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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교회, 평화, 회복 (창조절 열째주일, 2017년11월 5일)

하늘기차 | 2017.11.05 16:39 | 조회 994


                      자유교회, 평화, 회복 

2017115(창조절 열째주일)                                                                대하34:3-7;14-19

     지난 1016일 월요일 저녁에 기독교한국침례회 단체가 주최하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논문발표회장에 다녀왔습니다. 3,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굳이 침례교가 주관하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곳에 다녀 온 것은 루터, 칼빈이 아닌 비주류의 종교개혁, 즉 아나뱁티스트, 즉 재세례파의 개혁의 역사와 정신을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보통 개혁에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개혁의 주체가아니라, 개혁의 대상이라고 겸손히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상이니, 회개하고, 거룩해지자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교단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면서 작년에 이어 올 해에도 다시 거룩한 교회로!’를 주제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위 거룩이라는 프레임에 교회를 맞추어 넣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율법궤를 블레셋과의 싸움터에 가지고 가서 빼앗겨 버리는 치욕을 당한 것처럼, ‘다시 거룩이라는 구호는 율법궤를 앞세워 자신들의 패배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희도 거룩하라는 이 말 속에는 교묘히 우리들의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 돌리는 냄새가 납니다. 저는 그 냄새를 맡습니다. 종교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기분이 별로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너무 보편적이어서 개혁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피 흘림과 배척과 폭력적인 싸움의 지난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보편적인 언어를 사용하려 한다면 차라리 개신교의 본래 의미인 프로테스탄트, 다시 저항하는 교회로가 맞지 않나 싶은데, 그러나 저항, 개혁, 다시 거룩이라는 것으로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루터가 비텐베르그 대학교회의 문에 교회에대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이래, 루터와 칼빈의 정신을 따라 지금 까지 이어 온 500년 개신교의 역사의 현 주소를 보면 유럽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미국 교회도 쇄퇴 일로에 서 있고, 더욱이나 한국교회도 급속하게 쇄락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 칼빈의 개혁을 이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한계가 500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온 세상이 자본과 물질과 과학문명, 그리고 국가에의해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교회는 무기력합니다. 그렇게 개신교가 여기 까지 온 것 같습니다. 2001년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911일에 미국의 무역회관인 쌍둥이 빌딩이 비행기 테러에의해 무너지는 광경에 미국은 물론 온 세계가 충격에 빠집니다. 이후 애도의 발걸음, 많은 학술적인 주장들이 나왔는데, 미국 교회가 이 세기말적인 테러를 놓고 기도하며, 고민하는 모습도, 아무런 신앙 고백도, 그리고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 갈지에대한 고백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은 그 이후 첨단무기로 중동 나라들을 처참하게 유린하는데, 교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911을 바라보며 바로 국가교회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도 416 세월호 사건 앞에, 아니 그 이전 보도연맹, 제주4,3항쟁, 부마사태, 광주항쟁, 원ㄹ남전에서의 한국군의 만행 등 교회는 국가 폭력의 참사 앞에 아무런 신앙고백도 없었고, 아무런 생각 없이 국가와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거짓 정보에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국가교회라고 했습니다. 국가교회라는 말은 카톨릭을 제국의 교회라 하는 말과 연관이 있는데, 왜 국가교회인가 하면, 루터 이후 깔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할 때에 교회만이 아니라 도시의 교육, 정치, 시의회 등의 모든 제도를 개혁하여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세웁니다. 지금의 장로제도, 의회제도 등이 바로 깔뱅에의해 만들어진 제도들입니다. 그야말로 개혁, 제도개혁입니다. 이렇게 개혁이 국가제도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매인 흐름은 루터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교황에게 파문을 당해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의해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보호를 받으며 성서 번역과 개혁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그래서 교회가 국가와의 관계를 놓을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루터, 깔뱅의 개혁의 또 하나의 한계점은 카톨릭의 교리와, 카톨릭의 부당함을 변증하려 하다보니 다분히 교리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깔뱅의 조직신학인 기독교 강요의 교리적 신학은 우리 장로교 교리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윤리와 도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 않나 십습니다. 아마도 독일이 2차대전 당시 나치에대해 저항하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국가주의의 한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군사 독재 시절에 교회가 조찬기도회를 통해 군사독재를 합법화하는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개신교의 뿌리는 국가교회라는 것이고, 그 한계를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드린 침례교 기념 논문 발표회 때 낯설지만, 기억에 남는 말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자유교회, 평화, 그리고 개혁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우선 자유교회와 평화입니다. 국가와 연관되어있어 국가 시스템과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개신교회와 달리 재세례파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아이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맞지 않다는 아주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유기체로서 영적인 거듭남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지, 부모의 신앙으로 출생한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어 죄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며 교회는 대리종교가 될 수 없다하여 당시 카톨릭과 루터파에의해 양쪽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으며 이단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죽음을 피해 이 곳 저곳으로 쫓겨다니기 시작하는데, 당시 뮌쪄를 중심으로한 농민운동이 폭력적으로 나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목도한 재세례파들은 박해에 대항하지 않고, 감수하며 개혁의 근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붙잡고 이 곳, 저 곳을 피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들 공동체는 나라와 민족을 달리하며, 약간의 교리적인 차이를 보이며, 곳곳에 자리메김을 하는데, 네델란드의 메노나이트, 미국의 아미쉬, 영국의 부르더호프, 형제 교회단의 영향을 받은 퀘이커 등 근 현대에 이르는 평화 공동체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떼제 공동체에서도 바로 그 평화, 자율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봅니다. 이 공동체들은 철저하게 국가와 거리를 두고 오직 말씀을 믿음의 근본으로 삼고 재산을 나누고, 말씀에 엄격하며, 수도원적인 기도운동과 성령의 감동을 따르며 폭력을 거부하며 평화를 지향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이 재세례파와 그 이후의 공동체들이 지향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자율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500주년 논문발표회를 통해 느낀 것은 재세례파의 정신을 이어받은 교단의 후예들에게서 아무런 자유도, 평화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개혁은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이 아니라, 이 시대의 언어로 해석되어 밖으로 걸어나와야 합니다. 자본과 과학문명과 국가가 폭력적인 거대한 괴물이되어 전방위적으로 지구의 자연생태와 소소한 개인들의 평범한 삶을 무너뜨리는 시대를 살고있습니다. 특히 요즈음 언론매체를 통해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거듭 실리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는 조직과 위계질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모임들을 통해, 그 작은모임들이 주체가 되어 성품운동과 같은 개인적인 기독교 윤리, 또한 교리적인 신앙고백이나, 자기중심적인 성경읽기나 기도회를 넘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주체가 나가 아니고 우리이듯이 비록 죄인이지만 죄 없다하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녀로서의 공동체의 정신으로 영적 감흥과 서로에대한 존중함과 신앙적인 깊은 띠를 띠우며,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통해 비록 세상이 자본과 과학문명과 국가의 폭력으로 파괴되어가는 것 같지만 이세상 속에 감추어져있는 하나님나라의 생명, 정의, 평화를 드러내는 잔치와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배려와 용서와 관용과 기다림이 있는 자유와 평화의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이라 하였는데

     교회 예배당 큰방으로 가는 길 예배당 옆 포도나무 아래에 작은 볼품없는 나뭇가지하나가 낮게 있는 듯 없는 듯 자리잡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입니다. 재 작년에 심었는데, 지난 겨울에 얼어죽었는지, 새 순이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이 지나가면서 무화과 나무에 줄기가 솟은 것입니다. 나중에 보세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올 겨울 만 잘 넘기면 뿌리를 내릴텐데 그러면서 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 외면하거나,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산국이 지금 교회 여러 곳에 퍼져있습니다. 전에는 텃밭 데크 옆에 늘 피었는데, 올해 와 작년에는 없드라구요. 그래서 휴지기이구나 했더니 웬걸요. 사방으로 퍼져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을을 벌개미취, 쑥부쟁이, 구절초와 함께 수 놓아 가을 정취를 만끽하게 합니다. 자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겸손히 머리를 숙입니다.

     자유교회와 평화에 이어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개혁, Reform이 아니라, 회복, Restoration이었습니다. 개혁이 ~~에 대한 것, 눈에 보이는 제도, 체계에대한것이라 한다면, 회복은 나를 향하며, 무형의 본래 모습을 다시 찿는, 즉 초대교회의 모습을 찿고,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의 근원으로 나아가자는 뜻인데, 얼핏 초대교회 이후의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개혁과는 또 다른 울림이 왔습니다. 루터의 개혁을 통해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믿음을 주창하였는데, 그것 역시 오늘 이 시대를 보면 은혜는 값싼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인 성경읽기와 교회제도를 살찌우는 성경공부와 소위 제자훈련으로 왜곡되었고, 그리고 믿음은 스스로를 성역화하여 중세 때의 무지함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타 종교를 악마시하고, 그리고 소수자들을 기존의 사회적 질서에서 제외시켜버리는 정치적이고도 이기적인 배타적 믿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에 회복은 그저 옛 초대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 아니라, 모든 회복을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교회 전체가 주님이 말씀하는 공동체로 건강하고 합당하게 자리잡을 때, 내 자신의 평안함과 위로, 소망의 기쁨, 가족간의 아픔들을 회복하고, 이웃들과의 갈등을 풀며, 나라간에 평화를 지켜내고 그리고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자리가 복구되어지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잔치를 한 판 벌이는 교회이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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