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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는 어떻게 걸어오는가 (창조절 열한째주일, 2016.11.13)

mungge | 2016.11.17 15:35 | 조회 2154


(2016.11.13. 예배후 노지영 설교자, 들꽃향린교우 방문자들과 함께)

평신도 강단교류 : 고기교회 하늘 말씀 펴기

 

나사로는 어떻게 걸어오는가

본문 : 에베소서 610~20, 요한복음 1143~44

설교 : 들꽃향린교회 노지영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들꽃향린교회 교우인 노지영이라고 합니다. 1030일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독인 연대에서 주관하는 평신도 강단교류 설교를 담당하게 되어 이 고기교회까지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각 교회들의 사정상 계획된 30일 종교개혁주일에 설교를 진행하지 못하고 지난주에는 교기교회의 윤정근 님께서 저희 들꽃향린교회를 방문하여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그 횡격막이 진동하는 말씀을 잘 듣고, 그 기운을 이어 받아 저도 오늘 1113일에서야 고기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횡격막까지는 아니어도 장기나 어디 세포 하나쯤은 자극하는 말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문학을 전공으로 공부해왔고, 현재 학교에서 비정규 노동자로 전공과 교양 강의를 하며 학생들과 문학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면에 문학평론을 쓰기도 하고, 때때로 현장에서 다양한 문학행사에 참여하며 시와 시적인 것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살고 있는 평신도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저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통시적인 삶을 해설하고 그들 문학에 의미를 덧붙이기도 하고, 그들 문학의 위상을 기념하기도 하는데요. 오늘은 그러한 기념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면서 평신도 설교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혹시 올해가 몇 번째 종교개혁주일인지 아시는지요? . 올해는 2016년이고요.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교회의 갱신을 기도하며 499번째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499번째라고 하니, 뭔가 종교개혁주일이 탄생한지 500살이 되면, 내년엔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기념이라는 것은 그런 기대감과 무게감 속에서 존립하며, 미래의 역사를 향해 나아가게 하고, 또 과거의 과오들을 성찰함으로써 미래의 가능성들을 선취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순환되면서도 나아가는 역사를 자각하게 하기에 꼭 필요한 제의이기도 하지요.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우리는 기념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장 소중한 어떤 기념일이 있을까요? 자신의 생일, 그리고 남친 여친 같은 특수한 관계를 가진 이성과의 백일, 재주 좋은 사람은 그런 이성과의 천일, 그리고 만일, 재주 좋은 사람은 결혼기념일, 더 재주 좋은 사람은 아이의 백일, 아이의 돌, 재주가 별로 안 좋은 분(?)은 주구장창 한 이성과의 금혼식을 맞겠지요. 그리고 삶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사람들과 가족들의 생일, 사랑하는 조직이나 공동체의 생일도 맞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던 이들이 떠난 날까지... 우리는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마저도 누군가를 추모하며,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사는 기념의 인간, ‘호모 메모리스(Homo Memoris)’로 살게 됩니다.

살면서 우리는 일상보다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억하고, 특별한 것 중에 더 특별한 날을 특히 기념합니다. 그리고 100, 500살 같은 숫자를 통과하면 유난히 정신적인 차원을 강조하며 기념하지요. 역사와 사회문화, 그리고 종교가 그리하듯이 제가 관련되어 있는 문학계도 이러한 기념의식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참 통찰력도 부족하고 별것 아닌 사람이지만 어쩌다보니 저 같은 사람도 모 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주관하는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문학제 행사 같은 것을 몇 년째 관여하며 사회를 보기도 했었고, 문화예술위에서 작고한 문인들을 기념하며 전집 출간을 하는 사업을 평가하는 작업에 관련된 일도 했었고, 한 해 동안 출간된 도서와 문학관련 기념행사를 정리하는 예술위의 문예연감 출간 사업을 몇 년째 돕기도 했었습니다. 그 외에도 각종 문인들의 이름을 건 문학행사에서 작가와의 대화 등을 하며 어떤 걸 기념해야 할지 생각할 기회가 다른 사람보다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태어난 지 백 살이 되는 문인들을 유난히 기념해야 하는 문학의 밤 같은 대중 행사를 할 때면, 이 사람을 어떻게 기념하면 좋을지, 이 사람의 문학을 제가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고 해당 문인을 잘 모르는 시민 대중에게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이 많이 됩니다. 예를 들어 탄생 100주년 된 문인들을 기념하는 행사에 대해 말해볼게요. 모 문화재단에서 탄생 백주년이 되는 사람들 명단을 제시하면 행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대상을 선별하면서 저는 약간의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기획회의 시에 먼저 대상 작가 중에 대중적인 인지도가 떨어지는 작가들을 거르게 되지요. 인지도는 없지만 앞으로 조명이 필요한 사람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친일한 사람들을 거르기도 하지만,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소극적으로 부일하며 괴로워했던 사람들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친일했지만 문학적 공과가 분명한 인물들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때로 조직적으로까지 친일했지만 문학적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문인의 문학 작품을 당시 문학행사 타이틀로 내걸기도 하지요.

특히 2015년인 작년에 어릴 때부터 시성이라 배웠던 서정주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의 밤 행사를 진행해야 할 때 저는 어떤 면을 중심으로 해당 시인을 설명해야 할 지 고민이 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가령 서정주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찬양한 친일시나 전두환 5공 정권을 찬양한 이력을 보면 한심하지요. 그를 기념하며 계승한다는 현 미당문학상과 그 운영 체계에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미당을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처럼 추켜세우고 중앙일보 같은 거대권력에서 그 해당 후보들을 장기간 지상중계하면서 최고액의 상금을 건 채 가난한 문인들에게 미끼를 던지는 방식이 너무나 불편하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알기 이전에 만났던 서정주의 시는 문청 시절 저에게는 잊지 못할 흔적이고, 그런 과거의 있었던 사실로서의 경험은 이미 저의 일부이자 내부를 형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관념 안에서 그의 과오를 비판적으로 바라볼지라도, 그 시인에게 감정적으로 영향 받았던 경험적 사실은 현재도 완벽하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미당의 시가 가지고 있는 삶과 언어의 내부들이 저는 좋았던 적도 있었고, 참 싫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양가적 감정 속에서 여론 재판에 떠밀려 제 내부의 존재했던 느낌들을 함부로 없었던 것으로 부인하게 될까봐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한국 근대시사에서 대부분의 문인들은 독자들에게 그런 애증의 양가적 감정과 딜레마의 질문들을 던져줍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소위 암흑기라 부르는 일제 말에 이르면 대부분의 문인들은 친일을 하고, 부일을 하고, 절필을 하고, 간도 땅 같은 곳으로 떠돌기도 합니다. 조국에 장소애를 가질 수가 없으니, 대동아공영권으로서의 새로운 이상적 장소애가 출현하고 모국어로 쓴 작품들은 지면에서 깨끗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제 말 암흑기에 모국어로 쓰여져, 해방 후에나 빛을 보게 된 희귀한 시집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열광합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학제 안에서 그토록 조명 받을 수 있었는가 비판하는 시선도 있고, 민족주의 담론과 한국문학의 정전화 과정 속에서 윤동주는 과대평가되며 후대에 만들어진 시인이다, 라는 평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올해 문인협회에서 올해 근대문학의 효시이자 2인문단체제의 상징인 춘원과 육당의 문학상을 어떻게든 만들어보려고 하다가 여론 악화에 의해 욕만 먹고 실패한 것을 보면, 누군가를 환대하며 기념한다는 것은 문학성이나 후대의 영향력보다는 분명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올해는 2016, 시인 윤동주가 탄생한지 99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내년은 2017,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지요. 그 해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해서 윤동주와 관련된 각지와 모처에서 오래 전부터 분발하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윤동주가 자라고 묻힌 용정에서, 그가 다닌 연세대에서, 일본의 동지사대나 릿쿄대에서, 윤동주 문학관과 각 문학 관련 단체에서, 그리고 그의 유고시집이 발견된 광양 등 장소애를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곳에서 윤동주 기념사업에 주도권을 갖고, 기념행사를 주도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오래 전부터 진행하고 있었지요.

특히 전남 광양이란 장소는 윤동주가 생전에 가보지 않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윤동주를 불러내는 것에 무엇보다 적극적인 장소입니다. 그 광양은 윤동주의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견된 곳으로, 시집의 고향이 된 곳이지요. 잘 알려졌다시피 윤동주는 일제치하에서 모국어로 된 시집의 출간이 어려워지자 육필 원고 묶음을 세 부 만듭니다. 한 부는 지도교수인 이양하 선생에게 드리고, 한 부는 신뢰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그리고 남은 한 부를 자신이 가진 채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데요. 자선 시집을 만드려고 하였으나 시고를 받아본 이양하 선생은 그의 시인 십자가’, ‘슬픈 족속’, ‘또다른 고향등이 일본 관헌의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변에 위험이 따를 것이니 때를 기다리라고 출판을 만류합니다. 1938년 조선어 교육이 실제로 금지된 이후 40년대의 윤동주의 한글 육필 시집은 일제시대 모국어로 조선인의 감성구조를 건드릴 수 있는 하나의 불온문서이기도 했는데요. 후에 저명한 국문학자가 되는 후배 정병욱은 시고를 소중히 보관하다 43년에 학병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원고를 넘기며 보관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게 됩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원고를 항아리에 담아 광양 망덕포구 양조장의 마룻바닥 아래에 꽁꽁 숨겨두고 보관하게 되는데요. 해방이 되고 나서 정병욱이 보관한 자선시집 육필 원고는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윤동주의 문우 강처중이 가진 원고와 더해져 단 31편의 뼈대로 윤동주의 옥사 3주기인 19481월에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됩니다.

제가 아는 역사전기비평의 권위자인 어떤 교수님은 윤동주의 시가 살아남은 이유가 윤동주가 춘원이나 육당 같은 작가들만큼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도 아니고, 유명한 문인이나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제의 관심밖에 있어서 가능했다고 하신 바 있습니다. 일견 맞는 말입니다. 윤동주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으나 제도 안의 시인은 아니었어요. 당대의 위상으로 봤을 때 윤동주는 소위 듣보잡문청일 뿐이고, 당시 일제의 엄혹한 간섭을 받으며 극도의 꼼꼼한 괴롭힘을 당한 문인들과는 동일선상에서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요. 그러나 그런 문학 제도적 한계 안에서 윤동주가 아무것도 아닌 위치의 비루한 청년이었기에 그의 시가 살아남은 역사는 더욱 신비합니다. 아무 연고 없이 그의 시만 보고도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정지용은 그의 시와 삶에 대한 동생 윤일주의 증언을 듣고 시집의 서문을 썼지요. 그전에는 시인이 아니었던 윤동주를 두고 정지용은 시와 시인의 삶은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시인으로 산다는 것의 보편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줍니다. 그런 과정에서 윤동주가 문제적 인간이자 진정한 시인으로서 문학적 보편성을 갖게 되는 여정은 그 어떤 시인보다 우리에게 더 고귀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평범한 식민지 조선 청년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깨끗이 사라질 수 있었던 시는 과연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미처 해방을 못 보고 19452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며 시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될 뻔했던 시는 죽음을 어떻게 이기고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이는 바로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그의 아름다운 성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의 시의 숭고한 내면을 알아봤던 그의 내부자들 때문이지요.

포스트 구조주의적 사유를 바탕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문학에서 새로운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 모리스 블랑쇼라는 문학이론가가 있습니다. 그는 문학을 나사로의 죽음과 무덤의 비유로 설명한 바 있는데요. 우리들은 무덤 같은 문학에서 독서 행위를 통해 의미를 불러내지요. 마치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외치듯이 우리는 침묵한 채 죽어있는 존재들을 호명하면서 불러서 깨워냅니다. 부르기 전에는 무덤처럼 죽어있다고 생각하거나 사회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없는 것들이었지요. 그런 사라지고 죽어 있는 존재를 우리는 살았을 적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살려냅니다. 부르는 순간,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아나지요.

죽음으로 사라진 후 잊혀질 수 있는 윤동주를 살려내던 많은 사람들과 장소들이 있습니다. 시집을 만들어낼 때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들은 간도에서, 그가 다니던 대학에서, 그의 유고가 발견된 장소에서 그 많은 곳에서 있어야 할 그를 부르며 죽어있는 윤동주를 꺼내어 부활시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윤동주는 살아나고 있나요? 그의 시는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걸어나오고 있을까요?

오늘의 요한복음 본문을 봅시다. 나사로의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습니다. 그는 살아서 부활하였지만, 사람들에게 완전히 드러난 게 아닙니다. 블랑쇼의 말처럼 그는 두 가지 모습으로 무덤 앞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하얀 천, 수의로 몸을 감싼 채 서있는 부활한 신체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수의 안의 몸은 가려져 있습니다. 그는 무덤 속에서 여전히 썩어나는 시신의 냄새를 풍기는 나사로이기도 합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시에 또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블랑쇼는 문학적 의미로 비유하지요. 부활한 몸의 나사로가 사회문화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 드러난 문학적 의미와 가치를 뜻한다면, 이미 나흘째 썩어서 시신의 냄새를 풍긴 채 하얀 수의 안에 드러나지 않은 나사로의 몸은 불러내도 이해될 수 없는 영역, 아직 소통되지 않고 접근할 수 없는 잉여의 알 수 없는 영역을 뜻합니다. 불러내도 차마 알 수 없고 개시되지 않는 죽음의 영역, 어떤 해석이 거쳐가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무덤의 은폐된 영역이 그 부활 순간의 그의 몸에 존재합니다.

나사로의 죽음처럼 윤동주의 시는 시인의 사후에 여러 곳에서 호명되고 다양하게 가치 부여되지만, 하얀 수의 뒤에서 그의 시는 어떤 한 장소의 그 무엇의 의미에만 귀착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단일한 가치로 환원되지 않은 채 불순한 잉여의 영역을 계속적으로 개방합니다. 부활한 그 무엇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기대감과 그 무엇을 지향해도 미처 다가갈 수 없는 인간 너머의 죽음의 영역을 동시에 보여주며, 그의 시는 윤동주야, 나오너라외치는 무수한 독자들에 응답합니다. 그러면서 그를 부르는 독자들에 의해 다양한 스토리를 개방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문학이란 삶의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는 소통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세계와 그 너머의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잉여의 영역, 끊임없이 재의미화되어도 이해 불가능한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시란 죽어있으면서도 삶으로 향하고 있고, 살아있으면서도 또 다시 언젠가 인간의 몸으로 죽어갈 나사로와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그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여라.” 그렇다면 나사로를 풀어주듯이, 시인과 시를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풀어주어 그 시가 가야 할 길을 개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올해 백상예술대상 및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호평을 받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 같은 작품을 통해 그 가능성을 봅니다. 여러분도 많이 보셨지요? <동주>라는 영화는 망국민으로서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용정과 평양, 서울과 일본을 무수히 떠돌아다니며 시의 길에 대해 감각해나가는 한 청년의 로드 무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는 그의 시 구절처럼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이러한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하는 한 시인이 영화의 말미쯤에서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장면도 나오지요.

그 청년이 간 길을 우리는 함께 걸어가고 싶어 끊임없이 의미화하지만, 온전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생존시에는 시집 한 권 못 남기고 활동 한번 제대로 못한 채 이미 죽은 청년의 길을, 그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절대적 타자성을 가진 시인의 내면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나사로처럼 죽어있는 시와 시인을 풀어놓아 걷게 만드는 은 우리에게 피부로 드러난윤동주 시인뿐만 아니라 그를 구성하면서 수의 안에 가려져 있는주변의 다른 인물을 통해 더 새롭게 드러날 수 있지요.

<동주>라는 영화는 동녘 동’, ‘기둥 주의 한자로 구성된 시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지만, 또 그와 동주하는, 즉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의 사촌인 몽규와의 관계는 흥미롭습니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 시인을 말하기 위해 다른 청년인 송몽규의 삶을 짝패처럼 조명하고 있는데요. 영화는 윤동주 시의 침착하고도 고요한 내면이 어떤 열정적인 에너지로 얽혀있는지를 독립운동가이자 문사였던 송몽규란 청년을 통해 드러내면서 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가야할 길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와 송몽규의 총을 대비하고, 그것들의 얽힘을 통해서 민족의 길이 설명되지요.

얼마 전 어떤 행사에서 이준익 감독과 윤동주의 삶과 시에 대해 대화를 한 적 있었는데요. 이준익 감독 왈, 윤동주의 시가 우리에게 알려진 위대한 결과물이라면 그와 같은 해 같은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함께 수학해온 송몽규는 그의 시를 형성시킨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더군요. 우리는 보통 의미 있는 결과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그 결과를 만들어낸 아름다운 과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고요. 그래서 <동주>라는 영화는 <몽규>라는 제목으로 불러도 될 만큼 시인의 내면을 구성해온 송몽규란 존재를 대등한 비중으로 묘사합니다. 엔딩 크레딧에서마저도 윤동주와 송몽규의 약사(略史)’를 동시에 제시하며, 결과와 과정을 동등한 대칭으로 병렬시키지요.

윤동주의 시 텍스트(text)라는 결과물을 조직해낸 무수한 콘텍스트(context)와 그 과정으로서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쩌면 송몽규가 아니라 다른 오래된 동료인 문익환이란 청년을 짝패처럼 조명했어도 또 다른 흥미로운 서사가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찾아보니 동주와 몽규(한범이), 익환이 중에 인물은 문익환이가 제일 훤했다는 증언도 있더라고요. 문익환 목사와 동주를 함께 조명한 시리즈가 나오면 아마 정말 내놓을 만한 기독교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자면 민족교육의 산실이자 기독교 지사들의 마을로 알려진 바로 윤동주가 태어난 곳, 명동촌의 풍경 속에서 규암 김약연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의 서사를 더 연결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아까 부른 피난처 있으니라는 찬송가는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의 교가의 곡조이기도 했습니다. “흰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깃치신 이터에 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같은 가사의 교가처럼 그 북간도의 명동촌은 참 아름다운 장소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송우혜 선생이 쓴 윤동주 평전에 보면 윤동주 이름자의 이라는 한자는 명동의 동에서 왔고, ‘라는 한자는 돌림자라고도 추정하지요.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면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신계와 인간계 사이의 중간계 같은 환상적인 곳이 일제시기 북간도의 피난처 명동촌으로 묘사되어 있는데요. 영화적 판타지와 기독교적 이상향으로서 명동촌의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운 영상으로 재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시에 영향을 끼친 백석이나 정지용과 그를 연결한다면 어떨까요? 그의 시를 끝까지 보관한 정병욱을 포함하여 그와 유학시절을 보내며 그의 시집을 만들어주느라 사력을 다했던 강처중, 윤동주가 히라누마 도주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한 후 자신 같이 시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학생들을 친절하게 돌봐준 릿교대학의 고송효치 교수 등 그의 시에 영향을 끼친 이들이 있습니다. 그의 삶을 구성한 외부의 타자들은 그의 내면과 정체성을 구성한 내부의 수많은 나들이지요. (수많은 나라는 표현은 윤동주의 <흰 그림자>란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연결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일찍 요절하여 실체를 드러낼 겨를 없이 사라진 윤동주라는 시인이 얼마나 많은 선한 내부자들로 이루어져있는 우정의 몸을 가졌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윤동주라는 시인의 몸은 마치 오늘의 본문처럼 식민지 시기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을 상대로 하는 우정의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이 그의 연약해 보이는 시를 구성하는 온 몸을 덮는 갑옷이 됩니다. 그 타자들이 만들어온 갈등과 사건 속에서 윤동주라는 한 시인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되고, 시적인 순간을 직조해내는 연대의 내부구조가 탄탄하게 조성됩니다. 윤동주의 시를 만들어낸 선한 타자들이 해방을 맞지 못하고 죽은 무덤 속의 윤동주를 불러내어, ‘윤동주야, 나오너라외칠 때마다 윤동주에게는 시적인 것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갑옷이 입혀집니다. 그리고 그 갑옷 안의 몸과 내부 장기도 튼튼해지지요. 죽어서 온 몸에 흰 수의를 두른 윤동주는 죽고 나서야 수많은 나’, 선한 내부자들의 부르심 속에서 이처럼 시의 갑옷을 입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달고, 그가 가던 고난의 장소를 새로운 길로 재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내부자들을 가지고 계신가요? 어떤 내부자들을 통해 자기 성찰을 하면서 우애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연대의 내부 구조로서의 몸을 만들고 계신가요. 여기에 계신 선한 교우들은 여러분의 바깥이면서 어떤 내면까지 들어온 내부자인가요. 그들을 내 안의 착한 일을 하신 이라 생각하고 영적 갑옷으로 취해 기꺼이 입고 계신지요.

죽은 윤동주를 그렇게 내부자들이 재탄생시키며 어느덧 2016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윤동주가 태어나서 아홉 번씩 강산이 바뀌고 또 아홉 번의 해가 지난 해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윤동주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내부자들을 가지고, 그들에게 공공연하게 호명되어온 또 다른 인물을 한번 떠올려볼까요? 같은 해인 1917년에 태어난, 윤동주만큼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아니 이 분은 우리 역사 속의 시민대중 사이에서는 윤동주보다 훨씬 더 유명한 이름값을 가지고 있지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오래 전 유신 대통령으로 선망되는 독재 패러다임을 창조해내고 현 대통령의 아버지로 여전히 망각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구미시에서 어마어마한 사업비로 신격화되며 올해 99주년 탄신제(?)로 모셔지고 있는 박정희는 아주 단단한 내부자들의 갑옷을 입은 사람이지요. 그의 탄신제는 북한의 태양절처럼 샤먼적으로 우상화되기도 하는데요. 그런 의식 안에서 죽은 그는 자꾸 재탄생되고, 사람들에게 향수됩니다. 좋은 시를 이렇게 인용하는 것이 불경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박정희는 마치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나온 우물과도 같이 존재합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지고, 또 다시 미워지는데 어쩐지 그리워져서 들여다보면 우리 우물 안에 그 사나이는 추억처럼그대로 있지요. 어떤 세대들의 괴인 우물에는 보고 또 봐도 아름다운, 마치 흑백의 환타지 영화에나 존재하는 추억사나이가 있습니다. 그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부에게 사적인 추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공적인 자리에서 기념되며, 그 고인 우물 속에서 현 대통령으로 자기복제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연민의 우물 안에서 추억되어야 할 것과, 두고두고 돌아보며 망각하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을 미처 구분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기억을 넘어 미래와 역사를 위해 기념해야 할 것들로 우리가 나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요. 어떤 이름을 불러 누구를 살려내야 할지 혼란스러워 잘 모르겠다면, 우리는 그를 구성하고 있는 내부자들을 봐야 합니다. 현 대통령을 구성하는 최순실, 김기춘, 문고리 3인방, 십상시 같은 내부자들을 보십시오. 그런 내부자들이 내면의 성찰을 유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한 개인으로 태어나 자기성찰을 통해 주어진 과제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살다보면 그러한 내부 구조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내부자들로 인해 꼼짝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한 예속상태에 있는 인물들은 매번 외부를 향하여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고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나서 남에게 휘두르던 그 칼로 이제 세계와 타인의 삶을 해침은 물론 이제는 내부 피폭을 해나가며 자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덤에서 불러내야 하는 이름이 선한 내부자들로 이뤄진 갑옷을 입고 있는지, 어둠의 내부자들로 이루어져 세계를 위협하는 칼날이 되고 있는지 우리는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죽어가는 인간을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무덤 앞에서 살려야 할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복음의 사신이기 때문입니다. 사슬에 매어있지만, 오늘의 에베소서 본문에서처럼 악한 영들을 상대하는 이런 형편에서도, 이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내부자들의 목소리로, 그 이름들을 불러냅시다. 그리고 사사로운 추억을 넘어, 죽은 것들에 대한 애도의 기억을 넘어, 주님의 부활의 복음이 되어 죽은 것들을 살려내고 다시 기념합시다.

이것이 마땅히 우리가, 우리 안의 수많은 내부자들인 복수의 나들과 나누어야 할 복음의 말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어떤 이름들을 외치시겠습니까. 어떤 순결한 시인은 이같이 병든 세상에서 시인이 되는 길을 물으며 앓았습니다. 윤동주가 내려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제가 병원이었지요. 그 죽음만이 가득한 병원에서 그는 하늘바람를 불러 일어나라하였습니다. 같은 요한복음의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병으로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 나사로야, 일어나라하십니다.

하늘, 바람, , ,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문제적 인간 나사로... 저도 이런 순정한 것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여러분들과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정의야 일어나라, 공의야 일어나라, 평화야 일어나라. 진실아 일어나라. 그리고 모든 죽어있는 선한 것들아, 깨어나도 다시 죽을 선한 것들아, 실패하면서도 다시 살아날 선한 인간의 것들아, 이 새로운 죽음의 길에서 제발 다시 깨어나라. 그렇게 무덤에서 죽은 것들아, 나사로처럼 걸어 다니며, 복음의 비밀을 한 겹씩 열어가라.

여러분들은 이 죽어가는 삶에서 어떤 이름들을 부르며 그것들을 살리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의 부활의 정신과 함께 기억하고 기념할 것들을 연달아 부르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부디 지상의 인간으로 기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죽은 것들을 무덤 앞에서 불러내십시오.

선한 내부자들과 우정을 쌓아

자신의 온몸을 덮는 정의의 갑옷을 갈아입으십시오.

어떤 무덤 앞에서도 일어나라고 생명을 불러내면서

마땅히 내가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하십시오.

그 말과 기도로 된 평화의 갑옷을 살아있는 동안 기념하십시오.

지금은 우리 주 예수가 주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선한 영의 갑옷을 입고

선한 싸움을 하고 있으니,

진리와 정의의 갑옷을 입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 몸의 내부자가 되어

복음의 비밀을 죽기까지 알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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