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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성령강림후두번째주일, 2017년6월18일)

하늘기차 | 2017.06.18 16:22 | 조회 419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2017618(성령강림후두번째주일)                                                                       16:7~15

     3주전 헤른후트묵상 저녁예배시간에 오늘 말씀 요16장의 3가지 깨우침에대한 말씀을 나누었는데, 지난 성령강림주일 저녁 예배 때에도 같은 본문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번 주일에도 자꾸 같은 본문이 어른 거려 3번째로 이 말씀을 교회 앞에 내어놓습니다. 오늘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인데, 15장 포도나무 비유, 17장 영광과 승리의 기도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면 성령이 오셔서 죄에대하여, 의에대하여, 그리고 심판에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친다고 합니다. 15장 포도나무비유의 머물러 있으라는 주제의 말씀 이후, 후반부에서 16장에 이르는 말씀에서는 이 세상에 남아있을 제자들을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주님의 연민이 17장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세상에 남아있을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영광과 승리의 기도로 마무리 합니다.

     그런데 15, 16장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세상을 찬찬히 보면, 15:8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세상이 나를 먼저 미워하기 때문이며, 25에서는 그들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하는데, 이 땅에 남아있을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은 역설적으로 회당이요, 율법이고, 예수를 법정에 세운 사람들은 당대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하는 종교인들이었고, 예수님은 그들에대해 세상이라 하면서 16:8에서 성령께서 세상의 잘못을 깨우칠 것이라고 합니다.

   왜 회당이 세상이 되어버렸나요?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빼어내어 출19:4에 보면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부름받은 족속, 왕같은 제사장인데 왜 세상과 뒤섞이고 아니 세상의 코어가 되었을까요? 세상은 세상일을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체우기 위해 무엇이든 합니다. 그런데 회당이 세상일의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13:10-17에서 한 번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허리가 굽은 18년된 환자를 고쳤는데, 회당장이 분개하여 사람들에게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회당장을 가리키며 너희!’라고 하면서, 바로 오늘 말씀의 세상을 뜻하는 그 너희에대해 위선자들아!’라고 하면서 안식일에 소나 양은 끌어다가 물을 먹이면서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고통받는 여인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진짜 문제는 그들이 율법을 통해 회당과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기득권을 누려왔는데, 예수님이 그 기득권을 건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3절에서 그들이 아버지도 아들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아버지의 말씀을 자신들의 욕망을 체우기 위해 문자그대로 해석하며 자신들의 것을 누리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교우여러분! 성령의 내적 감동이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은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굽은체로 살다가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적을 문자적으로만 보지말고 그 기적의 의미를 꼭 살펴보아야 합니다. 의미를 무시하고 글자그대로 보려는 마음에는 성경의 가치와, 뜻 보다는 자기의 가치, 경험, 생각을 놓지 않으려는 세상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2은 그 증상이 더 발전하여 너희를 회당에서 내 쫓고 죽이면서 그러한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따라야합니다. 18년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안타까운 영혼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오늘 남북의 허리가 두 동강이가 난체로 70여년이 지난 이 나라, 이 민족의 왜곡된 역사, 그로인해 고통받는 남과 북의 지난한 삶을 주님은 어떻게 보실까?하고 병 고침의 의미를 헤아려 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보혜사, 즉 변호인, 돕는자, 지혜로운, 진리의 영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세상의 3가지 잘못을 깨우칠 것이라합니다.

    첫째 죄에대해서 깨우칠 것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 세상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게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 이야기이며, 우리 교회 이야기이며 나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 앞에 모두 죄인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죄라 여기지 않습니다. 2:37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러분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았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시어 그리스도가 되게하셨다고 하자,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말합니다. 2천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왜 오늘 이 시대에 우리를 죄인으로 보게 하나요? 성령께서 깨우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는 나와 인류의 죄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깨닫는 것이지, 인간의 지식체계나 종교나, 경험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2째는 의에대하여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자기의로움과 율법의 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의에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의인입니다. 비록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는 인륜을 역행한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의인입니다. 4:25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는 부활의 의입니다.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죽음으로 끝나면 그저 생각이고, 철학이고 종교이지만, 하나님의 나를 인정하는 의는,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움을 깨우쳐주십니다.

     3째는 이 세상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받아들인 죽음으로 사탄의 정체가 드러났고, 더 이상 사탄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무장해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이 희망이 단지 미래에 올 심판이요, 회복이라 한다면 이것은 바로 종교로 추락해 세상이 되어버립니다. 이 심판은 미래에서 역으로 거슬러 여기 지금 모든 세상의 가치, 인류 문명이 만든 인류 총 재화가 0이라는 심판의 가치로 지금 이 자본에 물든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심판에대한 것인데, 역시 성령의 감동, 깨우침에서 비롯됩니다.

     -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세상에 죄는 드러나지 못하였을 것입니.

     - 십자가 후의 부활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의는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실 재림이 없다면 심판도 없을 것입니다.

     글쎄다 모임에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회원 중에 한 분이 제가 그 소설에서 느낀 허무함에대해 이야기 하자 허무에대해 2가지로 이야기하면서 (저는 절대적, 그리고 실존적 허무로 이해 했는데)허무를 막무가네로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하였는데, 막무가네가 아니고 성서가 이야기하는 허무를 말하였거든요. 성경은 세상을 아름답고, 선하다고 말하지만 인간이 죄로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허무를 이야기 합니다. 이 허무는 2가지 철학적 입장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근본적으로 말하는 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로부터 옵니다. 성서가 말하는 허무이지요. 한편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끊임없이 2원론에 묶인 인간의 존재에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생쥐의 싸움, 지하와 하늘, 압축기의 파란, 빨간 단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죄된 인간의 일면을 봅니다. 이 모습은 이스라엘이 홍해 와 바로의 군대 사이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러다가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니 허무합니다. 주인공 한탸에게서 그것을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성경은 그 사건에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는지를 보라'고 하지요. 이 해방은 이스라엘의 혈관 속에 자손대대로 기독교인에게 까지 하나님 신앙의 근본이되었습니다. 성서는 십자가 앞에 인류의 모든 재화와 문명을 가치 0라고 봅니다. 우리 삶의 총화의 허무를 봅니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한탸의 죽음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모두가 외면한, 싫어하는, 특히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등을 돌린 치욕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한탸는 프로메테우스로 대변되는 그리이스 신화의 영웅적인 죽음을 죽습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장열하기 까지는 아니어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 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자기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죽음이지요. 한탸의 죽음은 읽는 이로하여금 연민을 불러 일으킵니다. 예수의 죽음은 모두가 등을 돌리며 저주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봅니다. p 44에서 "녹색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하는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라는 대사에서 인간의 한계를, 그 쉴수 없는 생존경쟁의 싸움을 보는데, 작가도 중간에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저는 2원론적인 논리, 삶과 죽음, 선과 악에 묶인 인간의 한계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소설은 청년 때의 연인인 일론카와 만날 때 일론카가 높이 연을 날리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데, 연은 한탸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염원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탸가 일론카의 연을 바라보는 마지막의 모습에서 저는 문학의 역활이 거기 까지임을 봅니다. 그런데 성서는 한탸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멀리 좋은 세상을 연을 바라보며 투사하는 장면에대해 성경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삶의 한 복판에 마지막 심판의 선함이 거꾸로 거슬러 찿아와 생명의 삶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깨우치십니다.

     오늘 말씀에 회당에대해 예수님은 세상이라 합니다. 왜 회당이, 예루살렘이 세상의 코어가 되었나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은 것은 일반 세상이 아니라 성전과 회당이었습니다. 참 무섭지 않나요? 지금 여기에서 교회 역시 회당과 예루살렘 성전 같은 일을 열심을 내어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우리일 하면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 않는지요? 그렇지않다는 자기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나요? 만약 자기 정체성이 없다면 우리는 기독인이라 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내적 감동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깨우치심이라 말씀합니다. 성령의 감동에 섬세하게 익숙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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