것은 뒤로 하고 자유하는 하나님처럼 나 역시 하나님 닮은 사람으로 우리의 삶을 성령의 감동을 품고 맞닥뜨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사람으로, 그것도 가장 낮은 마굿간, 가장 천민이었던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 종교에의해 참 하나님인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추측컨대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어 큰 아들로 열심히 땀흘리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틈이 나는대로 회당에서, 산과 들과 바닷가에서 구약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기 정체성을 찿으며, 하나님 나라의 뜻을 헤아리고, 깨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목수는 요즈음은 나무들이 규격화되어 나오지만 이 전에는 나무를 켜서 다듬고, 깍고, 잘라 그 나무 안에 감추어져 있는 나무의 생김새를 따라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그 목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시어,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 탄생시키십니다. 스스로 열등하거나, 아니면 교만하거나, 절망하는 사람을 주님은 본래 스스로의 모습으로 회복케 하십니다. 약물이나, 알콜, 도박, 아니면 컴퓨터 등에 중독되어 노예가 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성장과정 속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나, 학대, 또는 감추어진 수치심 같은 마음을 나무 판제에서 옹이를 다루듯이 매끄럽게 승화시킵다. 미쳐 고백하지 못한 죄의 짐을 내려놓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5:17에서 그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목수는 다른 기능인과 달리 마주 대하는 재료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재료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별로 소중이 여기지 않는 각재나 판재, 아니면 생 나무라도, 타다 버려진 나무 토막이라도 탁월한 목수의 손에 한 번 들어가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탁월한 목수는 그 나무가 갖고 있는 내적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탁월한 영적 목수이십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점점 더 기계적인 일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자명종 소리에 정신없이 일어나고, 라디오 뉴스에 놀라고, 출근 길 교통 체증에 짜증을 내며, 어떻게 해서든지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치열함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그 바쁜 일상 속에서 핸드폰, 자동차, 인터넷, 인스탄트 음식... 많은 기계와 매체와 시스템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데, 참 인간의 숨결, 마음결을 느껴본 지가 오래입니다. 아이들도 학교, 학원, 놀이도 프로그램에 맞추어서 놀고, 특기 교육도 하나의 기득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그러한 틀 속에서 자라다 보니 아이들의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들어진 아이들로 자랍니다. 참 사람 냄새가 그립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사람아부르시며 말씀를 먹으라 하십니다. 이것은 이제 말씀을 듣고 단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온전치 못한 것들이 회복되고 고쳐지기 위해서는 그저 듣기 좋은 말씀 만 가지고 안됩니다. 살을 베는, 뼈를 깍는 아픔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교회가 오랜 동안 이어 내려오는 성경읽기에는 Lectio Divina(렉티오디비나)라고 해서 글자 그대로 거룩한 읽기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순서로는 첫 째는 Lectio, 즉 읽기입니다. 이 읽기를 할 때 속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크지 않은 소리를 내어 천천히 음미하며 성경을 읽어내려 갑니다. 음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 둘 째로는 Meditatio입니다. 읽은 말씀을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추(反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초식동물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오늘 나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 마음으로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고대 수도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기억해 간직해 두었다가 일터에서 혹은 혼자 산책하거나 기도할 때 그것을 떠올려내어 그것을 천천히 그 말씀을 되씹고 마음에 각인시킴으로써 그 말씀으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Oratio(말하기), 즉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 말씀을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자리메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정말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기도를 끊지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그 읽은 말씀이 내 삶 속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Contemplation 즉 관상입니다. 글자그대로 그 말씀을 내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나도 그 제자들과 함께 따라가며, 병도 고치고, 말씀도 듣고, 함께 음식도 나누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상황을 그려보는 묵상을 통해 실제 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주님이 함께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노라면 말씀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이 조금씩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삶을 읽어주는 거룩한 읽기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은 WCC의 성경연구 신학자 한스 루이디 베버의 오랜 성서연구의 결과 속에서 나온 체험의 고백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머리로 읽습니다. 그래서 금방 감동하고, 쉽게 잊습니다. 그래서 성경읽기는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영으로 궁극에 우리의 삶 속에 녹아지는 두루마리를 먹는 성경읽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히4:12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

                    과 영을 갈라 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 냅니

                    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

                    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에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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