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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신비 이 땅에서 살아내기(창조절열한번째주일, 2021년11월14일)

하늘기차 | 2021.11.14 13:34 | 조회 551


                 부활의 신비 이 땅에서 살아내기

창조절열한번째주일                                                                                                            고후5:1-10

     지난 주에 이스라엘이 포로귀한 후에 다시 하나님을 떠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교회공동체는 이 전통을 이어 받아 지금 우리의 현 시국, 그리고 기후위기 속에서도, 내가 처한 곤고한 삶 속에서도, 신뢰를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서도 희망합니다. 이 희망의 근원은 어디에서 부터일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 탄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밝혀지면 바로 죽음인 시대였습니다. 또한 교회 내적으로 분파가 생기고, 영지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 등 무엇보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지나쳐 열광주의에 빠져 교회가 종교집단이 되어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 합니다. 교회 안팍으로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악한 권세가 교회를 짓누릅니다. 그 고통을 4:8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싶어하였을까요?

     그런데 3절에서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벗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제 육은 죽고 영은 살아 천국으로 가나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몸은 죽고, 영은 살아서 천국가는 것은 2원론적인 아주 위험한 영지주의적인, 종교적인 발상입니다. 교회가 종교화되어 이런 2원론적인 이념에 메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영과 육이 다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잔을 피하기 원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육신은 단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잠시 머무는 곳이고, 이제 이 땅에서의 삶을 다 하면 몸을 벗고 영이 하늘나라로 간다는 육과 세상을 천시하는 이단적인, 이분화 하는, 다시 말하면 헬라 철학이 그 바탕입니다. 그러나 헤브라이즘, 구약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 신앙은 이원론적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장막을 벗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어렵고 힘들지만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는 것은 덧입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죽음이 생명이라는 구원의 신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부활입니다. 고전15장 부활장에서 사도 바울은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다고 합니다. 이 진리를 성령이 보증합니다. 성령은 보증하는 영입니다. 영이 내 마음을 감동케 하여 세상의 논리나 가치 속에서 연연하지 않고 신비로운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몸을 벗고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부활의 신령한 몸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육도 영도 아닌 신비한 부활체입니다. 바울은 이 부활을 고전15장에서 구구절절 고백합니다. 온 우주의 피조물에게는 각 각의 영광이 있습니다. 새와 짐승, 물고기, 하늘과 태양, 별들, 발뿌리에 부딪히는 작은 돌멩이 하나, 흘러가는 시냇물, 나 자신 등 . . . 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주님 다시 오실 때 부활의 신령한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합니다. 창조주의 뜻 대로 각기 다른 자기 영광, 잃어버리고, 무너지고, 감추어져 있는, 존재했던, 존재하는, 앞으로 존재할 모든 영광을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온 피조물 가운데서 봅니다. 신령한 영적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그 부활의 영광이 지금, 여기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통상 종말을 이야기 할라치면 곧 주님이 다시 오실텐데 하며 미래를 향합니다. 그러나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시간을 거꾸로 봅니다. 주님 다시 오심의 소망의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가 아니라, 미래에서 지금 현재로 찿아옵니다.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벗었지만, 덧 입는 신령한 부활을 소망하는 삶이란 이 세상의 삶의 판단과 기준, 가치를 0으로 보는 삶이 아닐까요? 잘 안되지요. 그래도 정체와 방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값 싼 위로에 눈 길 주지말고, 신령한 부활의 몸을 소망하는 삶을 체험하고, 자극을 받고 동기를 부여 받아야 합니다.

     지난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한 그 해 서강대에서 드려진 미사에 초청받은 예은 아빠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아무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이 잊혀지는게 두렵다고 하면서,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그리고 10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공감해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다락방에 숨은 제자들에게 찾아왔을 때,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책감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머리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헬라어로 에이레네(ερήνη)인데, 그 말 속에 공감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 서로 공감하여 평화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자기와 같은 마음인 것을 느끼며 평화가 찿아왔고, 그제서야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유경근님이 '공감해달라'고 한 말이 그래서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열자, 부활의 신령한 옷을 덧 입는, 종말을 살라는, 가치 0의 세계의 문이 이렇게 열리는 순간이 찿아오는 것이구나 라는 것입니다.

     재 작년 2019년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님이 강남 한 복판 삼성본사 앞 철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할 때, 그 소식을 접한 교회는 그 해 9, 82일 째 되는 날에 강남 전철역 공터 삼성 본사 앞에서 위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후 12월 대림절 침묵연속기도 기간에는 여전도회가 주방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탑 위에 있는 김용희님, 그리고 아래에서 함께하는 이재용님, 그리고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 박미희님 등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점심을 챙겨 보온통에 담아 찿아가기도 하였는데, 한 번은 탑 아래에 있는 박미희님에게서 김용희님이 매우 우울해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강남지하철입구 공터에서 철탑의 김용희님과 같이 위로의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사회단체와 연대하기도 하고, 교회 단독으로 성가대를 중심으로 찿아가 예배를 드리기도 하며 김용희님과 함께하였습니다.

     김용희님에게 철탑은 종말의 시간이요, 공간입니다. 죽을 각오로, 오늘 말씀의 언어를 빌리자면 옷을 벗어버릴 각오로 그 곳에 올라간 것입니다. 죽음이 드리워진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이 적지않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찿아가 그 곁을 주었습니다. 다행히 고공 농성은 355일 만에 작년 529일에 마무리를 짓고 철탑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7월 첫 주에 우리 고기교회에 찿아 와 함께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김용희님이 무엇 보다 고기교회에 더 인상적이었다고 한 말을 들었는데, 보통 외부에서 찿아 올 때 주문도시락을 받는데 고기교회는 늘 집 밥을 올려보내주고, 닭 백숙도 따끈하게 올려보내주는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탑에서 죽을 각오로 종말을 살고있는 자리에 곁을 주고자 찿아가 도시락을 정성껏, 그러니까 마음으로 도시락을 쌓아 올려 보내준 것이 마음에 울림이 있었었던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에이레네 공감하라고 하자, 제자들이 느꼈던 마음, 이것이 종말의 한 점의 순간.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하는 순간. 두렵고 떨림의 자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뒤로 물러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만이 남는 자리가 아닌가. 바울이 덧입기를 소망하는 신령한 부활의 몸은 어떤 신비나, 환상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감동을 통해 내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마음을 나누는 것이 미래에서 현재로 찿아오는 종말의 순간이요, 신령한 부활을 덧 입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세상가치 0의 만남이 아니겠는가 라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요, 우리서로같이 교회의 교회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한 그 해 서강대에서 드려진 미사에 찿아간 예은 아빠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아무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이 잊히는 게 두렵다고 하면서,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그리고 10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공감해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다락방에 숨은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두려워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가 한자리에 모인 거죠.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고, 서로 얼굴도 못 보겠는 그야말로 말도 못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죠. 그저 머리만 숙이고 있는 그런 상황 속에 예수가 찾아온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에이레네(ερήνη)입니다. 그 에이레네라는 말 속에 공감하라는 말이 숨어있어요. 평화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 말은 마음과 마음을 맞대어 서로 공감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공감하면서 부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유경근씨의 '공감해달라'는 그 말이 그래서 마음에 많이 와 닿았던 거예요. 그 말이 바로 부활을 일깨우는, 종말을 살라는, 가치 0의 세계의 문이 이렇게 열린다는 것, 부활의 신령한 옷을 덧 입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요, 우리서로같이 교회의 교회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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