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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주현절후네째주일,2017년1월29일)

하늘기차 | 2017.01.29 12:58 | 조회 1180


               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주현절후네째주                                                                                                         14:22-33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 병을 고친 기적사건에대해 말씀을 나누었는데, 오늘 본문도 예수님이 바다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아니 배 타고 가면 되실 걸 왜 걸어 가셨을까? 이번 주도 여전히 끙끙거렸습니다. 생각과 마음과 몸이 경직되어 역시 얼음 땅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오늘 이 시대에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어라 말씀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적은 기적이지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치유의 말씀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적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실마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기적의 과정이 어떠한지를 통해 믿음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를 회복시키시는지는 찬찬히 살펴 보며,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신비라고 했습니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주는 생명과 물리 과학이 지금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주는 보이는 세계가 5%이고, 흑암물질이 25%이고, 흑암에너지가 70%라고 합니다. 게놈 프로젝트에의해 인간 DNA의 생명의 신비를 밝혔는데, 이것은 DNA전체의 3%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의학자는 그 남아있는 DNA가 하나님의 재림 때에 영적인 몸으로의 부활과 우주적 영광의 때에 100% 발현이 될 것이라고도 합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은혜는 합리성과 상식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상식과 합리성을 파괴하고 깨뜨리는 몰상식, 비합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식과 합리성을 품는 초월함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우리 논리와 합리에 맞지 않을 뿐, 상상도 할 수없는 5차원 7차원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섭리와 질서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논리와 합리적 사고가 아니라 신화적인 사고 구조를 가졌던 고대의 사람들이 기적을 바라보는 눈이 보다 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바라보는데 적합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예수님 당시, 고대의 시대에 기적은 자연법칙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며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표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 속에 드러나는 기적을 자유신학자들처럼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풀려하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며, 기적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훼손합니다. 성경은 자연에대해, 과학에대해 모르며,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적에대해 자연적이다, 초자연적이다 라고 말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기적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감탄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도 역시 기적 사건이어서 생각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본문 말씀을 보아도, 통상적인 본문 해석을 죽어도 하기 싫어서, 본문을 바꿀까? 설날인데, 하며 이 생각 저 생각 머리를 굴렸지만, 이렇게 또 기적의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자연현상을 바꾸신 사건이어서 병자를 고칠 때 보이시는 예수님의 피조물을 향한 연민도 드러나지가 않아 난감합니다. 이렇게 바다 위를 걸으신 주님 앞에 어쩔줄을 모르는 저에게 사도 바울은 귀한 말씀을 저에게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많은 문제점들을 바라보며 고전12장에서 9가지 은사에 대하여 물론 기적의 은사, 능력의 은사도 포함해서 말하는데, 마무리하면서 31절에 무어라 이야기하는가 하면, 더 큰 은사를 구하라,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더 크고,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지금 당장, 가장 크고 좋은 것이 무언인가요? 한국교회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고스란히 다 같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바울이 더 크고,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고린도교회는 이전 과 똑 같이 이기적이고, 광적인 욕구를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혀 예상을 깨고 아무런 기적도, 이기적 욕망을 얻을 만한 것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13:8에서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지식도 사라진다고 하면서 9절에서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리스어로 온전한 것의 어원을 살펴보면 최종 단계로 인도, 마침, 온전하여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빌면, 이제 신약을 통해, 복음서를 통해 드러난 주님의 이적 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이 사랑이며,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없으며, 이제는 우리가 이 온전한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며 나아가야 할 때 라고, 시끄러워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합니다. 이전의 것들은 부분적이지만 사랑은 온전합니다. 적지 않은 경우,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 때, 당사자들의 믿음을 보고 기적을 일으킨 적은 거의 없습니다. 주님의 연민, 불쌍히 여김이 고통받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바로 사랑이 기적의 근원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이 온전하여, 처음이요, 끝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말씀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더 이상 기적에대한 콤플렉스에 메이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는 영원한 저의 화두이며, 교회가 잃지 말아야할 방향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도들이 고린도교회처럼 집단적으로, 광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비, 온전한 신비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과 풍요만을 찿을 때는 실소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위를 걸어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에게 가신 기적 사건은 52어의 기적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22절에 제자들을 제촉해서 배에 태워 자기 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사이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왜 그렇게 다급하셨을까요? 공관복음에는 없지만 요한은 52어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갈릴리는 당시 로마의 저항의 중심지였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갈릴리의 해방의 열기가 예루살렘으로 전해지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모시는 분위기에 제자들이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 중에 열심당원도 있고, 12제자외의 추종자들 속에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텐데, 여차하면 그 세속적 왕을 추대하려는 흐름에 제자들이 휘둘릴까 무리들에게서 격리 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홍역을 치르고 예수님은 산으로 가십니다. 기도하러 가십니다. 혼자 가십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과 풍랑을 만나 힘들어 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구별이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불었습니다. 갈릴리호수 북쪽으로는 해발 2800미터 의 만년설로 뒤 덮인 헬몬산이 있는데, 거기서 찬 바람이 계곡을 타고 갈릴리 바다에 쏟아지면 호수 위에 있던 따뜻한 바람과 부딪쳐서 종종 돌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언제 풍랑을 만날지 몰라 어부들은 항상 긴장한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모두들 바다라고 하면 2등이 서러울 사람들인데, 갑자기 들이닥친 풍랑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마태복음에는 홀로 계셨다고 하는데, 역시 누가복음에는 풍랑으로 고군분투하는 제자들을 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밤늦게 까지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인생의 풍랑을 만나 어찌할 줄 모르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보고 계시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우주의 순환을 보고 계시며 간섭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3:7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

                            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고 하십니다. 보고, 듣고, 안다고 하십니다. 8에서는 이스라엘을 구하여, 가나안으로 데려 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줄 곳 함께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왜그럴까요? 믿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의지와 경험과 느낌만을 신앙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오자, 보는 것만을 보는 신앙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상식적인 상황에서는 합리적으로 내 생각과 의지와 경험과 느낌이 내 신앙을 이끕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 때는 논리나, 합리나, 이성이니 하는 것을 넘어갑니다. 본문 상황이 그런 상황입니다. 베드로는 풍랑이 뒤흔들어 놓는 파도를 헤치고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얼떨결에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빠의 모습을 따라하려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의지로서는 도저히 한 걸음을 디딜 수 없습니다. 명령해 달라는 이런 표현은 참 독특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보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디서 보았던 모습 아닌가요? 로마의 백부장이 자기하인을 고쳐달라고 하며 한 말 말입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 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주님에대한 절대적, 전폭적인 신뢰입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되는 순간, 내 의식이 아닌, 내 쪽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견인하십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라고 했는데,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더냐 하고 예수님이 물으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자, 예수님이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이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면에서 베드로는 그 믿음에 무척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실수, 욕심, 이런 것은 주님 안에서 선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바라 보며 걸었지만 풍랑을 보는 순간 바다에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이 부르짖음이야말로, 우리의 부르짖음이어야 합니다. 자꾸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다 내려놓고 살려주십시오!’ 해야합니다. 주님은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시며,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하십니다. 그리고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32절입니다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고 합니다. 바람이 그친 것은 주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셔야 우리 인생의 바다에 물어닥친 바람이 그칩니다.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믿지 않음에 익숙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 번 인생의 풍랑 속에서 베드로처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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