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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 그리고 선한 목자이다(어린이주일, 2019년 5월 5일)

하늘기차 | 2019.05.05 14:07 | 조회 68


               나는 문, 그리고 선한 목자이다.

201955(어린이주일, 부활절 세째주일)                                         10:22-30;7,11

 성전봉헌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4(B.C175-164/170에 침략)가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우고, 절하게 하며, 돼지를 잡아 피를 뿌리며 성전을 모독하고, 친헬라파 유대인의 한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워 성전을 관리할 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제우스 상 앞에 무릎을 꿇게하는 왕명이 떨어졌는데, 순수 혈통의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의 맛다디아의 아들들, 특히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베오(B.C164)가 용맹을 떨쳐, 소위 마카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합니다. 이 절기가 되면 8일 동안 집집 마다 촛불을 매 일 하나씩 밝혀 8일에는 가운데 큰 촛불을 중심으로 모두 아홉 개의 촛불을 밝혀 성전 회복을 기념합니다.

 유다 마카비가 성전을 탈환하였을 때 메노라(지성소의 촛대)에 기름이 단 하루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성전에선 레위기 법에 따라 거룩한 기름만 사용하게 되어있어서 일반 기름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적은 양의 기름에도 불구하고 성전의 메노라는 팔일동안 꺼지지 않고 그 빛을 밝혀, 제사장들은 이 기간동안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할 수 있었으며 거룩한 기름도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봉헌절 절기가 어떻게 ''과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주며 왜 팔일 동안 지키는지 설명해주는데, 바로 그 절기에 예수님이 성전 솔로몬 주랑을 거닐었습니다.

 예수님이 13m의 돌기둥으로 둘러있는 동쪽 이방인의 뜰, 불을 환히 밝힌 솔로몬 행각을 거닐었는데, 그냥 거닐으신 것이 아니라, 이 곳은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명상하는 곳이며, 랍비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곳 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묻습니다. “당신이 메시야이면 그렇다고분명하게 밝히라고 합니다. 불을 환히 밝힌 회랑에서 유대인들이 빛이신 예수님에게 네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 말하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미 말을했는데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10장 말씀이 양의 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9장 마지막에 눈을 뜬 사람이 출교를 당하자, 예수님께서 직접 찿아가 위로하며 말씀을 나누었고, 요한은 이 상황을 참목자의 모습으로 보면서 10장에서 양의 문, 문지기, 참 목자, 삯군 목자에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7절 이하에서 풀어서 설명을 하는데, 그 때 나는 양의 문이며,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반복해서 이야기하는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누구냐? 메시아냐?라고 정체를 묻습니다. 봉헌절입니다. 이 사람들의 질문하는 마음 속에는 예수가 유다를 해방시킨 유다 마카비 같은 메시야, 영웅이냐 라고 묻는 질문입니다. 불이 환히 밝혀있고, 예수님은 거듭 나는 빛이며, 빛이 있을 때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말은 듣지 않고, 정치적인, 이기적인, 기득권을 지키기위한 생각에만 골몰합니다. 예수님은 군사적 힘, 세상의 권세를 바탕으로 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러한 힘은 역사적으로 일시적이거나, 한 집단, 나라에게 지배와 전제의 힘은 줄 수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영웅, 용사는 일시적으로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메시야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비주체적으로, 그리고 개체적인 모습으로 초라한 자아, 여전히 껍데기 만 남은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 할 때 단순히 들판의 양들이 드나드는 울타리문 일 수 없는 것은 10장 본문에서 도둑, 강도, 목자, 삯군, 이리, 다른 양들 등의 단어들이 상징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오는 최단거리에 위치한 양의 문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문은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곽을 재건할 때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문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문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람들이 가축과 함께 드나드는 문이어서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장사치들이 이 문을 사용하였지만, 종교인들과 일반인들, 그리고 순례자들은 다른 문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가축판매 독점은 대제사장 안나스의 몫이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제물 거래, 환전, 기부금, 십일조, 토지 수입, 성전세 수입 등 말 그대로 돈을 내고 구원(속죄)을 구입하는 종교시장이었던 셈이었습니다.

 이 양문 바로 앞에는 5장의 38년된 환자가 일어선 베데스다 못이 있습니다. 이 못은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후 성전에서 제사지낼 때, 가축들을 깨끗이 씻어 제사장에게 검사 받기위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치료효과의 소문이 퍼지면서 불치병환자들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곳은 성전의 전통적인 구원제도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구원을 갈망하는 곳이었습니다. 양의 문은 성전과 베데스다 못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한 쪽은 제도 안에서 죄책감과 죄사함이 실물로 거래되였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삶 전체가 걸린 고통,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주술적이고도, 이교적인 공허한 기적의 자비를 덧 없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성전에서는 대제사장이 판매자가 되고, 장사꾼들이 브로커 역할을 하면서 희생제물을 매개로한 정결과 죄의 용서의 의식이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면, 베데스다 못가에서는 구원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지만 그 헛된 망상이라도 붙들며 생명을 부지하는 곳이었습니다. 성전 안의 사람들은 이 체제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물이 동하면 누군가 불치병 환자를 못에 넣어준다면 그래서 자비를 베푼다면 이 보다 더 좋은 모양세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유지되던 균형이 예수에 의해서 아니 이미 세례 요한에의해서 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용서와 정결의식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식인데, 광야에서 길거리에서 요한과 예수에의해 행해진 것입니다. 잘 진행되어가던 2원적인 구원시스템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된 환자를 믿음을 따라 스스로 일어나게 하시어 성전 제사가 아닌 새로운 성전으로 초대합니다. 문이신 예수, 참 목자이신 예수에게로 초청을 합니다.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동안 다른 문을 통해 성전을 드나들었지만 양의 문을 통해 베스다로 나아가 자신들이 외면했던 세계를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과 눈물을 제물 삼아 유지되고 있는 성전의 체제로부터 나와서 망각하고 있던 참담한 구원의 현장을 보라고 합니다. 결국 양의 문은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공간입니다. 양의 문을 경계로 하여 이쪽과 저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각각의 교환체계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두 무너지는 더 이상 베데스다와 성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뜬 사람이 양의 문을 통해 평생 가 보지 못하던 성전으로 향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눈물겨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안식일을 거역한 것 만 보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고유권한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일하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을 모독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들의 경제권을, 기득권을, 잘 유지되던 두 체제를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도 건드리지 못하는 굳건한 철밥통을 건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와 하나님은 하나라고 선언을 합니다. 이 선언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참 생명의 문으로 초청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고,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이며,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문을 통해 온 우주와 역사와 피조물이 조화롭게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목자들이 양의 우리를 만들 때 문짝을 달지 않고 울타리를 쳐서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문짝이 없는 대신 밤에는 목자가 문에서 잠을 자며 양을 지켰기에 누구도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를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목자는 자신을 양의 문과 동일시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 문과 목자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합니다. 누가 좁은문으로 들어가나요? 이 문은 십자가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양의 문을 세우셨고 우리를 그 문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 문은 베데스다의 못에서 허무하게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성전이라는 이미 상업화되어버린 하나님 떠난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양의 문입니다. 이 어린양의 피흘리는 죽음이 없었다면, 모세는 바로와 대적하다가 결국 지쳐서 백기를 들고 바로의 왕국을 스스로 걸어 나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붙잡으심이 없었다면 결국 아들을 살해하는 인륜을 거역하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모세와 바로와의 처절한 싸움을 멈추게 한 것도 어린양의 피였고, 아브라함이 자식을 제물로 드려야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돌이키게 한 것도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모세가 바로에 대항하여 애쓰고 수고하는 것, 아브라함이 우리로서는 흉내낼 수 조차없는 인륜을 거스르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바로와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울 때, 그 싸움을 결정적으로 모세에게 붙이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 피흘림의 죽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인륜을 접어두고 자기 아들 이삭을 야웨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들 이삭을 바치려 덤벼들 때. 아브라함의 칼을 든 오른 팔을 붙잡은 것은 덤불 숲 속에 준비해 둔 피흘릴 어린 양입니다. 어린양 피흘린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그 애쓰고 수고함이 헛될 수 밖에 없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시려고, 온 인류 모두에게 유일한 생명의 문인 십자가를 기필코 세우신 것입니다. 좁아보이고, 힘들어 보이고, 찿는 사람이 적지만 결국 문은 하나 어린양 피흘림의 십자가입니다. 스스로 열심을 다해 자기 문을 만들어 함정에 빠지지 말고, 선한 목자의 인도하심을 따라 십자가 어린양의 생명의 문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겠습니다. 양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양은 공격적이지 않을 뿐 더러, 방어능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 살기 때문에 이리나 늑대에 노출되어 공격을 당하면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사탄 마귀, 죽음의 권세가 성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이, 교회가 무너지고, 흔들린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은 선한 목자의 보호와 인도가 필요합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신 분이며, 우리의 이름과 소리를 기억하십니다. 목자가 말씀 할 때 듣고 따라 주님이 베푸시는 푸른 초장의 꼴을 마음껏 먹고 누리며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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