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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성령강림후첫번째주일,2017년 6월 11일)

하늘기차 | 2017.06.11 15:11 | 조회 443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2017611(성령강림후첫번째주일)                                                                 9:24~25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바리새인들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그들에게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기는 보는데, 율법을 기준하여 사람을 죄인으로 봅니다.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에대해 예수님은 보지만 보는 것이 아니며, 못 보는대도 본다고 하니 오히려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못보는 것일까요? 존재의 근원에 닿아있는, 그래서 그 끝에 하나님과 생명으로 이어져 있는 한 영혼, 한 영혼, 한 존재, 한 피조물 등, 온갖 피조물의 존재의 가치,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질서에 닿아있는 그 생명의 신비를 못보면서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니 보지 못한다고 하고, 오히려 너희가 죄인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판단을 멈추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여러분 자꾸 사람을 평가하고, 그래서 불신하고, 미워지고, ‘왜 이 것 밖에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 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복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본다는 것은, 끊임없이 세상에 집착하며 세상을 평가하고, 세상이 나를 평가하며, 세상 기준으로 살다가, 이제 주님이 보인다면 그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눈뜬사람은 예수님에의해 보게되었다고 합니다. 본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나요? 눈에 보이는 것, 생각, 의식, 철학, 사상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시며, 시간과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조화롭게 하시며 회복시키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삭캐오가 세상의 비웃음, 왕따를 벗어나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봅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동네 사람들의 수근거림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로마의 권력에 붙들린 백부장이 권력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무엇을 요구하기 보다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기도는 나무 뿌리 뽑으며, 전심을 다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으려고 때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나를 보고 계시는지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감람산에서 밤이 맞도록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와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때,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전투력을 강화하고, 방어벽을 치고, 어느 곳으로 가야 홍해를 건널 수 있을 지를 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라고 합니다. 기도는 지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에 눈뜬자는 세상을, 성도를, 교회를, 이웃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봅니다. 보는 것이 은혜요, 구원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주님의 평화, 세상이 줄 수 없는 십자가에서부터 흘러넘쳐 오는 평화가 옵니다. 이것이 기도에 머무는 기도자의 모습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처음에 손가락, 팔 다리, 그 다음에 눈, 오장육부가 하나씩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 뱃 속에서 다 온전하게 생겨서 태어납니다. 갓난 아기는 그 자체로 완전체입니다. 그러나 완성은 아닙니다. 이제 그 완전하게 태어난 존재가 자라며,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성숙해가기 위해서 수양하거나,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태어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이지, 무엇을 해야만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전하거든요. 그러나 욕망에 붙들린 사람은 문명과 물질의 눈꺼풀이 씌워져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니, 내적 존재의 근원에 닿아 있는, 즉 하나님과 하나인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근원이어서 무엇을 하라, 말라 하기 보다는, 우리가 세상의 일로 힘들어하며, 그 짐에 눌려 예수님을 주님으로 보지 못하지만 너는 세상의 빛이다’, ‘가난한자여! 너는 복이있다고 우리가 생명의 근원자임을 선언하십니다. 또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거나, 받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마지막 식사를 할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는데, 베드로는 극구 사양을 하지만,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도, 그리고 잘하거나 못하거나 우리와 상관하기를 좋아하십니다. 함께 있다고 하는 그 자체를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계획과 섭리와 하나이시며, 포도나무이야기를 통해 나무와 가지가 하나이듯이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신이신 성령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이 환히 드러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하는데, 우리의 욕망이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고 하지 못하게 합니다.

     처음자리 동산에 온갖 나무와 꽃들이 자기발현을 합니다. 꽃 하나 하나 마다 내가 제일이야 하듯이 피어납니다. 이것이 생명의 모습입니다. 나도 똑같고, 주님도 그렇습니다. 내가 제일입니다. 생명은 그렇게 자기발현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현현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내가 나 하나 밖에 없으니 항상 1등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2등은 없습니다. 모두 1등입니다. 지금은 하얀점박이 섬초롱꽃과 보라색 자주달게비꽃이 곳곳에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개체 수가 이전 보다 더 늘어 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몽우리일 때는 사람들이 감추어져 있어서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주달게비는 이미 땅 속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마지막 단계를 보는 것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종말의 때에 이 세상에 다시 올 때도 이 꽃들의 피어난 모습처럼 세상이 활짝 만개한 모습을 보는 것 같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현상, 발현한 것들은 우리가 보지 못해서 그렇지 이미 우리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과도 그 과일 안에 사과 모습이 그대로 들어있잖아요. 그 씨앗이 자라서 결국 그 모습을 그대로 같지만, 다르게 발현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함이 성숙하기 위해서 수양을 쌓거나,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전하거든요.

     아이들이 이 땅에 태어날 때 손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눈이 생기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되어 세상에 태어납니다. 우리 교회의 아기들 우리 지효, 기손이, 승민이, , . 청소년들, 청년들 다 완전하잖아요. 그렇게 생명으로 태어나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가르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완전하여 자신이 어떤 존재로 나아가는지 본능적으로 알며, 하나님이 그 한 존재에게 주신 그 모습으로 꽃을 피울 것입니다. 자기 발현, 즉 내 안에 있는 나를 드러내는 것인데, 사랑을 먹으며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지 말고 완전한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그리고 내 판단과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며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고, 보고,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선을 창조하셨지만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선과 악이 함께 간다고 합니다. 동전의 양면 같다거나, 또는 쌍둥이라고도 하고, 죄를 품고 간다고도 합니다. 모두 폼나는 말이기는 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7:20에서 죄에대하여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라고 합니다. 내가 내 죄를 품고 간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어느 기도와 묵상과 깨우침과 힘으로도 죄를 곁에 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어떻게 할 수도, 이길 수도, 물리칠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 속의 죄를 품지 못해 탄식합니다. 죄는 내 안에 자리를 잡으려 하지, 다시말해 내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려하지, 2등으로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으며, 내가 품고 함께 갈 만큼 만만하지 않습니다. 7:24입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 

                            습니까?” 왜 사도 바울이 탄식하나요?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에 달려 죽으셔야만 하나요?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따라 성숙하여,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빠스카(Pascha)’라고 하는데, ‘넘어가다’, ‘지나가다라는 의미로 출애굽기의 유월절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난 것을 치시겠다는 마지막재앙 때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히브리백성들의 집을 넘어가 그 처음난 것이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내 안의 바로에게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상처와 고통, 아픔과 어두움입니다. 우리가 죄는 품지 못하지만, 죄의 결과는 우리가 품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죄를 어찌할까요? 죄는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이야기하였듯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도사연하며 품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하려고 한다고 해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지요? 삭캐오가 그랬듯이, 우물가의 여인이 그랬듯이, 십자가의 한 죄인이 그랬듯이, 로마의 백부장이 그랬듯이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죄에서, 죄의 책감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엡3:9,10에서 교회가 이 신비를 품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

                                 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

                                 를 알리시려는 것이러고 합니다. 이 비밀을 교회를 통해 알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교회에대해 말들이 많은데, 교회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말로, 철학으로, 논리로 합리성을 들이대며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지, 성령께서 어떻게 교회를 인도하며, 보호하시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때에 따라 지혜와 능력으로, 합당한 때에 감동주시는 감동을 섬세하게 느끼며 맛보며 기쁨의 열매 맺으며 살아가는 고기교회 성도 모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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