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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죽음의 만남(창조절여섯째주일, 2017년10월8일)

하늘기차 | 2017.10.08 12:52 | 조회 1446


                       생명과 죽음의 만남

2017108(창조절 여섯째주일)                                                                         7:11-17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인성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에서는 과부의 외아들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역시 많은 사람들이 둘러메고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뒤에 따라오는 그 어머니의 울음이 그 주변을 진동시켰을 것입니다. 생명과 인간 최대의 숙적인 죽음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가엾게 여기시며 울지 말라 하시고는 좀 더 관 가까이 접근하여 관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행열이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외아들, 청년이 일어나 말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 뫃여있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죽은자를 살리는 기적을 3번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죽은지 사흘이 지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 누가는 잠들었다고 말씀하신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오늘 말씀의 청년입니다. 이 기적 사건의 본문을 읽으며 느낀 것은 ?’였습니다. 누가는 왜 죽은자를 살리는 기적 사건을 2번이나 기록하였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니 초대 교회 이후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다시 살림은 부활과는 다른 다시 살림이기도 합니다. 부활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고, 이 복음서의 죽음은 자연사로부터의 다시 살림이어서, 이 사람들은 다시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나 복음서기자들이 죽은자를 살리는 기적을 기록한 그 의미를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앞장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 하인 뿐 아니라, 복음서는 셀 수도 없는 많은 환자들, 귀신들린자, 눈먼자, 앉은뱅이, 중풍병자들을 고쳐주심을 봅니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를 처음 기록한 마가복음은 말씀 보다는 기적의 사건을 훨신 더 비중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곧 말씀이며, 예수님의 기적이 곧 당시의 시대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표적이었습니다. 표적이라 했습니다. 표적은 행위자와 갚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님 못지 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아니 그 당시에는 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세례요한에게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세례 요한을 예수와 차별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메시야 대망의시대였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제사, 성전을 통한 모든 하나님 신앙이 기득권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일반 백성들이 모두 등을 돌린 시대였으며, 로마의 참혹한 압제와 백성들을 괴롭히는 수 많은 질병들 때문에 모든 삶의 희망이 끊어진 시대였는데, 그나마 믿음이라고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을 로마의 억압에서 구원하여, 다윗 왕권을 회복하는 믿음이 민간인들을 통해 하층의 사람들의 저변에서 흐르는 신앙이었습니다. 여러분 60, 70년대를 기억합니까? 광화문에, 각 언론사에, 대학교에 군인들, 탱크가 정주했던 것이 일상이던 때에 참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정도령이 나타나면 이 나라가 회복이 될 것이라는 풍문들이 떠돌았고, 그리고 80년대의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질 때, 그 때 김지하시인의 오적을 보면 매우 종말적이고, 묵시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시는 이 보다 더 끔찍한 시대를 살았을 것입니다. 온 나라가 죽음이었습니다. 말씀이 끊어졌고, 종교도, 나라도, , , 그 어느것도 생명인 것이 없었던 때에 주님이 생명을 주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35장은 그러한 표적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곳곳에 특히 이사야서에 메시야가 오면 어떤 표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에대해 예언하였는데, 그것이 예수님과 딱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11:2에서 세례요한은 예수가 자기가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닌 것 같아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하면서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

                         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

                         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고 합니다. 4:18에서는 예수님이 회당 들어가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서 바로 61:1,2절 말씀인데, 21에서 예수님은 이 성경말씀이 너희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을 합니다. 4:40을 보면 해가 질 때에 사람들이 온갖 병으로 앓는 사람들을 다 예수께로 데려왔는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이 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그 분이라는 것을 기적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칭한 것입니다. 율법이 그 정신은 사라지고, 문자만 남아 모든 사람을 죄인되게 하는 시대 속에 예수님은 네명의 친구들이 데리고 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메시야이며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시대도 역시 죽음이 세상을 압도하려합니다. 얼마전 미국 라스베가스 총기난사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 보다도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는 여전히 세월호의 시간에 묶여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학살 사건 이래, 세월호살해사건 보다 더 한 사건을 본 기억이 없어, 생명의 시간이 멈추어졌다는 생각이듭니다. 진실이 규명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독일이 그나마 금세기에 글러벌한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유대인학살, 전쟁에대한 철저한 참회에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십습니다. 지금도 북한과 미국은 한반도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핵을 담보로 말장난 싸움을 거침없이 해대고 있습니다. 이 땅이 평화에대해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십습니다. 이 땅에 평화가 무엇인지 알고, 평화를 만들어 간다면 감히 독수리가 한반도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죽음은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세월호 가족들은 아이들의 죽음을 여전히 품고 지냅니다. 이러한 죽음의 시대에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나인이라는 말의 뜻이 잘 생긴, 아름다운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의 기록은 참 탁월합니다. 아름다운 성에서 썩어 문들어진 죽음이 진용을 갖추어 나오고 있습니다. 장례를 집례하는 목사도 있었을 것이고, 덕망있는 지도자, 재력가, 가족들, 친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의 어머니를 보며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얼마전 선대인씨를 초청하여 미래시대에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으로 첨단 과학이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 줄 것인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보다 깨끗하고, 심플하고, 빠르고, 편리고, 수명도 더 길어지는데, 그래도 생명은 아니며, 여전히 죽음입니다. 그러나 요일3:14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

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사도 요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고 말합니다. 남에게 피해입히지 않고 착하게 살고, 남을 배려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온전한 삶을 산다고 해도 결국 그 사람은 잘생긴, 아름다운 나인성에 사는 사람일 수 밖에 없으며, 결국 과부의 죽은 청년의 관을 따라 나인성에서 나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따라 묘지로 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죽음을 어떻게 멈추게 하셨나요? 14절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나인성을 나인성 되게,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좋은 것을 좋게, 우리의 삶을 생명이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여전히 나인성에서 스스로 잘 산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격입니다. 그러니 사랑 싸움 하세요. 연인들이 밀고 당기며 밀당한다고 하잖아요. 주님과 사랑 싸움하세요, 그대신 주님에게 져야합니다. 져야 이깁니다. 마치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엉치뼈가 깨지면서, 그동안의 그 모든 인생의 가치와 경험과 주관과 계획을 다 내려 놓고, 온 밤을 꼬박세워 온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절뚝거리며, 떠오르는 해를 뒤로 하고 피해가려던 형 에서에게 하나님 믿음에 붙들려 다가서는 야곱처럼, 져야 이기는 것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십자가의 생명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삶과 다릅니다. 생명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생명의 삶의 시작이 사랑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며 관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시신을 만지면 부정하여 죄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만지셨습니다. 사랑이십니다.

     처음에 저는 왜 누가는 두 번이나 예수님의 죽은자를 살리는 표적을 기록하였을까?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당시, 지금도 그렇지만, 온 세상이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죽음 속에서 예수님이 생명으로 말씀하시고, 생명으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다시 살림은 없습니다. 그리고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생명인지를 표적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시대의 언어로 해석해서 읽지 않으면 문자가 되고, 문자로 읽힌 성서는 우리를 종교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되고, 거짓 권위가 만들어지고, 종교가 되고, 허구적인 신화가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우리는 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안다는 말이 바로 사도 요한의 말로 해석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의 삶이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활이고, 사랑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가엾게 여기며, 울지말라 하시며,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고, 일어나라 하시니, 일어나 말을 하였고, 사람들이 두려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랑입니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세월호의 시간은 멈추어서 죽음의 냄새를 피워네고 있습니다. 6.25전쟁 이후 우리민족의 역사를 멈추어 놓았습니다. 역사를 다시 움직이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나의 아픔, 고통, 억울함, 회한의 주변에서 서성이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가엾게 여기시며, 나아가 관에 손을 대는 것을 보며, ! 그렇다. 죽음의 행렬이 거만하게, 꺼떡거리며, 때로는 유혹하며, 때로는 위협하며, 때로는 갖은 교활함으로 속이며 나아갈 때, 이 죽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관에 손을대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일까요? 저는 머뭇거릴 일 없이 공감하라’(에이레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고 할 것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죽음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는 세상 속에서, 그 죽음에 용기있게 성도들과이웃과 공감하며 사랑으로 손을 대어 멈추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지 않나 십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죽음을 향해 일어나라!” 하실 것입니다.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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