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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맞서는 신앙 (창조절 첫째주일, 2016.9.4)

mungge | 2016.09.11 16:51 | 조회 1430


설교: 유경재 목사

제목: 폭력에 맞서는 신앙

본문: 마태복음 5:38-48

  

 

<타임 투킬>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청년 두 사람이 미시시피 시골길에서 열 살 난 흑인 소녀와 마주치자 이들은 그 소녀를 강간하고 폭행한 후 강물에 던져버립니다. 이 소녀는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범인들은 체포됩니다. 소녀의 아버지 칼 헤일리는 백인 변호사 제이크에게 자문을 구하지만,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던 백인 청소년들이 무죄 방면됐다는 이야기와 백인들로만 구성되는 배심원단으로는 도저히 재판에 승산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총을 구해 법원에 들어가 재판을 받으러 가는 범인 두 사람을 직접 사살하고 경찰 한 명에게 심한 부상을 입힌 뒤 순순히 체포됩니다.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였습니다. 이때 칼의 변호를 맡은 제이크는 KKK 단원들의 위협에도 칼의 변호를 계속합니다. 거의 이길 수 없는 재판에서 변호사 제이크는 배심원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최후 변론으로 무죄 평결을 받아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성폭력을 행한 백인 청년을 직접 총으로 죽인 흑인소녀의 아버지가 무죄로 평결되었는데 영화는 이것이 옳다고 이야기 하려는 것일까요? 물론 이 영화는 인종차별과 개인적인 복수가 큰 틀을 이루지만, 애당초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냈던 사법 시스템의 한계와 모순을 들어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죄에 대한 정당한 사법판결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또 다른 폭력이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사회는 여러 가지 폭력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폭력이 있는가 하면, 대기업들의 경제적 폭력이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고, 언론의 무기력함과 횡포가 또한 이 사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폭력에 맞서 항거하는 사람들이 또한 폭력에 의존하고 있어서 폭력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북간의 대립과 긴장은 극한의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북한은 핵개발과 미사일 실험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이에 맞서 우리는 우리대로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겠다고 하여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앞장 서 평화를 이끌어야 할 한국교회도 이 대결의 장에서 결국 폭력은 폭력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비상시국대책회의를 구성하고 사드배치를 포기하거나, 적어도 국회의 비준과정을 통하여 국민 여론을 수렴하라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지만 보수우파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하였는데, 가해자가 가해한 만큼만 갚으라는 뜻입니다. 즉 이를 하나 부러뜨렸는데 화가 난 피해자가 가해자를 가격하여 이를 두 개 부러뜨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제한의 복수를 막는 법입니다. 현대 사회의 사법정신이 바로 여기에 기초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범죄자는 재판에서 그 범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지요. 다만 개인이나 집단이 사적으로 복수하는 것을 금하고 국가의 법으로 이를 행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이 올바로 재판을 하지 않으므로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법을 통하여 시행되는 형벌도 얼마든지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우리는 오늘날의 사법판결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폭력의 속성을 아시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단한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행동이고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친히 그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벧전 2:23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폭력의 극치였지만, 그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는 대신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셨습니다.

 

불란서 보르도 대학의 교수였던 자크 엘룰의 저서 폭력에 보면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 공통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룰 교수는 말하기를 폭력은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에나 심지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국가가 폭력에 근거하여 수립되었으며, 폭력에 의하거나 폭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국가자체가 유지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폭력적인 사실을 지적하는 가운데 미국 사회의 예를 말하면서 이와 같이 도덕화 되고 기독교화 된 사회, 법과 정의의 정중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사회도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임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이런 상황을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도 아는 대로 이방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20:25

결국 이 세상 나라들은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는 세울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폭력은 이 세상 나라의 필연적인 속성입니다.

엘룰 교수는 폭력의 몇 가지 법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폭력의 첫 번째 법칙은 계속성입니다. 일단 폭력에서 출발하면 계속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516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혁명 과업을 완수하고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었으나 그들은 군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계속적인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그것도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집권하려고 더 강력한 폭력을 동원하다가 결국 그 정권은 폭력으로 종결 되었습니다.

폭력의 두 번째 법칙은 상호성입니다. 그것은 칼을 쓰는 모든 사람은 칼로 망한다”(26:52)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만들어내고 폭력을 생산, 방출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영화에서도 흑인소녀의 아버지가 두 범죄자를 재판 받기 전에 쏘아죽이자 잠복하여 잠잠하던 KKK단이 다시 등장하여 변호사의 집을 불사르고 변호사를 돕는 여대생을 납치하는 등 폭력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북한의 핵문제도 대화로 풀어야 할 문제를 더욱 제재를 강화하면서 오히려 개성공단까지 문을 닫게 만드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거기에 대해 사드까지 배치하게 되었습니다.

폭력의 세 번째 법칙은 동일성입니다. 모든 종류의 폭력은 똑 같은 것입니다. 정당한 폭력이 따로 있고 부당한 폭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방시키는 폭력과 예속시키는 폭력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리적인 폭력, 경제적인 폭력, 심리적인 폭력 이 모두가 똑같이 폭력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미사일 개발하는 북한이나 이를 막고자 배치하는 사드나 다 같은 폭력입니다.

폭력의 네 번째 법칙은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폭력에 의하여 수립된 어떠한 정부도 국민에게 자유와 정의를 준 예가 없습니다. 폭력은 어떠한 고상한 목표도 실현 할 수가 없고, 자유와 정의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항상 폭력과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입니다. 폭력은 원래가 매력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용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보장받은 것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이 그러했고, 우리나라 역대 집권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 구현이란 구호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자기들은 평화주의자요, 반폭력의 기수이며 정의를 구현하는 자라고 선전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폭력의 법칙들이 그대로 우리 사회에서 실증되고 있음을 봅니다. 결국 이 세상 나라들은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런 폭력으로 이룩된 세상의 나라를 거부하고 사랑으로 이룩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폭력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폭력에 의존하여 세우시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한 사람의 귀를 베었을 때 예수님은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폭력에 맞서 폭력으로 대항한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겨자씨로 비유하셨는데, 그것은 결국 폭력과는 상관없는 힘없고 작은 것들로부터 천국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극히 보잘것없는 것으로부터 천국이 시작된다는 사실은 모든 폭력에 대한 거부입니다. 강력한 폭력에 의하여 단번에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자라나는 생명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폭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그 곳에서부터 새 생명이 싹트게 되어 천국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세상 나라 지배자들은 강제로 백성을 지배하려 하지만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폭력 대신 사랑으로 봉사하고 희생하는 자들임을 뜻합니다. 오른 편 뺨을 칠 때 왼 편도 돌려대며,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이런 정신을 따라 그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가두면 갇히고, 때리면 맞고, 죽이면 순교를 당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교회가 그 복음 전파를 위해 혹시라도 폭력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복음 그 자체를 훼손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이와 같이 전적으로 폭력을 배제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에 의존하지 아니하고도 자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력은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어떤 폭력보다도 더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기에 이 세상의 폭력이 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에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중력의 우주 법칙과도 같이 존재하는 폭력의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모든 종류의 폭력을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폭력적 현실 속에 살더라도 결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폭력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드려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폭력은 거부되어야 합니다. 미국이 무기를 개발하는 명분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들이 내다 파는 무기가 오늘 세계 도처에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평화를 위한 무기란 논리적으로만 가능한 것이지 실제로는 오히려 전쟁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악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폭력과 폭력이 맞서는 사회 속에서 화해와 사랑을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편의 폭력에도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전할 복음은 화해와 용서와 사랑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제8차 총회에서 2001년부터 2010까지를 폭력극복 10으로 정하고 폭력 극복 프로그램’(Programme to Overcome Vio- lence)을 만들어 시행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의 온전한 의미를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이루고, 적극적인 비폭력으로 갈등을 해결하면서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모색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우리는 우리의 모든 개인적 관계에서 비폭력을 실천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합법적으로 수용되는 전쟁을 단연코 금지하고, 국제적인 합법적인 중재규칙을 제정하기 위하여 정부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에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WCC폭력극복 10은 육체적 폭력 뿐 아니라 감정적, 지적, 구조적 폭력 등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극복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국가들 간의 폭력, 한 국가 안에서의 폭력, 지역공동체 안에서의 폭력, 가정과 가족 안에서의 폭력, 교회 안에서의 폭력, 성폭력, 사회-경제적 폭력,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봉쇄의 결과로서 야기된 폭력, 청소년들 간의 폭력, 종교적 문화적 관례에서 생기는 폭력, 법적 구조 안의 폭력, 창조를 거스르는 폭력,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와 소수민족혐오증에서 나온 폭력 등 13가지 형태의 폭력을 주요 이슈로 삼았습니다.

WCC의 폭력극복 10년 운동이 눈에 보이는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폭력 극복운동을 전개해 가야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확신은 결코 폭력이 하나님의 나라를 저지시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이런 확신을 우리에게 비유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새가 와서 쪼아 먹, 어떤 것은 돌작밭에 떨어져 시들고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 자라지를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새나 돌이나 가시는 이 세상의 폭력들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 천국이 실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폭력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세상에서 많은 박해와 핍박, 훼방을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 비유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3060100배의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추수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폭력이 난무(亂舞)하여도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확신이 그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확신은 역사 속에서 잘 증명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그렇게 박해를 당하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내었어도 더욱 그 땅에 번창했으며, 한국 땅에서 수많은 교인이 순교와 고난을 당했지만 오늘날 이 땅에 복음은 더욱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폭력이 결코 이 복음을 저지시킬 수가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들의 폭력에도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가슴 깊이 그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확신을 가지고 오늘 이 폭력적인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여기에 사랑과 화해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거부하고 항거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폭력에 동조하도록 그럴듯한 명분과 이유로 유혹할 때 우리는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요라는 말 때문에 우리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다 해도 우리는 끝까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폭력으로 맞서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폭력 앞에 굴하지도 않는 확고한 신앙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항거하여 사랑과 화해와 복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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