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가난으로부터 오는 윤리강령(성령강림후다섯번째주일, 2021년6월30일)
가난으로부터 오는 윤리강령
성령강림후다섯번째주일(2021년6월30일) 창50:15-21;눅6:20,36-42
최근 우리 나라의 위상이 G7에 버금가는 자리에 까지 오르고 일본은 오히려 쇠퇴하여 그 존재감을 잃어버린 모습이 회의 테이블이나, 포토존에서의 위치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일본은 경제력으로나 인구, 토지 크기를 보아도 우리나라의 3배 정도의 국가적 힘을 갖고 있습니다. 여전히 부유하며 강력한 국가입니다. 지금 남한은 1인국민소득으로 세계상위권에 올라있고, IT부분에서는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력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는 문화적으로도 탁월한 콘텐츠를 세계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조심스럽습니다. 통일의 실마리는 찿지 못하고, 소외되고 차별받는 소수자들에대한 배려와 관심을 법적으로 세우며 함께 같이 살아가는 틀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결국은 기 껏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 위상이 높아지며 우리 국민들의 마음 한 켠에 기존의 강대국의 이미지, 역사적으로 제국의 힘을 누렸던 이미지를 혹여나 쌓지는 않는지 조심스럽습니다. 문대통령은 지난 유럽 G7회의 이후 오스트리아에 국빈 초청을 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가입니다. 전세계에 5 나라가 영세중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스위스, 투르크메니스탄, 남미의 코스타리카, 그리고 바티칸입니다. 지정학적으로 끊임없는 외부세력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우리 나라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제 그만 미국과의 군사동맹에서 손을 떼고, 북한도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동맹을 끊고 그래서 군비경쟁을 멈추고 영세중립으로 나아가야하지 않나 십습니다. 최소한의 국가방위 외에는 군사력을 키우는 일을 멈추고, 어느 동맹에도 가입하지 않고, UN이나 주변의 국가들이 중립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꿈 같은 이야기인가요? 너무 먼 이야기인가요? 그래도 성경은 그런 나라의 비죤을 선언하고 있으니 어디서부터인가 시작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인 제도 보다 하나 더 깊이, 그리고 앞서는 존재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소위 평지설교 후에 들려주신 윤리 강령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나라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루는 실천명령입니다. 세상 나라의 가치를 따르면서 교회에 예수 이름 빌려서 다리 하나 만 슬쩍 걸친 종교생활의 자세로는 이 말씀의 실현은 요원합니다. 소 닭 보듯이, 그저 먼 산 바라보듯 할 수 밖에 없거나,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누가 복음의 평지설교, 마태 복음은 산 위에서의 설교 말씀인데, 그 첫 번째 축복이 가난에대한 축복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24절은 부자에대해 화가 있다, 이미 위로를 다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나라와 달리 가난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요, 복있는 자의 첫 번째 길이며, 인류가 나아갈 길입니다.
몇 년 전에 신경림시인이 낙타라는 시집을 출간하고서 기자회견을 하였는데,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보니 세계화의 폐허에 덜 물든 곳일수록 본질적인 어떤 것이 남아 있더라”고 하여, 기자가 그러면 ‘본질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자,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본질, 창조의 본래 모습은 가난이요, 벌거벗음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의 기쁨은 주님의 기쁨에 초청 받아 우리서로같이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삶이라 하였습니다. 나 하나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 아니 온 세상 피조세계의 존재하는 모든 것과 소통하며 배려하며, 나누며 주신 생명의 복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화요, 일치요, 하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거룩한 성령의 모습입니다. 하나이며 셋입니다. 우리 역시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하나입니다. 이 전에 어느 교회가 다양성 속에 일치라는 슬로건을 걸고 복지 운동을 펼쳤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는 영성센타도 세우며 교회적인 것들을 망라하였습니다. 꽤 유명해졌고, 사회의 덕망있는 사람들, 유명 연애인들, 정치인들이 모이고 조직이 방대해 졌습니다. 한 마디로 부요해졌습니다. 가난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회당이 커지고 조직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늘면 가난은 그 설 자리를 잃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8:9에서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
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
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처럼 가난해 지는 것이 우리 성도의 본질입니다. 언젠가 ‘청빈한 부자’라는 주제로 뜨겁게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언어의 유희로 사람들을 값싸게 위로 하면 안됩니다. 그냥 가난이 복입니다. 성경은 부자가 되지 말라 하지 않습니다. 그냥 부자가 되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풍요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진짜 부자십니다. 온 세계, 온 우주가 풍요롭지 않습니까? 형형색색 갖은 모양과 형태와 움직임으로 넘칩니다. 그 풍요로운 부자 하나님께서 가난해졌습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가난해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기에 사족을 달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윤리, 실천, 행동은 여기서부터 솟아 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행하기 어려운, 어찌보면 불가능한 강령임에도 예수님은 ‘하라!’고 합니다.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에대한 고대의 격언들이 있는데 대부분 부정적인 어구입니다. 하지 말라입니다. 행하기 어려우니 비켜서 갑니다. 유대교의 대표적 랍비 힐렐은 ‘너에게 해로운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그것이 모든 율법이요, 모든 것을 풀이해 준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철학자 필로는 ‘네가 고통스러워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이스의 사수학자인 이소크라테스는 ‘누군가에의해서 당신이 싫어하는 일로 고통스러워한다면, 그러한 고통스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라고 합니다. 해로운 일을, 싫어하는 일을, 분노할 일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로운 일, 좋은 일, 온유함을 상대방에게 베풀라고 합니다. 이 힘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주님의 십자가의 가난함으로 낮아져 온순하고 겸손하여짐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샘 같은 힘입니다.
구약의 습3:12 한글개역, 그리고 KJV는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둔다고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이라는 표현 자체가 바로 가난함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 온유하고 겸손한 가난한 자들을 도성 안에 남겨놓겠다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가난한자가 남은자들이구나. 이 남은자에대해 이사야는 사6:13에서
“주민의 십분의 일이 아직 그 곳에 남는다 해도, 그들도 다
불에 타죽을 것이다.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416목공소 작업텐트에 박새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알에서 깨어나자 짹짹거리는 소리에 모두들 반가워하였는데, 걱정이 되는 것은 그 곳에 고양이 두 마리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공방자원봉사자 민회 씨가 걱정이되어 안절부절을 못합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결국 그 다음날 새끼들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고양이들이 왔다 갔겠지요. 그래서 제가 민회씨에게 그것이 자연생태계의 모습이라구 하면서, 인간은 그 질서를 깨고 모든 것, 그 이상의 것을 집어삼키며 자기 생명은 내어놓지 않고, 자연을 넙죽 넙죽 집어 삼키기만 하는 괴물로 변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인간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 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피조물이 살아가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자연생태 질서 앞에 겸손히 낮아져 가난하게, 내 생명 하나 내어 놓고, 다른 생명 받는 질서 앞에 생명의 존귀함을 느끼며 가난하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가난함을 내 가슴에 분홍글씨 처럼 새기며 사는 우리서로같이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