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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바알과의 싸움 (창조절 여덟째주일, 2016.10.23)

mungge | 2016.10.29 16:40 | 조회 2216

(2016.10.15. 경기노회 아동부 축구대회)

 

제목: 희년, 바알과의 싸움

본문: 열왕기상 211~4

설교: 김준표 목사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나봇

고대 이스라엘 왕들 중에 아주 찌질한 왕이 한명 있었습니다.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인데도,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조그마한 땅 하나를 차지하지 못해 속상해서 침대에 누워 끙끙 앓다가 아주 사악한 아내의 계략으로 그 땅 주인을 죽이고, 땅을 가로채서는 기뻐서 펄쩍 뛰었던 왕입니다. 그 왕의 이름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에서 등장하는 아합이라는 왕입니다. 아합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크게 존경하며, 이상적인 성군이라 칭했던 다윗과는 아주 반대로 성서에서 가장 사악하고 못된 왕으로 등장합니다. (엘리야 시대)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조금 이해 안 되는 부분, 우리의 역사적 상식과 상충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나라의 모든 땅과 재산, 심지어 백성들도 개인이 소유물로 여겼던 고대 왕정시대에 아합왕은 왜 자신이 원했던 나봇의 땅을 차지하지 못해 끙끙되었을까요? 그것도 왕의 권력으로 그냥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좋은 땅으로 바꿔주거나 돈을 두둑하게 계산해서 주겠다고 했는데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지 못합니다. 왕으로서 완전 체면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바로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사사시대의 토지규례, 토지법을 알아야 합니다.

 

바알신앙과 여호와신앙의 대결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이웃 나라와는 아주 판이한 나라 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주전 1200년에서 1000년 사이, 200년 동안 유지된 사사시대입니다. 왕을 두지 않는 제도입니다. 이스라엘은 왕 없이 12지파가 평등한 관계에서 연합체를 꾸려 강력한 이웃 나라들과 대항해 나갔습니다. 200년 동안의 사사시대를 유지하게 만들었던 사회 기본제도 안에 토지규례, 토지법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지파별로 그 땅을 분배 받습니다. 그리고 그 지파들은 배정 받은 땅을 지파 내의 가족 숫자대로 구분한 후 제비뽑기로 각 가정의 토지를 확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제비뽑기 할 때에 하나님의 영이 간섭하시어 각 가정에 가장 합당한 토지를 배분해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제비뽑기로 자기 가정의 몫으로 배정된 토지를 기업(基業)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기는 터 기()자를 쓰는데 각 기업은 가족 생업의 기초가 되는 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12지파와 그 아래에 속한 가족들이 분배받은 토지에 대해 절대로 사고팔거나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엄격히 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토지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의 경작자로 배정받은 임시 거주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위기25:23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알종교에서는 토지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바알체제에서는 왕이 바알 제사장 역할까지 담당하여 모든 재산,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이 있는 왕의 신하들, 귀족들, 권력자들은 얼마든지 토지와 집을 사 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제 아래서는 빈부격차가 급속히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들은 있는 재산으로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백성들은 날로 더 가난하여지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심화됩니다. 그래서 바알신앙 아래 있는 가난한 백성들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겨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집요하게 바알 종교와 다툰 것은 여호와 신앙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가난한 백성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뜨거운 가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예언서에는 여호와 신앙과 바알신앙 사이에 길고 긴 투쟁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절대 권력자 아합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재산을 불려야겠다는 욕심도 부리지 않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지키려 했던 나봇은 부동산 투기로 한몫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현대인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탐욕의 바알신앙에 맞서 여호와 신앙을 굳건히 지킨 믿음의 순교자입니다.

 

땅과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 생명을 꽃 피울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생기만 불어 넣어주시고 끝난 게 아니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 또한 주신 것입니다. 그 축복이 땅입니다. 땅은 모든 피조물들이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터전입니다. 인간과 동식물들은 땅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피조물들이 그 생명을 아름답게 꽃 피워갈 수 있도록 땅을 공평하게 나눠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현실은 언제나 정 반대였습니다. 남의 땅을 빼앗아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이들과 땅을 빼앗겨 가난과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사이의 불평등하고 불의한 관계가 언제나 이어졌죠. 이것이 인류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 이 죄악을 참회하고 땅에 대한 정의를 세울 때에 하나님의 정의가 선포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대한 정의를 강제로 지켜나가도록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기쁨의 해인, 희년을 명령하셨습니다. 50년마다 처음 각 지파, 가족들에게 나눠준 땅들을 다시 되돌려 주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땅의 불평등한 소유로 파생된 모든 빚도 탕감하고 신분의 예속관계도 원위치 시켜 자유인으로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인류역사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인 사상이자 신앙입니다.

이 희년사상은 사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거의 실현되지 않았고 박제화 되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다시 강조되고 부활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이 희년사상을 끄집어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토대위에 있음을 복음으로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매일 주기도문으로 암송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년사상은 어떤 의미일까요? 땅이 가장 중요한 부의 축적 수단으로 여겨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희년사상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과 고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시간은 성서에서 이야기한 희년, 토지정의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연구하며 실천하는 토지자유연구소의 남기업 소장님을 모시고 시대의 증언을 듣고자 합니다.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

(남기업 소장: 토지+자유연구소)

 

설교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돌아보니 제가 1985,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지만 다니는 교회에서 여기로 여름수련회를 왔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1년 전입니다. 그때도 이 건물이었는지는 모르겠네요.^^

 

고기교회가 50주년이 된 뜻 깊은 날에 목회자도 아닌 저를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나눌 말씀은 희년입니다. 희년은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는 희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가장 초보적인 질문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죄를 사해주시러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온전한 대답이 못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죄 사람으로만 보면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많습니다. 가룟인 유다, 대제사장, 바리새인들 모두 죄 사함에 도움을 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죄가 사해지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으니까요.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예언자적 사역을 하다가 권력자들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길이었고, 수난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라면 예언자적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과 긴장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정신,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판적 관점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활의 확신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의 예언자적 사명은 어떤 형태로 감당했을까요?

 

그것은 선택과 옹호, 그리고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불의한 제도의 피해자들, 억눌린 자를 선택하고 옹호하고 억누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겐 매섭게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상하지요. 예수님은 자주 편애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그냥 사랑하셨을 거 같은데, 안 그러셨어요. 모두 사랑한다, 그것은 사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사랑한다고 했다면 권력자들이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약자, 불의한 시스템의 피해자들을 선택하고 옹호했습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선택과 옹호는 위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마음의 평안이나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각 사람 마음 마음에 나라와 세계 전체에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이 바로 희년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3.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복음 8)

 

요한복음 8장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등장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아왔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은 그를 보호하십니다. 선택하고 옹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여인은 인간의 존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가져 버린 사람입니다. 일부러 망가졌습니까? 어떤 여성이 자기 몸을 이렇게 함부로 굴리겠습니까? 무슨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벗어나기 힘든 상황들, 조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어떻게 그녀가 이렇게 처참한 상황으로 추락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30세 전에는 뭘 하셨을까요? 회당에 가서 성경만 보고 기도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생활을 하셨습니다.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렸을 것입니다. 어울리면서 자기 또래의 친구들이 가난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을 것입니다. 엄청난 빚을 진 채무자가 자신의 딸을 채권자에게 넘기는 장면도 수도 없이 목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활동했던 갈릴리 지역은 정말 가난한 사람이 많았거든요. 땅이 없는 자, 빚에 눌린 자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갈릴리 지역의 땅을 소유한 지주들은 거의 예루살렘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이미 예수님이 많이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결국 채권자에게 팔려가더니 결국 저렇게 되었구나. 아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처참하게 타락한 원인의 상당부분이 자기 책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4. 희년의 눈으로 사회를 이해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여성이 반()희년적 제도의 희생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희년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희년을 전파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누가복음 418~19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당시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하고 억눌린 자를 더 억누르지만 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희년을 전하러 왔다고 하자, 종교권력자들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희년은 무엇일까요? 레위기 25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50년 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해가 희년입니다. 안식년이 7번 지나고 그 다음이 바로 희년입니다. 음력 710일 대속죄일입니다. 이 날에 토지반환과 부채탕감과 노예해방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은 죄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과 사회경제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의미의 자유와 해방입니다. 그리고 희년에는 휴경을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희년은 죄의 문제, 사회경제적 착취의 문제, 자연환경의 문제 등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입성한 사람들을 모두 토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각 지파별로, 가족별로, 그리고 영구매매를 금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구매매를 하게 되면 토지소유가 편중되고 토지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간의 착취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소작인이 형식적으로 자유인이라 하더라도 지주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예속되어있습니다. 토지에 대해서는 평등한 권리가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시적 사용권 판매를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50년이 되면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고 사용권을 넘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50년이 되도록 기다리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그래서 무르기 제도를 두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 일어버린 토지를 되찾아주는 것입니다. 대신 값을 지불하고 토지를 원래의 토지 소유주에게 주는 것입니다. 무르기 해주는 사람을 영어로 redeeme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신약으로 오면 구속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값비싼 피를 흘려서 대신 값을 지불하고 마귀의 종 되었던 우리를 사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무르기를 해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걸까요? 아닙니다.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구약의 희년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기득권자들이 그렇게 싫어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죄를 용서 받는 다는 것도 싫었고, 구약의 희년을 전하러 왔다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리고 희년에는 부채도 탕감해주었습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손해를 무릅쓰고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노예도 해방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농사지을 토지도 생기고 부채도 사라지고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날, 그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이 희년을 선지자들이 외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서 58절을 보겠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져

 

예수님 당시에도 토지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대다수 사람들이 빚에 짓눌려 있었고, 노예처럼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반 희년적 제도의 피해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옹호한 것입니다.

 

이 희년의 말씀으로 오늘날 교회는 돌아와야 합니다. 이 희년의 말씀이 교회에 선포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상황을 보십시오. 부채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한민국의 가계부채가 1200조 원이 넘어섰습니다. 국민의 10%가 민유지의 97%를 소유하고 있고 40%는 아예 한 뼘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뼈 빠지게 일하지만 겨우겨우 먹고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것이, 취직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희년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토지를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나눠 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문자적으로 접근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현대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허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우리 사회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하나님나라를 구하자라는 말을 청년 때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나라를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못한다면 현실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구하자, 고하면 모든 것을 다 말한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 말하지 않는 것과 똑 같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가 현실을 진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떠올릴 때 희년을 떠올려야 합니다. 희년의 관점에서 오늘날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노동에서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토지정의가 확립되지 않아서 부채에 시달리고 극소수의 사람이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누리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토지정의가 확립되지 않으면 일자리가 잘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노예노동이 되는 겁니다. 빚을 내지 않고서는 집을 사기 어렵게 됩니다. 일자리가 안 생기니까 돈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업체에 전화를 해서 고금리로 돈을 빌리고 이러다가 부채의 늪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희년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의 파편화된 현실들을 하나의 문맥 속에 배치시킬 수 있고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5. 어떻게 희년을 실천할 수 있을까?

 

성령에 충만해야 희년을 현재화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교회가 그랬습니다. 희년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불의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대항공동체를 넘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보여주는 대조, 대안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속해 있는 희년함께가 주축이 되어서 만든 토지+자유연구소에서는 희년을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한 제도적 대안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정의롭고 효율적인 제도를 디자인해서 정치권에 끊임없이 제안하고 있습니다. 희년정신에 가까운 정의로운 제도가 세워져야 억울한 사람, 슬픈 사람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거기에는 성경구절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희년함께>는 빚에 짓눌린 청년들의 부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은행을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여기에 앉아있는 안정권 형제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야 하는데, 은행은 돈이 별로 필요 없는 사람에게 돈을 잘 빌려주고 돈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에겐 문턱이 너무 높다고요. 희년 정신에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우리 모두 은행에 돈을 예금합니다. 그런데 내가 맡긴 돈이 어디로 쓰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부동산 투기에 쓰이는지, 무기 사는 데 쓰이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희년은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희년은행은 관계금융입니다. 희년은행은 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이자 저축입니다. 무이자 대출은행입니다. 무이자로 대출을 하고 그들의 경제생활이 건강하도록 돕는 교육을 합니다. 또 희년은행 모인 자금은 청년공동체 주거를 위해 쓰일 예정입니다. 빚에 짓눌려 고립되어 혼자 울고 있는 청년들을 실질적으로 돕고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금융질서를 만들려고 합니다.

 

조합원이 되어주십시오. 저축하시면 됩니다. 조합비 5,000원을 내시면 됩니다. 내 돈이 고통당하는 청년들을 위해서 쓰여 지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쓰여 집니다. 그러면서 원금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희년말씀을 이해했을 때 한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총체적으로 구할 수 있으며 대항공동체 뿐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대조공동체 대안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고기교회가 희년을 보여주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처럼(누가복음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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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 더 중요한 것(성령강림후열번째 주일.2020년8월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바람 895 2020.08.15 21:15
797 예수님의 필요충분조건(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일 2020년 8월 2일 사진 첨부파일 윤채아빠 825 2020.08.15 19:05
796 "보았다. 이제, 듣고 지키면...될 것이다"(성령강림 사진 첨부파일 sikiryou 1094 2020.07.26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