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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공동체 언어(창조절 열한번째주일, 2019년11월10일)

하늘기차 | 2019.11.11 18:40 | 조회 871

 
                           

                           사랑은 공동체 언어

20191110(창조절 열한번째주일)                                                                              6:27-38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조건없는, 헌신적인 아가페 사랑을 묻습니다. 이 질문을 두 번 하셨는데, 우리는 믿음의 언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합니다. 베드로 역시 아가페의 헌신적인 사랑에대해 무심코 답을 하였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필로스의 사랑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적으로 대답하는 베드로를 깨우치기 위해 필로스로 물어 본 것입니다. 바로 우정, 결의, 의리입니다.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후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그 결의, 필로스의 사랑입니다. 그 때야 베드로는 당황해 하며,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 보다는 자기 사랑에 익숙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 나의 연약한 모습이 떠 오르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고, 자신없어 집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모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잘 대하는 것이 사랑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사랑은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공동체적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아시는 것처럼 사랑의 장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내용의 시작은 12장 은사에서 시작됩니다. 은사는 성령이 각 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은 하나이지만 발, , , , 코를 비유로 들며 예언자, 교사, 기적을 행하는자, 치유자, 봉사, 관리, 방언 등의 선물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라 합니다. 특히 지체 가운데서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하면서 13장에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며 사랑에대해 말씀을 합니다. 사랑은 13장 만 따로 놓고 보면 개별적인 마음 자세로 바라 볼 수도 있지만, 12장과 연결해서 보면 사랑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언어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일4:16에서 사랑에대해 하나님의 사랑은~’ 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합니다. 과연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의 나는 나라는 명쾌함이 드러납니다. 주어와 술어를 바꾸면 사랑이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이시듯이 사랑도 영입니다. 영적인 것이어서 보이지 않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을 나눌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며 다분히 이기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일4:10는 증언합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

                          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 만이 사랑입니다.

   언론인이며, 시사 평론가, 그리고 목사인 김용민님은 <혐오를 혐오하다>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은 남을 미워하거나 차별하거나, 더 더욱이 혐오할 수 없다면서, 동성애자, 난민, 타종교인, 정치적 반대자마저 사랑해야 한다며, 그들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단순 명쾌하게 사랑을 정의합니다. 사랑에 반대되는 언어가 있다면 어떤 말이 있을까요? 미움인가요? 미움은 개인적이지요. 집단으로 작동하는 혐오 아닌가요?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공연한 혐오발언과 증오범죄는 이제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 ‘극혐(극도로 혐오함)’ 등의 유행어에서 알 수 있듯, 이미 일상적으로 혐오와 증오를 표출하는 혐오사회가 되지않았나 싶습니다. 혐오사회의 저자 카롤린 엠케는 오늘날의 혐오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름을 이유로 누군가를 멸시하고 적대하는 행위에서, 또 그러한 행위를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태도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공모되는 것이며, 혐오로 인해 사회적 긴장이 계속 높아지면, 언제든 통제하기 어려운 집단적 광기와 폭력으로 번질 수 있다고 합니다. 최근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은 혐오와 차별의 광기를 드대로 보여주는데,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기독교가 그러한 현상을 주도합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우리 시대의 혐오, 편견, 차별을 흥미롭게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특히 냄새라는 매개로 빈부의 차이를 아주 묘하게 드러내 보여주는데, 자신을 벌레취급하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주인공 기택은 혐오감과 수치심과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며, 결국 증오로 변질된 분노로 관계가 파국을 맞는 장면은 우리를 돌아보게 해 주었습니다.

   난민, 동성애, 외국인 노동자, 여성과 남성의 대립, , 학벌, 지역, 인종, 피부샛, 혼인 여부, 가족 형태, 종교, 사상, 자신에 대한 혐오, 정치적 혐오, 지나친 자기자존감, 북한, , , 역사 인식의 차이 등 등, 오늘 이 시대에 얼마나 편견과 차별이 만연해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혐오를 오히려 교회가 더 붇돋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성애관련해서도 미국이나 유럽교회에서는 이미 검증이 끝난 사항인데, 한국교회는 지금껏 교단이나, 교회협의회 같은 상급단체에서 한 번도 과학적인, 의학적인, 심리학적인 논의구조를 만들지 않고 무조건 성경이 반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은 한 번도 동성애가 죄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소수민족에대서는 예수님께서 종교를 넘어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몸으로 부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은 사랑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하였습니다. <혐오사회>의 카롤린 엠케는 한 번도 멸시당해본 적 없는 사람, 한 번도 사회적 경멸에 맞서 방어할 필요를 느낀 적이 없는 사람, 보이지 않는 존재 또는 괴물 같은 존재로 만드는 틀에 갇혀본 적 없는 사람은 모욕당하거나 상처를 입는 순간에도 분노한사람이나 유머감각 없는사람, ‘탐욕스러운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무렇지 않게 유쾌한 척 고마워하는 척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토로합니다.

   최근 <책 읽어드립니다>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던 중에 어느 한 심리학자가 공감과 동감은 다르다 라고 하면서, 아이가 밖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 울면서 집에 들어오자 엄마가 그 아이처럼 동감하여 같이 울면, 아이가 놀라서 엄마에게 오히려 당황해 하며 불안해 할 수 있는데, 엄마가 너를 때린 그 놈 만나기만 해라 내가 혼 줄을 내 줄게 하며 등을 도닥여 주며 공감하면 마음에 위로를 받고 스스로 회복이 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아픕니다. 그러면 그 아픔을 나누어 가질 수 없잖아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작년 416목공소 엄마아빠들하고 미국동부를 순회하면서 각 지역의 세사모 회원들과 간담회를 갖던 중에 수연아빠가 했던 말이 새롭습니다. “연민은 동정으로 끝이나지만, 공감은 행동으로 이어진다.”그러한 면에서 우리 사회는 공감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 역시 부활 후 두려워 숨은 제자들에게 찿아가 공감하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대개 혐오나 증오라는 감정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커피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한다고 표현할 자유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자연스런 감정이지만 혐오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 차원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회적 긴장을 높여 쉽게 통제하기 어려운 집단적 광기와 폭력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망각하고 소위 스스로 편의적으로 이기적으로, 교리적으로 세운 표준에 맞추어 집단 광기로 막 나가는 것 같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당성이 상실되는 그 출구를 소수, 약자들에게 돌려 마치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맺지 못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더 그럴 것이라는 이유를 소수자에게 돌립니다. 희생양을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럴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목회자 평화네트워크와 함께 강정의 송강호 박사를 찿아갔습니다. 이미 해군 기지가 들어와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강정에 살기 위해 들어 왔는지에대해 물으니, 평화가 전쟁기지에의해 깨졌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평화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오키나와 대만, 제주 강정을 3각의 띠로 엮어 공존과 평화의 바다, 공평해를 조성하고, 이 곳에 평화대학을 설치하여 많은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평화를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50여 교회가 매 주 돌아가며 한 번 씩 이 곳에 찿아온다면 평화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요청도 받았습니다. 우리가 송강호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 동감을 가질 수는 없지만, 그 열심에 공감하며 이 일의 후견인이 되어 50개 교회가 매 주 제주도에 찿아가 평화를 나누는 꿈을 꾸어보았습니다.

   4.3의 현장도 보았습니다. 4.3은 양측간의 화해를 향해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교회가 4.3을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4.3국가폭력이 기독교에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혐오, 차별, 폭력은 두려움에서 옵니다.

   그러나 롬8:15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또 딤후1:7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까 교회가 빼앗길 만한 것을 이제는 누리고, 즐기며 가지고 확개하지 않나 싶습니다. 첫 사랑, 첫 믿음, 첫 은혜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우리 모두 같이 교회가 됩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처럼 교회는 사랑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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