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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통치 (성령강림 후 열다섯번째 주일. 2020년 9월 13일)

마중물 | 2020.09.13 23:49 | 조회 968



제목 :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통치

본문 : 창 1:26-28 / 엡 4:21-24


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오늘 두 번째로 고기교회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씀을 나눌까 고민하다가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과 가장 많이 나누는 기독교세계관을 성도님들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세계관은 칼빈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개혁주의자들이 이 세상을 설명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침을 설명한 것입니다. 기독교세계관을 설명하는 방식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성경의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인 창조-타락-구속-완성의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독교세계관의 네 가지 프레임 중 창조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록한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창조에 대한 많은 사건들과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창조된 여러 피조물들 중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 중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야기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늘 짧은 설교시간을 통해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저 또한 아직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창세기 1장 26-28절과 에베소서 4장 21-24절, 그리고 추가적으로 관련된 성경말씀들을 중심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이 본문과 주제를 정하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20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 있습니다. 과거 중앙일보 사진기자셨는데 제가 이 분에게 사진을 배웠습니다. 서울에 사시다가 제주도로 내려가시고, 다시 남원에 정착을 하셨는데, 지난 달 이 분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전라남도 남원의 외지 산기슭의 자택에서 모처럼 밤을 새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분은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가장 공들여 만든 피조물은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라고 했습니다. 현재의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 인간은 결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은 자신의 말이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보다 고양이가 더 낫다고 여러 차례 저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손가락질 당해 왔습니다. 교회의 구조적 문제들, 성도들의 이중적인 삶의 태도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많이 들어봤는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이야기를 듣고나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원래의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을 다시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지으셨는지, 인간은 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고 있지 못한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오늘 본문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신은 외형으로나 내면으로나 인간과 동일한 모습을 가졌다는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동성설’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신인동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특정한 형상을 지녔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앙에서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시기에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신인동형’의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속성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성경구절 중 에베소서 4장 2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보았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정확히 재현해 내시는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내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창세기 1장에 나온 ‘하나님의 형상’을 외면적인 모습도 내면적인 성품도 아닌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했을 당시의 문화는 이집트라는 제국의 문화가 넓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모세는 신학자가 아니었고, 윤리학자나 심리학자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들의 조상들로부터 구전되어 온 창조의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창세기를 읽었던 출애굽공동체는 ‘형상’이라는 단어가 어려운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철학과 신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오히려 형상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고 더 복잡해졌습니다.


당시 출애굽공동체가 읽었던 ‘형상’이라는 단어는 절대왕권 아래의 문화에서 ‘세워 놓은 상’, ‘신상’을 가리켰습니다. 어떤 신상이나 통치자의 동상은 그 신 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모세시대에서는 곧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혀졌습니다.


당시 이집트 왕권 문화 속에서 파라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땅에 서 있다면 그 땅은 파라오가 통치하는 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1절에 의하면 노예로 살았던 히브리 민족들이 파라오의 국고성 비돔과 성인 라암셋을 건설하는데 노동력 착취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온갖 고초를 당하며 땅을 파고, 무거운 돌을 나르고 건물을 세우고, 각종 이집트 우상신들의 신상들과 파라오들의 신상들을 건축하면서 히브리 민족들은 자신들이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이집트 왕권의 권위 아래에 매여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인이 아닌 히브리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노예가 되었고, 히브리인의 부모를 두었기 때문에 자녀들은 노예신분으로 이방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출애굽 사건을 거치면서 비로소 자신들이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며, 자유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창세기 1장 28절을 읽었을 때 창세기 독자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였습니다. 파라오의 동상이 세워진 곳은 파라오가 통치하는 땅인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서 있는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 즉 하나님의 땅인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세계관의 관점에서 중요한 점은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상징물, 즉 인간 자체가 하나님을 전달하는 매체 곧 미디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자유민이 된 히브리 민족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뤄지지 않을 때 즉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하나님처럼 이 세상을 군림할 때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권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절대권력이며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할 때 그 통치권의 영향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 1장 28절은 기독교세계관에서 매우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문화명령 또는 문화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제대로 읽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만약 창 1장 28절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해석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했던 파라오가 만약 창 1장 28절을 읽었다면 그는 타민족을 노예로 만들고 폭압과 노동력 착취를 행사한 것이 정당한 ‘정복’과 ‘다스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더 위에서 군림하였던 중세교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눠 계급통치를 정당화시켰고, 타종교를 악마로 규정하여 대대적인 피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서구의 기득권이 되었던 기독교 문화는 창 1장 28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무분별한 개발을 일으켜 자연환경을 파괴하였고, 자본이 문화명령의 도구인 양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권력자들은 중동을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세계관에 대해 무지했던 복음주의 선교운동은 공격적인 선교로 타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보수 기독교교회는 반이슬람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습니다.


창 1장 28절에 나오는 ‘정복하라’, ‘다스려라’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적용이 기독교를 제국주의 권력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에 대한 신학적인 논문은 한신대학교 강원돈 교수의 논문에 자세히 나옵니다.


강원돈 교수는 [생태학적 노동 개념의 성서적 근거 I - 생물들의 지배와 땅의 정복]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창세기 본문에서 모든 동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들의 생명을 자의적으로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 1장 28절의 말씀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함부로 개발하고 훼손해도 된다는 근거로 사용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창조주의 권한을 위임 받아 이 땅을 잘 통치하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이 세워주신 올바른 권위, 하나님이 허락하신 올바른 통치의 개념으로 ‘정복’과 ‘다스림’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마음 먹은 한 통치자의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72편 1-4절입니다.


1 하나님, 왕에게 주님의 판단력을 주시고 왕의 아들에게 주님의 의를 내려 주셔서,

2 왕이 주님의 백성을 정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불쌍한 백성을 공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3 왕이 의를 이루면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안겨 주며, 언덕들이 백성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4 왕이 불쌍한 백성을 공정하게 판결하도록 해주시며, 가난한 백성을 구하게 해주시며 억압하는 자들을 꺾게 해주십시오.


3절의 ‘산들’ 그리고 ‘언덕들’이 정확히 자연세계를 뚯하는 것인지 아니면 온 세상을 뜻하는 것인지 정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인간이 자연세계에 대한 착취와 파괴가 당연시 되었다면, 3절의 “왕이 의를 이루면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안겨 주며, 언덕들이 백성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라는 시는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시편 72편의 솔로몬왕의 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권위자가 어떠한 삶으 살아야 하는지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질적으로 생태지향적입니다. 그리고 배타적인 권력보다는 포용력 있는 올바른 권위의 질서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통치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이 소중한 세상을 잘 돌보고 지키라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현재 우리는 코로나19 뿐 아니라 산불, 노동력 착취, 인권말살, 명분 없는 전쟁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자연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난 주 저는 머내마을영화제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둘 모두 시리아 내전을 소재로 한 영화였는데, [사마에게]와 [가버나움]이라는 영화입니다. 과학은 발전하고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고 하는데 지구 한쪽에서는 인간들의 욕심과 국가이기주의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음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두 영화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올 때마다 많이 울었습니다. 

[사마에게]라는 영화는 연출된 극영화가 아니라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알레포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은 다큐영화였습니다. 시리아 정부가 전쟁 비즈니스로 러시아 폭격기를 동원하여 알레포 도시를 공습할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가 병원으로 실려왔고, 그 모습이 그대로 영화 [사마에게]에 담겨졌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해야 할 인간들은 왜 하나님이 소중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을 파괴하고 있을까요?


프랑스 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은 자신의 명상록 ‘팡세’에서 오직 기독교만이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얼마 괴수인가, 얼마나 신기한 것인가, 얼마나 혼돈한 것인가,

얼마나 모순의 주체인가, 얼마나 경탄할 만한 것인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어리석은 지렁이, 진리의 보관자이자 불확실한 오류의 시궁창. 

우주의 영광이자 쓰레기.”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와 자기 책임성을 갖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더불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만든 이 소중한 세상이 지금 왜 이렇게 되었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권면으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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