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강림후스무번째주일, 2020년10월18일)
성령 충만함으로 사도행전 8장 4-17절
사도행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문서입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오순절 성령강림 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성령의 행전’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같은 저자인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 대한 기록이 누가복음이라면 사도행전은 예수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이라는 관점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천상사역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되십니다.
저는 여러분께 먼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령 충만’ 이란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긍정적이신가요? 부정적이신가요?
부정이든 긍정이든 그것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보고 느끼셨던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령 충만’ 그러면 내세적이거나 개인적, 이기적인 이미지를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말씀은 멀리하고 은사주의나 극도의 신비주의로 치우쳤던 몇몇 이단들로 인해서 '성령'이란 말 만들어도 꺼리시는 분도 계십니다.
혹시 ‘성령 충만’에 대해 꺼림칙함이 있으셨던 분이 계신다면, 오늘 이 시간에 다시 새롭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충만’은 선교로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선교란 무엇인가요? “종교를 전달하여 널리 알리다”가 사전적 의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처한 곳 어디서든 선교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복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힘이고, 우리가 성령 충만함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에게 어떤 성령의 열매가 보이는지... 우리의 모습을 성령님께서 비춰주시길 소망합니다.
사도행전을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후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지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내부적인 갈등과 교회 밖의 외부적인 핍박의 반복을 통해서 성령께서 복음을 유대와 이방으로 확산시키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8장은, 바로 전 7장에서 스테반의 설교로 인해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받고 뿔뿔이 흩어진 이후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5절에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거기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고 무리들은 빌립이 행하는 표징을 듣고 보면서 그가 하는 말에 한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빌립은 헬라파유대인입니다.
헬라파유대인이란 포로나 박해등의 이유로 흩어졌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입니다. 즉, 본토에 처음부터 계속 살았던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헬라파유대인과 본토에 살던 히브리파유대인 사이에 과부들의 구제문제를 놓고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곱 일꾼을 세웁니다. 그들 모두 헬라파유대인이었고, 빌립은 그 일곱 일꾼 중 한 사람입니다.
다시 본문 7절을 보시면, 빌립이 행한 표징에 관한 것입니다.
귀신들린 많은 사람에게서 악한 귀신들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나갔고, 많은 중풍병 환자와 지체장애인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니, 남자나 여자나 다 그의 말을 믿고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마술을 행하던 주술사 시몬이라는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거침없는 성령의 일하심이 느껴지십니까?
말씀을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뛰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14절 이후부터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합니다.
두 사람은 사마리아로 와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례만 받았을 뿐 그때까지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13절까지 거침없으셨던 성령님께서 사마리아인들에게 바로 성령을 내려주시지 않습니다. 그전까지 급하게 몰아가셨다면 뭔가 신중에 신중을 더하시는 듯해 보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집중해 보려 합니다. 어째서 빌립이 세례를 주었을 때 바로 성령을 내려주시지 않은 걸까요?
그것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있었던 깊은 역사적 반목이 지금 막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 안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왜 그렇게 골 깊은 갈등이 생기게 되었는가 하면,
원래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했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자 일부 주민들이 추방당하고 이방인들이 사마리아에 들어와 살게 됐는데 사마리아인은 그때 생겨난 혼혈족이라는 것이 표면적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구실일 뿐이었고 사실 갈등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 통일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불행의 역사가 바로 세겜(사마리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건립해서 거기서 예배를 드렸고 그들만의 오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그것이 성경 전부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인이자 이교도이며 분파주의자라고 멸시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밖에서 있었던 역사적 갈등이 교회에서 재현되는 것을 성령께서는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만약에 헬라파유대인었던 빌립이 복음을 전하고 바로 성령이 내리셨다면, 사마리아교회는 여전히 전통 유대인과의 깊은 갈등 속에서 예루살렘교회와 하나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만의 독립된 교회가 형성되고 그들만의 문화를 주장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전통 유대인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신 것입니다.
14절부터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4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로 보냈다.
15 두 사람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16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17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라는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고 승천하신 뒤 이 땅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초대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남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치 기준과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혼돈하게 되면 교회는 힘들어집니다. 본질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사마리아 교회가 시작될 때 성령의 일하심 속에서 어떤 것을 중시하고 계시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세워진 벽을 허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만,
허물면서 내다 버린 돌들로 다른 벽을 세울 수도 있다는 것을 꼭 같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온전하게 벽을 허무신 분은 예수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혹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허무는 벽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성령 충만함보다 나의 의로움이 앞선 것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 층만함을 입지 않으면 바로 즉시 나의 의로움에 맞닥뜨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고 있는가, 의지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문다고 허문 벽이 나의 의로움에서 출발한 내 편 만들기가 돼버릴 수도 있습니다.
나의 의로움은 하나 됨을 방해합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목사였던 헤르만 바빙크는 캄펌 신학교 교장으로 이임된 후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의 무리만을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간주하며, 홀로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교파는, 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처럼 시들어 죽고 말 것입니다.”
“분열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일치를 위해서 모든 것을 견디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회의 분열에 맞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복음은 모든 갈등을 초월합니다. 이데올로기 안에 복음을 가두려 해서도 안 되고 가둘 수도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힘입지 않으면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지, 성령의 감동이 있는지, 멈추고 들여다보는 자세와 습관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표현되는 자신의 의로움에 부딪히면서 그 부딪힘이 괴로워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다시 부딪히면 또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면서 그렇게 가야 합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면 어느 정도 부딪힘의 강도와 빈도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솔직하고 겸손한 눈을 받은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됨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성령님을 매 순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