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낯설음, 변화, 성령(성령강림후제1주,2019년 6월16일)

하늘기차 | 2019.06.16 16:52 | 조회 992

                       낯설음, 변화, 성령

2019616(성령강림후제1)                                                 3:3-8;14:15-17,26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바람과 같아서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성령께서 그렇게 요란하게 우리들에게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처음 초대교회 때 이 땅에 성령이 임할 때에는 불의 혀 같은, 바람 소리 같은 역사가 있었는데, 이것도 은유적인 표현이지 이대로 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얼마나 놀랍고, 새로운 시간이었고, 온 몸에 전율이 집단적으로 느껴졌겠습니까?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은 1회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오면 그 열매가 맺힙니다. 땀을 뻘뻘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많은 관계를 형성하며 열심히 수고하는데 열매는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포도나무 이야기를 보면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 하나님 나라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을 열심히 해서 맺히는 것이 아니라, 뜻 안에 머물러야 자연처럼 맺힙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나뭇 가지가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밤에 예수님에게 찿아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다시라는 말을 무심코 흘려버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아니 니고데모는 다시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가르침과 연구와 행함과 관계맺기도 경험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낯설어하는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인 신용복 선생님은 변화는 변방에서부터 시작되고, 창조는 변방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변화는 낯설음에서 부터라고 생각을 합니다. 최근 이휘문이라는 경기민요 명창의 영상을 몇 번 보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알겠지만, 그 분의 의상, 머리, 화장이 중성입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닙니다. 이게 무엇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보며, 무척 낯이 설었습니다. 앞으로 다가 올 시대가 어떨까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분의 공연을 보면 모든 가치, 관행을 다 해체시켜버린다는 느낌이 들고,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가락은 묘하게 무속적인 냄새도 풍기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휘문 현상을 보면서 인간 보다 더 지능이 높은 A.I로봇 인공지능 시대에, 그리고 이 보다 더 빠른 양자 컴퓨터(IBM에서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그 연산의 규모와 빠르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슈퍼 컴퓨터가 10억년 걸릴 소인수분해 문제를 100초에 풀 수 있을 정도로 단지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천지개벽의 수준이라고 합니다)가 등장한, 이 전에 볼 수 없었던 삶의 양태들이 매우 빠르게 전개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어떻게 바라 볼 수 있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섬세한 마음으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섬세하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말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6장은 이제 아버지에게 돌아가야할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애뜻한 연민을 보여줍니다. 구구절절합니다. 앞으로 교회가 감당해야할 어려운 고난, 핍박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은 제자들에게 그 원인이 있기 보다는 세상이 예수님을 먼저 싫어하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요한은14장에서 빌립도마가룟 아닌 다른 유다를 통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도마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길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습니다.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들처럼 왜 우리에게 만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알리지 않느냐고 의아해 합니다. 예수님이 말한대로 떠날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제자들은 모두 초조해 하며, 궁굼해 하며 질문을 쏟아냅니다. 베드로는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정 반대로 부인할 것이라는 말에 제자들은 멘붕에 빠집니다.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남아있을 제자들에게 함께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근데 육신으로 오신 사람의 아들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16절에 보혜사 성령으로 함께합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빌립의 사고로는 이사야, 모세가 본 하나님을 구하지만 이제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빛으로 찿아오시는 우리 내면의 빛, 영적 감흥, 보혜사 성령의 빛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하십니다. 성령은 모든 것,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에게 주신 모든 것을 성령께서 가르치고 깨우쳐 주십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 새로움과 변화의 영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체제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아니 변화하는 세상을 자신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문제는 그런 변화의, 창조의 영의 바람같은 섬세한 흐름을 따를 수 있겠는가? 무화과 나무 잎이 떨어지면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느껴지 않느냐고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이미 변화의 조짐들이 드러나는데, 중세 때의 캐톨릭처럼 교리적인 틀과 당대의 기득권에 둘러쌓여 세상의 과학과 역사의 흐름을 놓쳐버리는 누를 오늘 이 시대 개신교가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말로라는 최초의 한국 스캣 보칼리스트가 있습니다. 어떻게 째즈 가수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본래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물리학 보다는 음악이 더 좋아 피아노, 그리고 각 종 악기를 독학으로 배우면서 어느날 째즈를 듣게 되었는데,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지? 국악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음악을 들으면 이해가 가는데, 째즈는 도저히 알 수가 없고, 국내에서는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을 찿지 못해 미국의 버클리 음대에 들어가서 배워 돌아왔는데, 우리 나라의 첫 스캣 보칼리스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를 지금의 째즈 가수로 있게 한 것은 낯설음이었습니다. 이게 뭐지입니다. 그 날 말로가 한 이야기는 인상적입니다. 째즈는 멜로디가 몇 마디 없다는 것입니다. 째즈는 즉흥연주여서 같은 곡이라도 그 멜로디의 변주를 매 연주 때 마다 달리 하는데,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연주 때 마다 다른 것이 째즈의 묘미인데, 그 다름의 바탕에는 새롭게 변화하는 흐름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반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이 분은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한 분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그대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깨우치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왜 새롭게 할 수 있고, 새 힘을 줄 수 있으며, 위로와 평화를 줄 수 있는가 하면 아버지와 주님의 뜻,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주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여 깨우치는 진리의영, 창조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신앙적 신념과 종교적인 가치를 가득 품고 밤에 예수님을 찿아 옵니다.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 그러한 기적은 아무나 행할 수 없다고 추켜세우지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말에 호응하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에게서 시작되고있는 새로운 흐름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마치 부자 청년과 같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정도로 무심하게 지나가버립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서 3 번 등장합니다. 두 번째는 장막절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면서, 공회와 종교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때 니고데모가 한 마디 합니다. 그 사람의 말, 하는 일을 듣거나 보지도 않고 그를 심판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는 정도였고, 세번째는 예수님의 시신을 모실 때에 뒤 늦게 몰약을 가지고 와서 장례를 치르는 일에 참여합니다.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찿아왔다가, 예수님의 죽음 곁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집니다. 부활과 함께해야하는데 말입니다. 요한 복음에 어두움은 죽음이요, 세상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적 신앙에 매여 어두움, 즉 세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종교적으로는 충실한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움입니다. 옛것에 매인 신앙이 새롭게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도 역시 지금 옛 신앙의 학습된 경험에 머물러 여전히 같은 신앙의 삶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미 세상도 바뀌고 그에 따라 신학과 신앙의 고백이 변화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최근의 정치인들의 발언이나, 기독교계의 물의를 일으키는 한 몰지각한 분의 언어를 보면 정죄하고 심판하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는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경을 보고 부모의 죄인지, 자기의 죄인지를 논합니다. 평생 앉아있던 사람이 일어나 걸었는데 죄를 묻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등, 모든 일상을 법으로, 전승으로 정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용서를 선언하였습니다. 온 세상이 마귀요, 빨갱이요, 죄로 뒤 덮였다고 호도하는 세상 속에서, 아니 세상은 지금도 늘 그렇게 외칩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는 생명을, 화해와 용서를, 믿음을 건져 올립니다. 예수님은 나는 심판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러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며 매도하는 당대의 기득권자들에게 마귀의 자식들, 처음부터 살인한자들이라 합니다. 가만히 있을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네가 귀신이 들렸다고 하자,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고 결정적인 선언을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빛으로 있으며, 종은 아버지의 뜻을 모르지만,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의 뜻을 다 알려주었고, 말씀을 지켜 이제 친구이며,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내가 너희 안에, 너희도 아버지 안에 마치 포도나무와 같이 하나라 선언합니다. 나는 나이며, 문이며, 선한 목자이며, 생명의 빵이라 하며 죄와 법과 어두움에 붙들린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나 그리고 우리는 하나라고 선언을 합니다. 사도 바울의 핵심적인 신학인 죄 사함의 구속의 은혜와 전혀 다른 범주의 말씀을 요한은 전합니다. 오래전 뿌리라는 미국드라마에서 미국의 한 지주가 주 은혜 놀라와찬송을 부르며 채찍으로 흑인을 때리며 감사하는 장면에 충격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값싼 죄 사함의 은총과 위로에 매달려, 항상 자기 하고싶은 일 하면서 주님 앞에 죽을 죄인으로 무릎을 꿇는 것은 아닌가? 교회의 목사는 마치 제사장처럼 하늘의 용서를 마치 죄 많은 성도들에게 베푸는 듯한 모양세가 틀이 되고, 제도가 되어 그저 맹목적인 아멘을 양상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저는 요한을 통해 또 다른 자유와 평화를 맛 보았습니다. 바울을 읽다보면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자꾸 부활의 자유가 아니라 죄와 죄책감을 봅니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예수뿐 아니라 이 역사와 우주 속에 우리도 함께 하나님과 합일을 선언합니다. 내가, 우리가,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이며, 주님과 친구입니다. 이 선언에 죄가, 죄 책감이 감히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합니다. 바람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유, 평화, 생명을 살아가기를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1/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308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646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020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513 2005.09.02 16:30
975 생명과 죽음과 사랑(1월 21일 저녁예배 평신도 강단: 강민석 집사) 사진 첨부파일 씨알 140 2024.01.28 21:09
974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열심(성탄절후첫번째주일, 2023년12월 3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3 2023.12.31 10:14
973 참 생명이 태어난 날((성탄절, 2023년12월 2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19 2023.12.25 13:42
972 기다림((대림절네번째주일, 2023년12월 24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04 2023.12.24 16:41
971 개와 늑대의 시간((대림절세번째주일, 2023년12월 17일) 사진 첨부파일 만지다 104 2023.12.20 13:56
970 깊은 밤, 들녘에서(대림절두번째주일, 2023년12월 10일) 첨부파일 stephensh 198 2023.12.10 16:01
969 기다림 속에 평화(대림절첫번째주일, 2023년 12월 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35 2023.12.03 14:49
968 인자가 찾는 믿음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일, 2023년 11월 26일) 사진 첨부파일 만지다 140 2023.11.27 11:26
967 채우는 일꾼(평신도 강단: 이계숙 집사, 2023년 11월 19일 저녁예 첨부파일 김현식 145 2023.11.20 11:23
966 신앙의 근본(성령강림후 스물다섯번째 주일, 2023년 11월 19일) 사진 첨부파일 김현식 153 2023.11.20 11:14
965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쓰자(창조절열번째주일,2023년 10월2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76 2023.11.05 14:05
964 가장 큰 계명(종교개혁주일,2023녕 10월2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5 2023.10.30 10:24
963 생명의 샘 흘러 넘처 감사(추수감사주일, 2023년10월2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70 2023.10.22 11:01
962 생명의 샘이 흐르게 하라 ! Ⅲ(창조절일곱번째주일, 2023년10월1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54 2023.10.15 13:28
961 생명의 샘이 흐르게 하라 ! Ⅱ(창조절여섯번째주일, 2023년10월8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02 2023.10.08 14:12
960 생명의 샘이 흐르게 하라 !(창조절다섯번째 주일, 2023년 10월 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54 2023.10.01 13:03
959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창조절네번째 주일, 2023년 9월 24 만지다 160 2023.09.28 12:42
958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느니라(창조절세번째 주일, 2023년 9월 17일 사진 첨부파일 김현식 173 2023.09.17 20:28
957 연민과 회복(창조절두번째주일, 2023년 9월 10일) 사진 첨부파일 stephensh 249 2023.09.10 13:09
956 바다도 그의 것(창조절번째주일, 2023년 9월 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5 2023.09.03 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