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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노예근성의 강을 건너자(성령강림후제11주, 2019년 8월25일)

하늘기차 | 2019.08.25 14:24 | 조회 69



              우상과 노예근성의 강을 건너자

2019825(성령강림후제11)                                                          24:1,2,14-18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 후 마지막으로 강 저편에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강 저편과 강 이편은 전혀 다릅니다. 강 저편우상을 섬기던 곳, 노예 생활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섬기십시오.”합니다. 강 이편으로 건너왔지만 강 저편의 우상노예의 근성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간에 서있지 말고, 한 곳에 서 있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미지근하지 말고 덥든지, 차든지 하라고 신앙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역시 문제는 우상노예근성입니다. 이 두가지는 따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 롬1에서 사도 바울은 우상과 제국의 폭력과 타락으로 가득한 로마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났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Justice가 아니라, Rightousness입니다. 정의가 아니라 입니다. 그것은 선하심이요, 계획이며, 섭리요, 경륜입니다. 한 번 더 그 것을 풀면 십자가와 부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18절로 넘어가면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영적 마지막 싸움이 연상됩니다. 혹자는 십자가의 사랑의 주님이 어떻게 피와 폭력으로 점철되는 심판의 전쟁을 일으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며 계시록의 하나님을 폄하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상징과 은유요, 환상의 덩어리입니다. 이 마지막 영적 전쟁을 통해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1장은 18~ 마지막 32에서 인간의 타락을 말합니다. 이러한 타락에대해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불경함과 불의라고 합니다. 불경함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죄된 모습이며, 십계명의 제1-4계명에 해당되고, 불의는 십계명의 5-10계명에 해당하며, 인간들 상호 간에,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타락의 모습인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저는 진노가 맞다는 생각입니다. 잔인한 하나님, 병주고 약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하고, 평가하고 재판하시는 것이 맞고, 성령의 적극적인 변호에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최근 한일관계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일제강제노역, 위안부 문제, 인체실험 그리고 지금 한창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현안에서 불거지는 거짓과 참, 그리고 기득권의 오만함과 차별, 혐오 등 무수한 관계들에서 벌어지는 오해, 음모, 편견, 집착, , ,등을 누가 심판할 수 있겠나 싶습니다.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가 받은 그 수모를 누가 평가하고, 그 평생의 짐을 내려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강남의 도시 한 복판 송신탑 꼭데기에 올라 삼성을 향하여 생명을 걸고 외치는 부르짖음의 원통함을 누가 평가할까요? 법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세상은 법으로 평가하지만, 교회는 생명으로 봅니다. 생명을 건 이 분의 삶을 누가 평가할까요? 최고의 평가기관인 대법원장이 욕망과 기득권과 편견에 사로잡혀 사적인 주관으로 재판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 선하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올바른 재판관이라는 생각이 들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노는 나타납니다. 그래서 롬1;18의 하나님의 진노는 롬1:17의 하나님의 의와 동시적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고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는 심판도 같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여기가 믿음의 분수령입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넘어갑니다. 의와 심판은 논리구조가 아니라, 믿음이요, 영의 언어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3:18에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믿지 않으면 그 자체로 어두움이며, 종말의 심판을 지금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단지 철학, 윤리, 종교, 그리고 어느 위대한 도를 깨친 스승의 진리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한 경계요, 꼭지점입니다. 복음은 이중적입니다. 예수와 그리스도, 인간과 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 이미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생명의 진리요, 뜻이요, 섭리이지만, 오직 롬1:16, 17의 말씀처럼 복음은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이 일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지 그 어떤 인간의 방법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구원의 신비이며, 우리는 바로 그 부르심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불경건함불의를 통해 인간의 퇴락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 23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서도 떨쳐버리지 못한 이 우상숭배와 노예근성으로부터 오는 타락의 결과에 대해 24절은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하였다고 합니다. 내버려 두었다는 이 충격적인 말씀에대해 독일 신학자 칼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제 인간이 가장 높은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 앞에서 인간을 보호 해 줄 수 있는 

                       더 높은 존재는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순해지자 그의 삶도 불순함에 처박히고, 하나 님께서 영광을 

                       잃어버리니 인간도 그 영광을 잃어버렸다

              “이제 인간은 세상이 굴러가는 형편의 모든 치욕을 치욕으로 받아들 여 참고 탄식하고 

                       저주하면서도,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끊임없 이 새로운 치욕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삶의 사물성, 피조성은 불명예가 된다칼바르트의 불명예라는 말에서 노예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5: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 피조된 존재의 아름다움, 선함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11로 만난다면 누가 더 우위에 있을까요? 누가 더 높을까요? 하나님이 높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11에서는 똑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 하나님은 창조주요, 절대자요, 이 피조세계를 계획하며, 섭리하며, 주관하며, 더 나아가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그 창조로 태어나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쫓아 그 선함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외의 그 어떤 눈에 보이는 것에 무릎꿇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11입니다. 근데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 하며 피조물의 자존감을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 아닌 것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유한함, 하나 밖에 없는, 곧 사라질 생명의 아스라함에 있다고 봅니다. 우주와 역사 속에 지금 나는 하나 밖에 없으니 이 보다 선한 존재가 어디 있으며,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실존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할 수 없는, 할 필요도 없는 역할인 유한한 존재의 존재감은 피조물로서의 특권이며,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에게서 서로의 연약함과 유한함, 한계를 보고, 그 규모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확인하며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실제를 날 마다, 새롭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우주의 모든 피조물 각자가 서로 하나의 존재로 스스로를 상대방으로부터 인지함으로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조된 우리의 삶의 존재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헝크러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 계획, 섭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난 것입니다. 1:17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18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났다고 합니다. 의와 진노가 그냥 하나입니다. 하나님에게서는 따로 나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의 의, 복음, 구원의 능력이요 신비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드디어 이 어두운 세상 속을 뚫고 나타난 것입니다. 부활도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나타나는 하나님을 우리는 자꾸 보이고 만지고 불러들이고, 감성적으로 느끼고, 더 나아가 소유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너무 멀리 왔습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건너가야 합니다.

   율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에 발을 담그자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역류해서 32km에 위치한 아담 지역에 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우리 고기리 앞의 냇가와 같이 물이 적다고 합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레바논 산악지대의 눈이 녹아 물이 뚝 언덕 위에 까지 넘쳐 흘러 건널 엄두를 못 낸다고 합니다. 마침 이스라엘이 요단강에 당도한 때가 바로 눈이 녹아 물이 넘쳐 흐르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요단강 앞에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음을 봅니다. 오히려 여호수아는 숫3:5에서 당신들은 자신을 성결하게 하시오. 주님께서 내일 당신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결입니다. 본훼퍼 목사는 회개 없이는 신앙의 진보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도도하게 범람하는 강물, 우상과 노예근성 앞에 발이 땅에 달라붙어 꼼짝 못하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십시오. 성결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범람하는 물을 거슬러 올리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기다림이 온전하면 평화이고 감사이고 위로이며, 새롭게 하며, 힘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 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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