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하나님 처럼 되어서?(사순절 첫번째주일, 2017년 3월5일)

하늘기차 | 2017.03.05 16:55 | 조회 1215

                            

                   하나님 처럼 되어서?

사순절 첫번째주일                                                                                                        창3:1-13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에덴동산에대해 두 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1-2:4앞부분은 태초라고 하며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하는데, 2:4뒷부분-3:24에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는 창조 전에 이미 무언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고,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니 1:2절도 보면, 1절에서 태초라고 시간 이전의 무에대해 이야기하는데, 2절에서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있다고 합니다. 이게 무엇일까요? 창조이야기 속에는 창조를 기록한 사람의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들어와 있습니다. 언제 기록하였을까요?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의 시대가 가장 어둡고, 혼란스럽고, 공허한 때가 아니었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도, 아니 세계도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학자들은 창1:1-2:4앞부분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즈음에 기록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은 포로기간 동안 가뜩이나 야웨 하나님이 바벨론 신에게 패배하였다는 자괘감과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의 신전과 예식들의 거대함과 화려함에 주눅들어 살아가다가,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문화정책으로 일말의 희망을 품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성전, 성곽, 마을 등 모든 산업 기반이 참담하게 무너졌음을 봅니다. 하나님신앙은 진작에 잃어버렸고, 바벨론에서 묻어 온 거짓신과 우상들만이 득실거릴 때에, 제사장계열의 한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겠다는 신앙으로 이 세상은 바벨론의 마루둑이나, 앗세라 같은 거짓 신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였음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이 기록자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2절의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을 뚫고 말씀을 통해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1:1-2:4앞부분은 바벨론포로기 동안에 이스라엘이 이방 세계를 보다 넓게 경험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우주적 관점으로 기록하는데, 2:4뒷부분-3:24의 창조이야기는 외연이 축소되어 땅과 지역과 국가 경계의 테두리들이 등장합니다. 언제 기록되었을까요? 신학자들은 두 번째 창조이야기를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땅에대한 축복이 선조왕인 다윗과 아들 솔로몬 왕 때 활짝 피어난 것을 보며, 솔로몬왕때, 왕궁의 고급엘리트들에의해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경계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힘과 물질적 풍요 아래에서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신음 소리와 만연한 우상숭배, 특히 시바여왕과 함께 들어온 온갖 우상들에서 비롯된 타락과 혼돈이 하나님신앙을 흔들어 놓았으며, 당대 중동 최고의 지혜자인 솔로몬의 지혜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기록자는 바라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경륜이 고대 중동지역 민족과 나라들의 가치체계인 선과악의 2원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기록자는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에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를 통해서도 확인이 됩니다. 선악과는 바로 인간의 지혜의 어두움, 당시 솔로몬 왕 때 활짝 피어오른 지혜가 얼마나 덧 없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별한다는 것과 선과 악을 섭리 안에 둔다는 것은 다릅니다. 3:22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선과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과악에대한 인식은 2원론적이어서 끝없는 싸움으로 어두움과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 2원론적인 가치체계의 죽음과 허무를 사도 바울에게서 분명히 봅니다사도 바울은 롬7:19-21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

                         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

                         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24에서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

                        습니까?”라고 탄식하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결말이 우리 인간의 정체성을 그대로 고백합니다. 25절입니다.

                       “.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야누스, 지킬박사와 하이드, 미녀와 야수, 백설공주, 신데렐라, , ,모두 우리의 모습입니다. 2원론에, 논리에, 합리성에 매일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사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방금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드립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니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럼 왜 선악과를 에덴 동산 한 가운데에 갖다 놓고 먹지 말라고 한거야, 분명히 먹을텐데 하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해가 조금은 되시겠지요. 하나님이 먹을 것 뻔히 알면서 선악과를 에덴 동산 한 복판에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바로 이 역사, 이 피조 세상에 지금도 있는 나무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어디서 유혹을 하였나요? 바로 선악과나무 아래에서 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있는 곳 어디에나 선악과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일상 속에 선악과는 매 장소, 매 시간 마다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배당에도 있네요. 태고적 박물관 유리진열장에 보관되어 있는 나무가 아니라, 오늘 나의 삶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바로 각 피조물들의 존엄을 깨뜨리지 말라는 약속의 나무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표상의 나무입니다.

    많은 상징체계들이 변하지만 이 상징은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시점에 가서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따라 논리와 합리성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적 존재로 온 우주와 역사 속에 온갖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할까요? 지금 같으면 꿈만 같고, 아니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홀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말아야 할 이유를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있어서 보다 더 본질적인 상징은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 동기가 하나님 처럼 된다는 뱀의 유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씀, 명령 보다는 욕심이 앞서가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봅니다. 첫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염검을 든 천사들로 하여금 생명나무열매를 넘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사도바울의 탄식입니다. 넘지 말아야할 경계를 넘은 인간들이 이제는 서로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부모와 자식, 성도들, 이웃간에, 교수와 학생, 기업주와 노동자, 국가와 국민, 백색인종과 유색인종, 성적소수자, 가축들, 새들, 식물들, , ,

    넘어가지 말라는 것은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닮아서 우주와 역사 속에 하나 밖에 없는 로하여금 아닌 또 다른 하나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바라보면 얼마나 이 경계가 무너지는지 모릅니다. 그 본질은 욕망입니다. 자본이고, 이데올로기이구요. 국가 폭력이구요. 결국 기득권입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4.3제주, 보도연맹사건, 세월호, 5.18광주 . . .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가축들과 조류를 살처분 했나요? 이 죄과를 인간이 받을 것입니다. 틀립없이 받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함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한계와 약함을 상징합니다. 근데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며 그 말씀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한하고, 연약한 것이 나쁜가요? 한계와 연약함은 하나님의 창조의 선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뱀은 자꾸 벌거벗은 것이 나쁜 것처럼 더 좋은 것이 있다고 충동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연약하고 유한한 경계가 있는 각자에게 아름다움을 부여하였습니다. 유한한 것에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각기 색과 향과 맛에 따라 자기 발현을 자유롭고도 평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꽃들은 꽃대로, 나비는 나비대로, , 물고기, 하늘의 달과 별들. . .하나님은 유한한 피조물의 우주적, 역사적 하모니를 통해 충만한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뱀이 이 피조의 한계를 나쁘다고 합니다.

    무수한 미디어매체들, t.v, 인터넷, SNS등에서 들려오는 정보들은 우리의 마음을 충동질합니다. 저 집을 사야 행복하고, 저 자동차를 사야 우리 가족이 즐거워질 수 있고, 저 약을 먹어야 건강해 질 수 있고, 저 보험을 들어야 행복의 완결 판이라는 거짓행복의 소리를 우리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본래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가득 체워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 쪽이 비어 있습니다. 여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무언가 나 아닌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뜻인데, 세상은 이것을 부족, 모자람으로 보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여백, 유한함, 연약함은 당연히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그렇게 창조되었는데, 뱀과 세상의 매체들은 구조적인 여백을 심리적인궁핍으로 변질시켜 무언가 부족하고, 힘이 없고, 체워지지 않으면 불행한 것 처럼 충동질을 하는데, 여기에 우리가 너무 쉽게 넘어갑니다. 5:18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아담과 하와의 죄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유일한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이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할 때, 그 은혜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8/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467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31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190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781 2005.09.02 16:30
835 하나님 이름에서 하나님 나라로(창립55주년감사주일, 2021년5월3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27 2021.05.29 19:32
834 택한 백성에게 주는 선물 보혜사(성령강림주일, 2021년5월2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19 2021.05.22 16:49
833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부활일곱번째주일,2021년5월1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939 2021.05.15 17:04
832 아버지!(부활여섯째주일, 2021년5월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59 2021.05.08 19:31
831 녹색평화 옷 입기(부활다섯째주일,2021년5월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98 2021.05.02 15:57
830 여호와는 나의 선한 목자2(부활네째주일, 2021년4월2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78 2021.05.02 15:54
829 여호와는 나의 선한 목자(부활세째주일, 2021년4월18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37 2021.05.02 15:50
828 나타냄으로 부활(부활절둘째주일,2021년4월1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68 2021.04.10 17:28
827 부활:하나님의 시선으로 봄(부활주일,2021년4월4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50 2021.04.03 16:47
826 하나님의 시선(종려주일, 2021년3월28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956 2021.03.27 16:26
825 광장 : 이 시대 욥의 자리(사순절다섯번째주일, 2021년 3월2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24 2021.03.21 09:07
824 포도원을 가꾸시는 하나님(사순절두번째주일, 2021년2월28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85 2021.02.27 16:50
823 알지못하였다(사순절첫번째주일, 2021년2월2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53 2021.02.20 20:31
822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주현일후여섯번째주일,2021년2월14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63 2021.02.13 19:23
821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힘(주현일후다섯번째주일,2021년2월7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82 2021.02.06 18:46
820 신화가 아니라,눈으로 본 위엄(주현일네번째주일,2021년1월3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21 2021.01.30 17:12
819 물 흐르듯 흐르는 성령의 역사(주현일후세째주일, 2021년1월24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29 2021.01.23 17:37
818 십자가의 지혜를 드러내는 성령(주현일후둘째주일,2021년1월17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58 2021.01.16 17:19
817 그들은 누구인가?2(주현일후첫번째주일,2021년1월1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079 2021.01.09 16:35
816 그들은누구인가?(성탄절후둘째주일,1월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90 2021.01.04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