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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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으로의 열정 (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 2020년 10월 4일)

만지다 | 2020.10.06 08:52 | 조회 787


불가능으로의 열정

마태복음 1422-33


저는 언제부턴가 매년 9월을 보내고 나면,

교회와 신앙에 대한 큰 회의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 회의감의 원인은, 아무래도, 교단 총회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교단 총회가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모습은

저로 하여금 깊은 회의감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9월이 지난 요 며칠 간,

교회와 신앙에 대한 큰 회의감을 겪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단의 총회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총회는 매년, 교계가 중요하게 다뤄야 할 사안들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총회를 통해서, 교회의 법이 만들어지고, 교회의 문화가 형성되며, 교회의 교육이 결정됩니다.

, 그곳에서의 논의와 결정을 통해, 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동안의 총회를 보고있노라면,

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꾸만 물음표가 따라붙습니다.

 

올해 총회만 보더라도,

총회를 구성하는 인원 1500명 중 여성과 청년의 수가 30명 내외에 불과한 가운데,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세습의 움직임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고,

교회를 코로나 재확산의 주범으로 만든 불한당들과 결별하지 못했고,

소수자들을 향한 차별에는 무지막지했던, 혐오가 난무하는 총회였습니다.

또한 우리 코앞 있는 기후위기 속에서 창조질서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습니다....

분명 뭔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저는, ‘과연 교회는 무엇인가’, ‘신앙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지금의 총회로 대표되는 교회의 모습은,

결코 교회가 아니며, 신앙이 아니다 라는 것의 확신이었습니다.

사실, 앞으로도 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계속해서 나타낸다면,

정말로 이제는, 교회와 신앙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하다간 우리의 교회와 신앙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번 설교를 준비하고 여러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정말로 뜻밖의 말씀이,

교회와 신앙에 대한 회의감으로 휩싸여 있던 저에게,

한 줄기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생각으로 상상하시면서,

한번 저의 이야기를 따라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배고픈 무리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하신 예수님은,

곧장 그 무리들을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만을 배에 태워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날이 저물고, 배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을 쯤에,

제자들만이 탄 배는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배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거센 풍랑이었습니다.

그렇게 배는 이른 새벽이 되도록, 바람과 파도에 흔들렸고,

배에 탄 제자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저 멀리서 예수님이, 풍랑에 흔들리는 배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 두려움에 떨며,

혹시라도 흔들리는 배에서 떨어지지 않게, 각자 무엇인가를 꽉 붙잡고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의 근처까지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도무지 거센 풍랑 때문에, 제자들은 덮쳐오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제자들 중,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어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곧바로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과 파도가 불어오는 것을 본 베드로는, 이내 몇 발자국 떼지 못하고 금새 바다에 빠져버립니다.

그렇게 물에 빠진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구해주시고,

당신은 믿음이 적군요. 왜 의심하였나요?”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릅니다.

 

그때에 풍랑은 그칩니다.

그리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으로,

본문의 말씀은 끝을 맺습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로 믿음과 신앙에 대한 주제를 다룰 때 많이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러한 주제 안에서 보통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 위를 걷지 못한 베드로의 의심에 초점이 맞춰지며,

의심하며 바다에 빠진 베드로는 곧장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의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이 옳은 신앙이다

의심하지 말아라라고 하는 주제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한 주제는 때때로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기적을 믿으면 기적을 경험한다.’로까지 변질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이 말씀의 주제로 둔갑하여,

그것이 마치, 믿음과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생각하게끔 합니다...

 

의심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

분명 그러한 주제와 내용은,

회의감에 휩싸인 저에게 한 줄기 희망을 제공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앞선 그것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정말로 의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주제일까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가 꼭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이어야 할까요?

도대체 베드로를 향한 비판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기적의 이야기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상징과 이미지를 찾아내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본문 속 바다, , 그리고 바람은,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둡고, 차갑고, 아주 세차게 혼란스러운 그런, 위기의 모습입니다.

한편, 제자들만이 타고 있는 배는 우리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 우리의 교회는 어두운 밤 거센 풍랑이 몰아치는 위기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배 안에 제자들은,

마치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그 어떤 것들을 꼭 붙잡고서 놓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위기를 마주한 우리네 교회들이,

헛된 부와 권력과 명예 따위의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모습처럼 말입니다.

 

아침이 다가오는 이른 새벽이 되서, 풍랑에 휩쓸려 흔들리는 배를 향해 예수님이 걸어오십니다.

그것은 분명, 풍랑을 멈추시고, 배 안의 제자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여명의 때의 구원 이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배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도,

거센 풍랑에 잔뜩 겁을 먹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귀신이나 유령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더욱 더 배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함께 휩쓸려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붙잡고 도저히 놓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찾을 수 없게 된 오늘날 우리네 교회의 모습이 딱 이런 것 아닐까요?

 

그때에 예수님이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겁니다.

안심하세요. 나 예수가 여기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 말씀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귀에는 도무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 용기가 있었던,

이후에 반석 위에서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을 합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이것은 결코 베드로의 어떠한 객기나 도발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님이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던 일을 기억해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는 배 안에서, 함께 휩쓸려 버릴지도 모르는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보다,

진정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한 정답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물 위로 발을 내딛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도저히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발을 내딛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렇게 불가능을 향해서 자신을 기꺼이 내던졌습니다.

분명, 배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헛된 것만을 붙잡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야말로 진정 훨씬 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떤 누구보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만을 쫓아갔던 사람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몇 발자국 떼지 못하고서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적용받는 물리법칙이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다는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는 자리였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유한하고 현실은 한계와 불가능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드로가 내딛은 그 발걸음, 그 몇 발자국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몇 발자국은 인간의 유한함, 한계, 불가능을 이겨낸 위대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결코, 베드로의 의심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에겐 의심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 믿음이 존재했고,

그것으로 물 위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발걸음조차 내딛지 못하고, 의심조차 못해 본,

헛된 것을 붙잡고 있는 배 안에 제자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의심하며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의 거리를 생각해보더라도,

배 안에 있던 제자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분명 베드로가 예수님과 더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하는 베드로의 외침에

손을 내밀고, 그를 붙잡아 건져내 주셨습니다.

비록 베드로에게는 믿음이 적다고 왜 의심했느냐는 식의 꾸짖음의 투로 말씀을 하셨지만,

그것은 어쩌면, 아끼는 제자를 향한,

불가능을 알면서도 몸을 내던진 기특한 제자의 더 큰 성장을 바라는,

어떠한 아쉬움과 칭찬과 가르침과 애정이 가득 담긴 반어법의 말은 아니었을까요?

확실히, 배 안에 있었던 제자들은 결코 들을 수가 없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의심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끝으로,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배에 올랐을 때,

거센 풍랑이 그쳤습니다.

이것은 이전처럼의, 예수님이 풍랑을 향해 잠잠하라 말씀하신 능력으로가 아닌,

그것은 불가능으로 몸을 내던진 경험을 통해 예수를 만난 베드로가 배에 함께 오르면서 그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혼자서도 충분히 그칠 수 있으신 풍랑을, 불가능으로 몸을 내던진 베드로와 함께 풍랑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함께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 말씀 속 상징들을 찾아내고, 결론 지으면서,

어떠한 한 가지 희망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불가능으로의 열정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신학자인 강남순 교수의, 어떤 한 책에 쓰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강남순 교수는 같은 책에서,

오늘날의 종교가, 풍랑이 몰아치는 것같은 위기의 시대 가운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신앙의 가치를 왜곡하고 있고,

부와 권력과 명예만을 쫓고,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불균형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일에 일조하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저도, 오늘날 우리네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러한 강남순 교수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배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바다에 같이 휩쓸려 버릴지도 모르는 것들을 꽉 붙잡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교회도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이어서 강남순 교수는 이러한 비판에서 멈추지 않고,

이러한 왜곡된 종교의 모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함께 살아감입니다.

 

함께 살아감’....

여기서의 함께는, ‘우리를 넘어선 모든 이웃과 모든 생명, 심지어 원수에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살아감의 의미 역시, 단순히 기계적으로 함께 거주하거나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민족, 국가, 종교, 성별, 계층 등에 근거하여 구분짓지 않고,

함께에 포함되는 생명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고,

권리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우리 개신교의 언어로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모든 자녀와 생명들이 서로 사랑하며,

모두에게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함께 살아감을 지향하는 것이,

분명 우리네 교회가 가진 왜곡된 모습을 벗어던질 수 있는 길이라고,

저 역시 확신합니다.

함께 살아감’, 그 자체가 교회이고 신앙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편으로, 그러한 함께 살아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때,

과연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는 것일까?” 하는, 우리 안의 의구심과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개인의 이득기업의 이윤을 가장 큰 덕목과 목표인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함께 살아감의 의미를 생각하고 실천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함께 살아감이 절대로 불가능한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이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앞서 말씀드린 불가능으로의 열정입니다.

베드로가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물 위로 발을 내딛었던 것과 같은, ‘열정,

지금 우리들에게 함께 살아감을 꿈꿀 수 있게 하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베드로처럼,

함께 살아감의 바다를 향해 발을 내딛어야 합니다.

몇 발자국이라도, 단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소망하고 희망을 품는 것이 참 교회이며, 참 신앙입니다.

 

함께 살아감의 방향 앞에는 분명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곧장 물에 빠져 허우적대더라도,

언제든 예수님이 우리에게 손 내밀어 주시고, 건져내 주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당신을 더 믿어보라고 꾸짖는 말로 격려해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으로 발을 내딛어도 괜찮습니다.

 

무엇보다도,

결국에 그 거센 풍랑을 멈추시게 할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말씀만으로도 풍랑을 멈추실 수 있는 예수님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함께 풍랑을 멈추게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발을 내딛어서 자신의 가까이로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열정을 믿고서, 우리들만을 배에 태워 바다를 건너게 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사랑하는 고기교회 교우님들께서,

풍랑의 시절 가운데서, 더 이상 배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감의 바다로 발을 내딛으시는,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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