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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덕을 끼치는 은사를 사모하자(성령강림후세째주일, 2021년6월13일)

하늘기차 | 2021.06.13 13:51 | 조회 695

 

                   교회에 덕을 끼치는 은사를 사모하자

 

성령강림후세째주일(2021613)                                                                       고전14:1-12;23-25

     로마서는 1:17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것이라는 대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해서 오직 믿음!’인데, 당시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삶의 모든 것에대해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을 선언한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히브리민족을 이집트 400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었으며, 기나긴 역사를 통해 지금 까지 이스라엘의 삶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는 다른 민족과 달리 근본적으로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대한 죄의 각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존재의 근원이요, 삶의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인에게 율법은 바울이 이야기하였듯이 몽학선생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대해 오직 믿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고꾸라져 자신의 죄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죄없음을 인정 받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만남은 사도 바울의 그동안의 모든 가치, , 존재의 이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믿음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옵니다. 아직 율법이 없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법 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바쳐 명령과 약속 모두를 지켜냅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의 신앙은 구약 시대의 예언자 하박국에게로 이어져 국가폭력과 불법, 편법, 그리고 불순종과 퇴락의 시대에 망대 위에 올라 왜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느냐고 부르짓자 하나님은 합2:4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전통은 사도 바울에 의해 롬1:17으로 이어지고, 다시 종교 개혁 시대에 마틴 루터가 수도원에서의 검약, 절제, 그리고 라테라누스성당 계단에서의 고행으로도 죄 사함을 얻지 못하였으나, 오직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를 용서 받는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아, 성례와 행함을 중심으로 하는 카톨릭 신앙에대하여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를 외쳐,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오직 믿음!’이 고백되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뼈 속 깊이 자리잡은 인간의 죄에대해 이방인과 유대인, 온 인류의 죄에대해 고백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하지만, 내 안에 죄, 죽음의 힘을 보며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라고 탄식하며, 8장에서 성령을 요청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전이라 할 정도로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태동되는 과정을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그 중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매우 다양하게 임하였는데, 유난히 방언에대해 열광하여 사도 바울은 그 남용를 식히고자 고린도에 편지를 보냅니다. 방언의 진정한 의미는 소통인데, 오히려 상대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교회의 소통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실제 바벨탑 사건을 통해 불통이 되버린 인간들의 언어체계를 뛰어 넘는 성령의 역사가 오순절 다락방 방언사건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이 방언의 신비에 몰입을 하여 정말 소중한 은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넘치는데, 오히려 분쟁, 분파, 음욕, 성찬, 제물, 우상... 많은 문제들로 고린도교회가 시험해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은사 중에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역설합니다.

     청년시절 한국교회가 한창 부흥의 기운이 넘쳐날 때,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그래함 목사 초청 부흥집회가 열렸는데, 버스가 통제되어 주일날 주일학교교사들과 함께 종로에서부터 여의도 까지 걸어서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교회의 부흥의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엄청난 인파에 치여서 사람 구경 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청년 때에 기도의 열정이 타오를 때, 기도원에도 가고, 교회에서도 밤을 새며 교사회, 청년부 모임에서 항상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주십니다. 그럼에도 방언이 터지고, 이어서 통역이 이어지는 예배에 함께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때, , 때 하며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를 지르며, 집단적인 열광에 사로 잡혀 숨소리 거칠게 내는 작태들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한 번은 후암동 평광교회의 청소년부 전도사로 봉사하며 매 달 기도회를 인도할 때, 한 아이가 방언으로 찬양을 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웠습니다. 또 한 번은 우리 교회 옆에 이 전에 한국도자기 권사님의 집이 있었는데, 넝마주이라고 해서 상이군인들을 중심으로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성결교회의 어느 젊은 전도사 부부가 모시고 공동체를 시작하는데, 아마 마지막 재건대 분들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여러 교회와 신학교에서 와서 함께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나도 이웃 교회로서 같이 예배에 참석한 아주 소담한 예배였지만, 그 예배는 결코 초라하지 않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예배였습니다.

     예배 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순서에 없었는데 갑자기 한 학생이 일어나 방언으로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모르지만 또렷하게 한 마디 한 마디씩 찬찬히 말을 하는데, 그 예배의 자리가 갑자기 평화로 감싸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방언을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바로 다른 학생이 또 일어나서 그 방언을 통역하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받으시며, 이 재건대 공동체의 시작을 기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움과 평화가 그 예배 공간을 휘감았고, 예배를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는데, 교수님도 이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에 함께하여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예배에 참석한 모두에게 방언을 통해 확신케 하신 역사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을 휩쓸며 공산주의와 나치가 준동하던, 그리고 거의 근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뒤섞이던 틈 바구니에서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요한 에버하르트 아놀드에의해 힘겹게 태동이 되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한스를 후계자로 잘 못 선정하여 공동체가 획일적으로 전체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공동체 정신이 훼손되고 창시자의 둘째 아들인 하인리히 아놀드가 한스가 꾸민 모략으로 외국으로 추방되지만, 하인리히는 그 모든 것을 감래하며 공동체의 잘 못된 흐름에 대항하지 않고 조용히 공동체의 지시에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쫓아 남미로 가서 공동체를 새롭게 세웁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각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신비롭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의 핍박을 통해 교회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과 같습니다. 하인리히는 공동체를 훼손하고, 공동체 정신을 망가뜨린 한스를 증오하지 않고 용서하며 공동체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유지시켜 가는데, 결국 한스는 추방되고 하인리히 아놀드가 다시 공동체의 중심에 서게 되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캐나다, 호주, 동남아에, 최근 우리나라 태백에도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자리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작년에 416희망목공 아빠, 엄마들과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이 초창기의 내용이 꿈꾸는 인생이라는 책에 실려있습니다. 이 번 달에 개정판이 부서진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죄가 어떻게 일하며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지를 보여주는데, 그럴때에 성령은 싸우지 않습니다. 평화합니다. 내 안에 죄와 싸우지 말고, 그냥 죄는 죄대로 놓아두고, 어차피 우리는 죄와 같이 살아가는데, 그 죄라는 놈이 종종 불쑥불쑥 내 안에서 치구 올라와서 나를 힘들게 하고, 선한 일들을 그르치게도 하지만, 그 때 싸우려고 하면 집니다. 싸우지 말고 그냥 놓아두면 잠잠해집니다. 그럴때는 말을 아끼고, 마음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맡기면, 성령이 일하십니다. 성령의 미세한 움직임을 따르면 평화입니다. 성령이 선한 것들을 드러내어서 죄의 일들, 생각, 느낌, 죽음의 행보를 잠잠케 합니다. 선한일들이 자라나니까요. 지난 주에 모내기를 하기 위해 장로님께서 정자 위에 하나 남은 논을 경운기로 갈아 엎고 아동부 아이들과 모를 심었습니다. 아직 풀들이 나지 않은 상태인데, 풀들이 나기 시작하면 굉장합니다. 거짓말 보태서 흙은 안보이고 온통 새 파랗습니다. 그러면 이제 벼와 풀이 힘겨루기를 합니다. 그런데 벼가 어느 정도 올라오기 시작하면 풀이 벼를 이기지 못합니다. 종종 말씀 드리지만 농사는 벼 농사를 지어야지 풀 농사를 지으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사람이 풀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물을 튼실하게 잘 키워야 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죽음과 어두움의 힘이 생명과 빛과 공존하기 때문에 어두움과 죽음은 그대로 놓아두면 제 풀에 꺽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선함을 키워나가는 것인데, 이 일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요청하듯이 성령을 요청해야 합니다. 섬세한 성령의 내적 감동에 신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성경께서 인도하실 때 하던 일 내려놓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매여있어, 세상 가치에 붙들리면, 성령의 감동도 느끼지 못하고, 설사 느껴도 손 발이 움직여주지를 않습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기존 제자훈련에 매우 회의적인데, 그래서 훈련이라는 말이 적절한지 모르지만, 우리의 지속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성령의 섬세한 감동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민감함, 주께서 내려오라 할 때 삭캐오의 빨리내려옴 같은 지체하지 않는 순발력과 역동성에 익숙해야 만 합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 계획, 다툼, 혼돈, 어두움, 두려움, 불안을 원하시는 방식으로 잠재우십니다. 그리고 먼저 성령의 임재를 통해 우리는 새 힘을 얻고, 새로워지며 위로를 받으며, 무엇 보다 참 평화를 얻어 일상의 되어지는 일에 대한 확신, 확증을 받아야 기쁨으로 주어진 일을 감당하며, 열매 맺으며, 미쳐 우리가 알 수 없는 감추어진 일들을 아름답게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당건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필요할 때 마다 적합한 일꾼을 세워 외적인 건축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지으셨고 또한 우리 모두의 마음의 성전을 지으시며 교회의 덕을 세워나갑니다. 그래서 교회의 내적 성전을 아름답게 지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손 길을 느끼면 복입니다. 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을 비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되어지는 일을 통해 누려야 할 복을 맛 보는 우리서로같이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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