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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부활 (부활절두번째주,2017년4월23일)

하늘기차 | 2017.04.23 16:05 | 조회 575

 

                          십자가의 부활

2017423(부활절두번째주)                                                                                6:3-11

   올해 부활주일은 세월호 참사와 같은 날 이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아무런 구조도 안하고, 증거를 인멸하고, 진실규명을 그렇게 집요하게 방해하던 박근혜정권의 수장인 박근혜님은 세월호가 올라오는날 구속되었습니다. 우연치고는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년전 416일 수요일 아마도 도서관을 증축하면서, 점심을 교회 앞 식당에서 하는 중에 거대한 여객선이 물에 잠겨있는 것을 안타까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기간은 고난주간이었고, 다음 주일은 부할주일이었습니다. 저는 떼제찬양예배를 부활주일에 드렸는줄 알았는데, 떼제찬양 예배는 2번째 부활주일에 드렸고, 부활주일에는 눈물을 닦아주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드라구요. 그 다음 주일에는 도저히 말씀을 전하지 못하여 떼제찬양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부활주일 설교를 하였지 하며 3년 전 설교노트를 보니까, 그 때 본문이 계5:6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2010년 역시 4대강이 국가폭력에의해 죽어가던 사순절기에 양수리 개신교금식기도처에서 묵상기도 드리던 중에 주신 말씀이었는데, 돌아보면 이 본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견디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2011년에 구제역 살처분이 행해질 때에, 고기교회와 명동, 강남, 들꽃 향린 3교회가 함께 300여 가축을 생매장한 이천에 내려가 지역환경단체와 문인들과 더불어 고기교회강령탈춤모임의 춤사위를 바탕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참회의 예배를 드린 기억이 납니다. 벌써 6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죽음의 일들이 온 곳에 퍼져있습니다. 이 죽음의 흐름 속에서 제가 생명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계5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받으시는 어린양이 죽임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계5장은 그 화려한, 대관식의 엄위한 영광의 무대에 죽임당한 어린 양의 형상을 이야기할까요?

   결국 세월호가 3년 만에 뭍으로 올라왔는데, 세월호참사 가족 중에 기독인들도 있습니다. 그 때 그 참사 속에 기독교 가족들은 부활주일을 맞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부활이신 하나님이 왜 아이들을 부활시키지 그대로 죽음으로 수장시키셨어! 왜 부활이 절실한 이 때에 부활이 아니야!” 하였습니다. 이 죽음, 못 다 핀 죽음. 그런데 세월호 뿐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이러한 억울한,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인류의 역사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태어나 보지도 못한 죽음, 한 번도 건강한 삶을 누리지 못한 죽음, 시리아의 폭격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 우리민족의 아픔인 보도연맹, 4.3제주항쟁, 근래에 4대강, 쌍룡자동차의 그 많은 노동자들의 자살, 후쿠시마, 체르노빌, 멀리는 아우슈비츠, , , 더 이 전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당시 로마제국 아래에서의 참담한 죽음, 지금도 여전히 자본과 제국의 폭력 앞에 무너지는 연한 순 같은, 어린양 같은 이들의 죽음, , , 이 땅의 죽음을 풀어내지 못한다면 생명, 정의, 평화, 자유, 더 나아가 부활은 부활일 수 없습니다. 인류 문명이 죽음을 풀어내지 못하면 역사발전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문명, 인간의 지혜로 이 억울한,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풀어낼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 속에, 그리고 여전히 오늘 이 시대에 죽음의 힘이, 권세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러나 의외로 그렇게 죽음을 불러 일으키며, 죽음을 빌미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떨게 하는 거짓과 허구를 이길 힘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온 다는 것을 계시록은 짧은 한 마디

                                  ‘그 어린양은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로 표합니다. 바로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인류, 모든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그냥 육신의 죽음,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십자가의 죽음이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입니다.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의 강남순 교수는 부활의 승리주의를 우려하면서, 공생애 3년을 함께했던 제자들과 예수님의 죽음을 지킨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부활한 신(예수)"은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TV 뉴스, 신문들, 또는 SNS 등에서 대서특필되는 '승리자' 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예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차린 것은, 예수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그 삶의 나눔의 과정속에서 비로소 그 부활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좌절과 절망 속에서 서로 부끄러워 얼굴도 쳐다 보지 못하던 마가의 다락방 제자들에게 찿아와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우리 번역은 평화가 있기를이지만, 헬라어 에이레네(είρήνη)함께묶다’, ‘합치다’, ‘공감하다라는 뜻입니다. ‘연대하다라는 말로 확대해석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에이레네라고 하자, 그제서야 제자들은 서로를 바라 보며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며, 마음을 합하여 주님을 바라 보며 부활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첫 부활은 그렇게 조심스럽게, 찬찬히 찿아왔습니다.

    엊그제 어떤분이 왜 예수님은 부활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만 보여주었을까?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여주면 금방 모두 믿을텐데 하며, 부활에대한 의구심을 보이길레, 부활은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였지만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부활인가요? 그냥 죽었다 살아난 것인데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떼제 공동체의 신한열수사는 3년전 부활주일을 앞 두고 416참사가 일어났을 때 부활이 죽은 목숨이 되돌아오는 소생이 아니고 전혀 다른 삶의 시작이듯이, 한국도 이전의 가치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이 되기를, 두손 모아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2:11에 보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우리도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롬6:4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

                     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 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5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

                    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7절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

                    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 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

                    력에서 해방되었습니 다이 로마서 말씀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음입니다. 주님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합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된다는 말씀 많이 하는데, 그 하나됨의 결정적인 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나됨, 연합이고, 그리고 그 죽음을 따라 부활인 것입니다. 성경은 자연적인 죽음 후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주신 은혜대로, 특히 부활의 은혜로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선하며, 아름답고, 희망입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은혜를 나누려 할 때는 다릅니다. 받은 것은 승리이지만, 나누어줄 때는 그 승리에 감추어져있는 십자가가 부활을 증언하는 성도의 삶에 묻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승리주의가 됩니다. 시청광장에서 부활주일에 전교회의 성도들이 부활축하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기득권자의 승리주의에 취하지 않으려면, 십자가의 죽음을 교회와 성도 스스로 각인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의 몫입니다. 십자가라고 한다면, 낮아짐, 죽기 까지 낮아짐이요, 아버지 뜻에대한 죽기 까지의 순종입니다. 인간의 한계의 끝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끝 자리, 죽음에 둘러쌓여 위태롭게 서있는 사람들과 피조물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고통, 그 아픔, 그 절망, 어두움 속에 계십니다. 바로 그 곳에 계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자칫 거짓 부활, 부활아닌 부활, 욕망의, 이기적인, 승리주의 부활에 도취될 수 있습니다고후4:10-11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

                                 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부활입니다. 제자들이 여전히 죽음이었을 때, 주님이 그 죽음에 붙들린 사람들에게 찿아와 부활을 보이셨습니다. 부활을 보여주셨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여주셨나요. 죽음의 흔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손과 발의 못자국, 그리고 허리의 창자국, 즉 십자가의 흔적을 손수 만지게 하셨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서 부터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추모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선포하거나 증거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사도 바울은 고전 11:26에서 성찬에대해 말할 때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

                         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궂이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선포할까요? 기독교는 기억하는 종교입니다. 잊지말라 하는 종교입니다. 왜 우리 고기교회는 416가족들의 곁에 다가가 그 죽음을 기억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죽음과 아픔과 고통 가운데에도 다가 가야만 할까요? 십자가의 부할이 아니면 바로 우상숭배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종교적 성취감에 매몰될 것입니다. 어떤 기도도, 어떤 헌금과 예배와 봉사도 함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에서부터임을 잊지않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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