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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죄에대해 죽고, 하나님 위하여 예수 안에서 살기(부활절네번째주, 2017년5월7일)

하늘기차 | 2017.05.07 15:27 | 조회 679


           부활 : 죄에대해 죽고, 하나님 위하여 예수 안에서 살기

201757(부활절네번째주)                                                                              6:3-11

   3절에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라고 합니다. ‘하나가 됨이라는 말이 헬라어 원어로는 예수 안으로 완전히 잠긴다는 뜻입니다. 침례교 같은 교회는 물속에 완전히 들어 갔다 나오는 세례를 베푸는데, 물속에 잠겼다 나온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완전히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완전히 들어 간다는 뜻인데, 첫째는 죄에대하여, 둘 째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따르는 죽음입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는, 즉 예수 안에 완전히 잠기기 전에는 자기 주관적인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그러한 자기 중심의 사람은 죽고 더 이상 인간의 세속적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예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5절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부활에 있어서도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죄에대한 죽음을 죽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물으면 거의 윤리적으로 갑니다. 윤리적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 곧 바로 우리는 그 명제에 매이게됩니다. 실천에대해 의무감을 갖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중에 십자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도, 윤리도 책임도 아니고,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 안에 머무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영적인 해석인 알레고리를 포함해서 상징이요, 은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례를 받는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단적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안죽잖아요. 창세기에서도 정녕 죽으리라 하였는데, 아담과 하와가 살아있거든요. 창세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 멀어짐이구요, 여기서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말미암은 죽음, 즉 욕망을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을 다시 잇는 것인데,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시고 어떻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가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라고 하면 이게 어려워 집니다. 윤리가 되고, 의무가 되고 책임이 됩니다. 그런데 11절은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한다면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포도나무처럼 말입니다. 포도는 그 줄기가 노력하고 힘써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런데 잘 붙어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습게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정말 넓고, 높고, 깊은 우리 인간의 심성을 꽤뚫어 보는 하늘의 지혜가 거기에 있습니다.

    부활은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요? 죽어야 사는 삶입니다. 어떤 죽음인가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죄에대한,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는 죽음이며, 하나님을 위해 예수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일상의 삶이 따로 있고, 부활의 삶이 따로 있는 것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예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핵그련 카톡에 성주에 계신 어느 분이 S.O.S를 보냈습니다. 오늘 저녁에 사드장비가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오늘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사 제쳐놓고 성주로 내려 갔습니다. 늘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을 만나 반가왔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낮에 잠시 거창에 살고 계시는 전 거창고교교장선생님인 전성은 선생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사모님이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점심을 같이 하면서 집사람이 매우 안좋은데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기네 둘이는 이야기 다 끝났다는 거예요. 죽음을 이야기 하는데, 그리 아쉬움도, 여운도 없드라구요. 죽음이 꼭 이웃 친구 같더라구요. 두 분에게는 죽음이 삶이고, 삶이 죽음이었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죽음과 다시 사는 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지요. 사모님에게 우리 이 땅에서 잘 살았지. 후회없지라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것 만 남았고, 먼저 가는 것이야 하더라구요. 사모님도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그 날 저녁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같이 이야기하는 중에 교장 선생님이 안목사 기독교 교육의 핵심이 무언지, 알아?하더라구요. ‘글쎄요했더니. 사람이 사람을 교육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에서 시작이야 하더라구요. 제가 부활은 사는 것이라 하였잖아요. 평생 교육자로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안에서 살아가, 사모님을 그렇게 먼저 보내고, 자신도 그렇게 간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은 없어요. 그날도 다 찌그러진 경차를 털털거리며 몰고 어느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메밀국수 한 그릇씩 먹고 이야기 나누다가 헤어져서 저는 다시 성주로 갔어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세우시는 곁에 머물며 그 세움에 동참하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기독인에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10, 11절에서 부활의 삶이라는 것이 죄에대해 단 번에 죽고 하나님 위하여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부활은 변화다. 부활은 새로워지는 것이다. ‘부활은 생명이다라고 하잖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요? 매우 추상적입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살고 죽는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그 당시가 어느 시대인가요? 로마 제국에의해 전세계가 장악되어 있었고, 유대교의 한 분파인 것 같은데,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된 작은 교회공동체는 로마황제를 주라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유대 나사렛에서 살던 젊은 예수를 라고 하니, 로마와 기득권으로서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였지만, 그 전파되어가는 속도가 만만치 않은 것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핍박이 있었는지는, 카타콤의 길이 만 보아도 당시 로마제국 아래에서 십자가의 부활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기독인에게 편지할 때도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이야기하는데 추상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서나 다른 바울 서신 보다 훨신 더 추상적이고 어렵습니다. 당시 시대적인 정황 속에서 그 모든 억압을 요리조리 잘 피해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전성은 교장 선생님과 제가 합의점에 다다른 것은 겉으로는 믿음으로의 구원, 개인적인 구원으로만 비추어지는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 속에 면면이 흐르는 흐름은 평화라고 하는데 합의하여 얼마나 마음이 흐믓했는지 몰랐어요.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는 아예 유대인들 외에는 그 기록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기록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로마는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로마제국이 망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을 사도 요한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같고 배반하거나, 배교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켜, 상을 받으라고 거듭 강조하며 일곱 교회에 편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살려면 받은 말씀을 오늘 이 시대에 잘 풀어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은 삶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예수 안에서 머물러 있는 삶입니다. 과연 이런 삶은 어떤 삶일까요? 우리는 부활은 변화요, 새로워짐이라 들어왔습니다. 변화라 할 때, 변화산의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허겁하며 어쩔줄 모르는 그러한 변화인가요? 새로워진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의 유대교에서 예수믿음으로의 180도의 변화를 전하기만 하나요? 사실 나 스스로는 그렇게 변화도, 새로움도 없으면서 여전히 베드로와 도마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인간적인 결심과 결단 만을 수 없이 반복하며 폐배주의자로 살아가야 하나요?

    죄에대해 죽고, 하나님 위하여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은 가치의 전환, 가치의 변화, 그래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는 것이잖아요. 일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아버지 뜻에 따르는 죽음을 통해 부활이 우리 일상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어떻게 예수의 부활이 제자들의 부활이 되기 시작하였나요? 다락방에 숨어 자기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예수에게 마음을 닫아버린 제자들이 에이레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지어다라는 말 한 마디에 서로가 서로의 불신, 반목, 두려움, 좌절을 떨쳐버리고, 에이레네 뜻 그대로 바라보며 공감하고 마음을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지난 성주에서 원불교, 카톡릭, 개신교, 시민단체, 원주민들이 연대하는 자리에 함께하였습니다. 부활이지요. 사는 것이니까요.

    10년 전이었을 것입니다. 한겨레 박용현기자의 진보주의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칼럼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 . .미국대학 연수 중에, 학내 신문에 한 학생이 당신은 진보주의자로 살 돈이 있소?’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는데, 어느 늦은 밤, 저녁 거른 배를 움켜쥐고 집에 가던 세라는 뭘 먹을지 고민스럽다. 주머니에 든 건 달랑 2달러. 좋은 식당은 커녕 맥도널드도 부담스런 상황에서 타코벨이 눈에 띈다. 값싸고 맛있는 멕시컨 패스트푸드점. 달려가 막 주문을 하다 말고 세라는 발길을 돌린다. 너무 부끄러워 눈물이 쏙 빠질 지경이다. 타코벨에서 쓰는 토마토는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한 결과물. 진보주의자라면 먹어선 안 된다. 세라는 집에 돌아와 차가운 빵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고 잠자리에 든다. 이러다간 노동 착취의 대명사 월마트의 저가 유혹을 견디기도 열라힘들 것 같다고 푸념하며.

   돈 없이는 진보적 가치를 지키며 살기 힘들어졌다는 글의 논지도 흥미로웠지만, 글쓴이가 타코벨 앞에서 그토록 진지한 신독의 순간을 가졌다는 점이, 한밤중 진보와 일상의 그 만남이, 낯설게 머리를 통 쳤던 것이다. 그런 뒤 살펴보니, 학교 곳곳에서 일상적인 진보의 움직임은 작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날은 사형제 폐지 소모임이, 어느날은 정부의 첨단 감시체제 비판 세미나가, 어느날은 빈곤 어린이 지원 행사가, 어느날은 인종차별 반대 모임이, 그리고 어느날은 게이, 나는 괜찮아시위가. 진보입네 하는 이들에겐 타코벨이나 월마트 거부는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런 일상적 모색들이 오래 쌓인 덕일 게다. 교정엔 전동 휠체어를 탄 학생들이 불편 모르고 쌩쌩 달렸고, 로스쿨엔 장애인법·인권법 강의들이 수두룩했고, 어린이 보호단체엔 검·경 담당부서까지 아예 이사와 공조체제를 갖췄고, 인구 5만 남짓한 도시에 으리으리한 여성 쉼터가 지어졌고. 그 보수적이라는 미국 중서부의 소도시에서도 진보의 퇴적물들은 충분히 많았다. . .”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에 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안에서 머물러 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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