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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어서 (창조절 여섯째주일, 2016.10.9)

mungge | 2016.10.20 09:46 | 조회 1458

(2016. 10. 8. 김방울 / 김유나 결혼식)

□ 본문: 빌립보서 21-11

□ 제목: 선을 넘어서

설교자: 이성욱 선교사

 

안녕하십니까? 저는 캄보디아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성욱이라고 합니다.

저는 캄보디아에서 총각시절에 3년 결혼한 후 6년을 일하면서 선교에 대해서 느끼고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오늘 설교를 통해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선교를 한자로 쓰면 가르칠 또는 선포할 자와 가르칠 자를 씁니다. 붙여서 쓰면 가르치고 선포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뉘앙스는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보다 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구 제국주의와 함께 시작한 제3세계를 향한 선교가 식민주의의 종식과 함께 그 접근방식에 있어서 근원적인 도전을 받으면서 수직적 위계를 내포하는 선교의 개념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선교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성찰과 반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반성과 성찰을 토대로 같은 선교라는 같은 발음을 가지지만, 가르칠 자가 대신에 선(line) ‘자와 가르칠 대신에 넘을 를 써서 선을 넘는다는 의미의 선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제안해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신이라는 전능자의 지위를 포기하시고, 인간으로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 인간이 되셨다는, 그것도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절대 건널 수 없는 벽, 즉 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선을 넘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이 전지전능이라는 자신의 속성까지도 넘고 초월해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오해하고, 그 오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능을 포기하심으로 이루고자 하신, 아니 자신의 전능을 포기함으로써만 이룰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는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던 것이겠지요. 예수께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도 넘어 오셨지만, 우리의 고정관념 또한 넘어서 당신의 구원사건을 펼치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종교전통이 가지고 있던 모든 고정관념을 또한 넘어서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소외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율법의 정신이었고, 본질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이 율법을 이용하여 이스라엘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가난한 농민들과 서민들을 자기들의 권력 아래에 옭아매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를 지배하고 있었던 고정관념인 율법중심주의라는 선을 넘어 그 율법을 폐기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의 해방을 이루고자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기독교 선교란 예수님께서 선을 넘으셨던 것처럼 인종 간의 장벽, 문화의 장벽, 이념의 장벽, 언어의 장벽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넘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을 넘어 오실 때 자신의 우월한 모든 지위를 포기하셨듯이 기독교 선교 또한 예수님의 본을 따라 모든 우월한 지위를 포기한 채 선을 넘어가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더 나아가 기존에 있었던 고정관념들을 넘어서 고정관념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선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캄보디아에서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면요... 저는 캄보디아에서 거의 매일 캄보디아 신문의 주요기사들을 정독해왔는데, 캄보디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헤어진 연인의 결혼식장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신랑신부 또는 하객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들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냥 참 다르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니 캄보디아 사회가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신문에서 본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사건 사고를 통해서 캄보디아 사회를 다시 조명해보니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아픈 과거와 잘못된 종교적 전통으로 인한 상처와 억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캄보디아는 30여 년간 내전을 치른 나라입니다. 1960년대 말 베트남전쟁의 여파로 시작된 내전이 19991월에야 비로소 끝이 났는데, 30여년의 내전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30년동안 거의 200만 여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200만명은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해당합니다. 4인가족 기준으로 했을 때 캄보디아 사람들은 자기 가족 가운데 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트라우마가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17세이상 성인의 40%이상이 전쟁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지는 수류탄 투척과 같은 이해하지 못할 사건의 두 번째 이유로는 캄보디아의 종교적 전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캄보디아 사회는 소승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교리 중에 카르마(업보) 교리가 있는데, 실제로 불교의 카르마 사상은 석가가 기존의 힌두교의 숙명론적인 카르마 사상을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윤리적 지침을 주기 위해 개선된 카르마 사상을 주창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불교도들은 전통적인 숙명론적 카르마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동남아시아 소승불교 국가들의 시민사회단체에서 그 문화권에 만연된 카르마 사상을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착과 시민의식 함양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 여기고 숙명론적인 카르마 사상을 극복하기 위한 의식개혁 운동을 전개하는데, 그와 관련한 국제적인 모임의 결실로 ‘Rethinking Karma’라는 책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소승불교 국가에 업보사상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카르마 사상에 의하면 현생의 나의 비참한 상황은 전생의 나의 잘못에 의한 것이고, 현생에서 내가 잘 되는 것은 전생에 쌓아놓은 선업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지금의 비참한 나의 상황, 또는 내 마음에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받은 상처와 아픔은 나의 숙명이고, 업보이니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상한 감정이나 울분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여 삭히거나 상담을 통해 해소하려고 하기 보다는 묵묵히 그 아픔을 삼키고 살아내어 자신의 업을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저의 캄보디아 사람들의 의식에 대한 이해에 대해 검증하기 위해 프놈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아내에게 부탁하여 한국어과 학생들에게 질문했더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상한 감정이나 아픈 상처들에 대해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캄보디아 사회는 상한 감정과 아픈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해서 해소하기 보다는 감정표현을 억압하는 사회였던 것이지요.

 

어린시절부터 억압되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사춘기와 청년기의 혈기왕성한 시절에 사소한 말다툼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분노로 폭발적으로 표출되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캄보디아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캄보디아 사람들은 잘 싸우지 않지만, 한 번 싸우면 인사사고가 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더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습과 전통이 전쟁 이후의 트라우마와 겹치면서 증폭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연인의 결혼식장에 수류탄을 터뜨리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의미는 가장 낮고 천한 자들의 입장에서 인간의 삶을 보려하셨고, 이해하고자 하셨던 것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가장 낮고, 천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위선을 제대로 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이 죄인으로 규정했던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오히려 그들의 편에서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내가 보기엔 니놈들이 오히려 죄인이고, 위선자야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행위로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로 사랑은 수동적인 행위여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고 싶다고 해서 무턱대고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선교라기보다는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폭력일 수도 있다는 성찰이 선교활동에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교란 단지 국경의 장벽을 넘어서 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가장 억압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회의 문제와 억압들을 밝혀내고 그 아픔과 억압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이어져서 교회도 생기고,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하게되는 것이겠지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캄보디아 사회와 사람들을 옭죄고 있는 전쟁의 상처와 종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억압을 보면서 선교사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상처와 억압은 어른들의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인 어린이들에게도 고스란히 대물림되어 일어나는 일이기에 더욱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의 억압되어 있던 상처를 직면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우고, 반복해서 훈련할 때라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총각 때 캄보디아에 있을 때인 2000-2001년도에 캄보디아에는 단 한권의 어린이 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캄보디아 어린이들을 위해서 좋은 그림책들을 만들어 보급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다시 2008년도에 캄보디아에 가면서 그 일을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책들을 선정해서 출판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캄보디아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 수록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캄보디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평화그림책을 만들어서 보급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이 그림책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보고,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책들이 캄보디아에 많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독서치유와 관련된 책들을 출판하여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캄보디아에서 일하면서 올해 12월이 되면 50권의 좋은 그림책들을 캄보디아에서 출판하여 소개하고, 보급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상황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 했는데 사실 이 이야기가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는 쏙 들어오시지 않는 먼 나라 얘기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로 눈을 돌려볼까요? 한국에 가끔씩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사회가 가지는 경쟁과 속도는 정말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이지만 다시 이러한 경쟁적 질서에 다시 적응해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경쟁적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12일에서 외치는 나만 아니면 돼라고 하는 구호 속에서 세상의 선택받은 1%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모두들 경쟁에 뛰어듭니다. 99%의 낙오자를 만드는 체제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에 저항하고 도전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경쟁적 질서가 세월호 참사를 나았고, 무분별한 개발과 생태계의 파괴를 나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생태계의 파괴는 다시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저는 고기교회와 같은 작은 교회들의 선교적 사명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구체적인 답은 없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 살고있는 여러분들의 선교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화와 현대화가 진행될수록 이웃들 간의 벽은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높은 벽을 넘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됨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에게 주어진 선교적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을 벽을 넘어서 다른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것, 예수께서 신적 권위를 넘어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들의 편에서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우리시대의 낙오자들의 편에 서서 우리시대를 향하여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우리 시대의 아픔 당한 사람들과 낙오자들을 교회에서 더욱 귀히 대접하고 섬김으로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사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캄보디아에서 여러분들은 성남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삶의 실천으로 보여주셨던 선교적 사명을 이 세상이 가진 고정관념을 거스르고 넘어서 우리의 삶을 통해 재현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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