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이 마음(성령강림절후여덟째주일,2017년7월30일)

하늘기차 | 2017.07.30 21:44 | 조회 1071


                                  이 마음

2017730(성령강림절후여덟째주일)                                                                           2:1-11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향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접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유럽에 가서 처음 복음을 전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내적 갈등이 있고, 거짓 교사들에의해 복음이 왜곡된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믿음이 약해지거나 시험에 들 때 격려와 권면으로 새 힘을 얻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고, 피차 홀로 있지 않도록 성령의 감동으로 사귀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성도를 바라보고 자비를 배풀며 마음을 합쳐 하나가 되라 합니다. 마음을 합치라는 것은 한 가지 뜻을 내 세워 모두 그 뜻에 맞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인정하고 낫게 여겨야 하나가 됩니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교회의 하나됨은 조화로운 하나입니다. 각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도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기독교는 마음을 공부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왜 마음을 공부하는 줄 아시는지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세의 삶을 접고 마음 수련을 평생하며,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마음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푯대가 되어 마음 수련하지 않아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타 종교의 수련을 폄하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명상과 선을 통해 누리는 우리가 모르는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존중해야 합니다. 여하간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을 하는데, 정작 예수님은 자기를 부를 때, 인자, 즉 글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 하며,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마음 공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은이 사람을 보라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사자, 백말처럼 겉 사람을 볼 때 세례 요한은 속사람, 어린 양, 그것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을 보라 하였습니다. 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름이 한창입니다. 피서를 떠납니다. 피정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 머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인들과 함께 피정을 정기적으로 가지려고 하는데 교회에 계속 일거리가 생겨 피정 계획이 자꾸 뒤로 미뤄집니다. 피정 속에서 침묵기도를 합니다. 침묵기도는 보는 기도입니다. 무엇을 보나요?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주님이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보는 것입니다. 소위 관상기도입니다. 종종 관상기도를 마음 수련하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관상기도는 내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주님의 행동, 주님의 뜻이 내 삶 속에 어떻게 연관되지어지는 지를 보면서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은 주님 만, 또는 성경 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과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향심기도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마음의 잡다한 것을 다 내려 놓고 말씀을 향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향심기도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는 거짓된 자아의 모습에서 탈피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수련을 해야 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자아 안에 간직하게 되는데, 자아의 중심(center)에 있는 그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관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기도이지만 기도이기 이전에 수련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체가 내 마음이잖아요. 물론 성령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겠지만,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취향일 수도 있지만, 저는 하나님을 내 안에 있다고 제한시키면서 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찿아간다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수련과 노력을 통해 거짓자아를 탈피하자고 하는데, 침묵기도는 무슨 수련이나, 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쁜 재판관에게 찿아가는 과부의 모습이나, 밤에 친구에게 찿아가 계속 문을 두드려 음식을 구하는 모습들은 모두 끊임없이 구하는 것은 맞는데, 그 과정 속에서 자유로이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응답해주시며, 그렇게 내 안의 주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좀 위험한 발상이고, 편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할 때 자유로우십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어느 시간에 제한되어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공간, 기도, 성경공부, 고통받는 현장 등에 제한시키려 합니다. 스스로 종교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닌가 십습니다. 향심기도는 마치 도를 닦는, 선불교의 기도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 이 기도의 창시자인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키팅 신부가 당시 좀 더 기도를 일반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불교와 타 종교의 명상을 기도의 자세의 방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향심기도로 나아가면 예를들어 면벽을 한다든지, 잠을 자지 않는다든지, 가부좌를 풀지않고 기도하다 선종을 했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까 우려가 됩니다.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성서의 기도는 그렇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마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섬세한 감동을 깨닫고, 주시는 은혜와 인도를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마음에대해 이야기하는데, 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 정말 간단하네. .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전하며, 명확 판명한지 모릅니다. 7절은 자기를 비워 사람과 같이 되어 종의 모습을 취하였다고 하며, 8절은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이 순종이라는 말이 교회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명령인 것으로 착각하는데, 순종의 그 근본은 자기낮춤이고, 자기비움입니다. 이 마음이 우리 마음이기를 바라며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또 하나의 마음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9:3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내 안으로는 가난한 마음이요, 내 밖으로는 불쌍히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포도나무 가지 처럼 머물러 있으면 낮춤과 비움이 나의 마음으로 자리잡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어찌할까요? 기도는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기도드릴 상황에 촉발되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다니엘의 3친구가 그리하지 않을지라도라고 합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가능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잔을 주님이 받습니다. 기도는 바로 응답해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깊은 은혜의 자리이고, 생명이고, 기쁨의 자리입니다.

     23편은 어느 구절 하나 빼놓을 수 없지만, 최근에 6절에서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른다는 말에 마음이 갑니다. 이 말씀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매달려서가 아니라,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선함과 자비가 줄 곳 나를 따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주님은 늘 선언하십니다. 선함과 자비, 그것도 하나님의 선함과 자비입니다. 설마요? 안보이나요? 보일텐데. 그동안 무엇을 보고 살았길래,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하는 이 대전제 아래에서의 삶의 축복을 놓치고 살았나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여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부족하지 않은데, 현대인들은 무어 그리 많이 가지려고 하는지? 대중매체들이 그렇게 소리들을 냅니다. 에어컨이 있어야 시원한 여름이고, 냉장고가 있어야 풍요로운 식단을 유지하며. . . 좋은 자동차 등등 결핍증에 걸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주님은 부족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날 마다 새 힘을 주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왜 광야에서 시험에 들었을까요? 21:14에 보면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왜요? 길 만 보기 때문입니다. 길 뿐만 아니라 약속을 보아야하는데, 주님의 말씀인 약속은 안보고 길만 보입니다. 그 길은 약속을 놓아버리면 결코 나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길에서 약속은 보지 못하고 자꾸 길에서 오는 상황들, 조건들만 계속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 물이 떨어졌다, 춥다, 덥다, 질병, 맹수들, 적들... 교우 여러분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너무 힘이드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감당키 어렵습니다. 또 한참 가다 보면 지금 가는 길이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인지, 그래서 방향도, 목적도 희미해지고, 그러다 보면 주님의 도우심, 인도하심, 섭리와 경륜, 동행하심은 보이지 않고 길의 열악함만 보입니다. 그러니 점을 본다고 합니다. 참 내! 점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는 말씀을 보아야합니다.

     길을 가려면 마실 물을 위해 샘을 파야합니다. 먹지 못하는 오염된 물이 아니라 신선한 물을 위해 깨끗한 샘을 파야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마음에서 원망과 시비, 불평과 거짓과 싸움과 시기, 편리와 게으름의 샘을 팝니다. 마치 건수를 퍼서 마시는 것 같습니다. 맑고 깨끗한 물은 깊이 파야합니다. 말씀의 샘, 은혜의 샘, 언약의 샘,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샘을 팝시다. 그런데 애쓰고 수고한다고 샘이 나오나요? 샘은 이미 그 곳에 있어요. 좋은 샘을 볼 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맑은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보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온 힘을 다 쏟지만 물양이 적거나 오염되어 사용이 불가합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그러니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감사의, 평화의샘은 낮은 마음자리에서 솟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마음 공부하지 말고, 예수님이 어떻게 낮아지시나, 어떻게 긍휼을 베푸시는지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것입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7/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308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644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019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511 2005.09.02 16:30
855 회복의 여정에서 감사(추수감사주일, 2021년10월24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596 2021.10.24 07:01
854 그 무렵에(창조절일곱번째주일, 2021년10월17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471 2021.10.16 17:24
853 벽쪽으로 돌아서기(창조절여섯번째주일, 2021년10월1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592 2021.10.09 16:42
852 참 지식에 귀 기울이기(창조절네번째주일, 2021년9월2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43 2021.09.25 20:39
851 아침 마다 새로운 주님의 긍휼(창조절세번째주일, 2021년9월1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59 2021.09.18 15:24
850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창조절두번째주일, 2021년9월1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22 2021.09.11 15:13
849 기후난민 아브라함(창조절첫번째주일, 2021년9월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443 2021.09.05 06:52
848 누가 사마리아인인가?(성령강림후열네번째주일, 2021년8월2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21 2021.08.28 15:38
847 에바다!(성령강림후열세번째주일, 2021년8월2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471 2021.08.21 15:48
846 죽이지 않으시고, 죽으신 은혜(성령강림후열두번째주일, 2021년8월1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475 2021.08.14 15:00
845 잊지 말아야 할 전제(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일, 2021년8월8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527 2021.08.07 15:28
844 기뻐하며(성령강림후열번째주일, 2021년8월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504 2021.07.31 16:46
843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본다(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일, 2021년7월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70 2021.07.24 16:11
842 신앙은 ‘모두 다’이다(성령강림후여덟번째주일, 2021년7월18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24 2021.07.17 18:14
841 종말의 삶 : 기도, 감사, 기쁨(성령강림후일곱번째주일, 2021년7월1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27 2021.07.11 12:54
840 ‘구하고’, ‘찿다’가 아니라 ‘전하라’(성령강림후여섯번째주일, 2021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556 2021.07.04 12:51
839 가난으로부터 오는 윤리강령(성령강림후다섯번째주일, 2021년6월3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525 2021.06.27 13:02
838 주인의 기쁨에 초청받은 기쁨(성령강림네번째주일, 2021년6월2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570 2021.06.20 10:28
837 교회에 덕을 끼치는 은사를 사모하자(성령강림후세째주일, 2021년6월13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80 2021.06.13 13:51
836 내가 받은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성령강림후두번째주일, 2021년6월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18 2021.06.05 1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