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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터(부활절네번째주일, 2018년4월22일)

하늘기차 | 2018.04.22 11:04 | 조회 1167


             영적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터

2018422(부활절네번째주일)                                                                           51:1-12

     부활은 죽음의 힘, 사탄의 권세가 무릎을 꿇은 사건입니다. 죄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는 영적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영적인 사건의 출발은 어디서 부터일까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순간적으로 죄의 회개라는 생각이 불연 듯 떠 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에 익숙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회개!”라고 합니다. 영적 사건은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시편기자는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도 크지만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 자비, 긍휼이십니다. 우리는 죄 보다는 죄의 결과, 열매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멀리 있습니다. 이미 죄는 십자가와 부활로 무릎을 꿇었는데도, 우리는 죄로부터 파생된 것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다윗은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찬찬히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할 때 공산당 자아 비판하듯이, 또는 폐쇄적인 자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을 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여쭙고, 듣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나누는 대화의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51편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기하지 않는데, 아마도 밧세바와의 범죄를 이미 알고 있다는 설정을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서는 죄를 구체적으로 명기합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지역 원주민과 혼인을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순결함을 버립니다. 가나안에 익숙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살아남기 위해 자녀들을 지역의 원주민들의 자녀들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시킨 것 같습니다. 더구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앞장을 섰다고 합니다. 느헤미야서에서도 우리 조상이 송아지를 쇠붙이로 부어 만들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우리 하나님이다 라고 숭배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우리 조상을 광야에 버려두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특히 예언서에서 하나님은 구구절절이 이스라엘의 죄목을 낱낱이 밝혀 따지시고, 꾸짖으시고,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을 고백할지 몰라 중언부언한다든가, 내 속에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는데 입 밖에 내기가 어렵다든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고백은 하나님이 비추시고, 보이시고, 드러낼 때에, 그리고 꾸짖으실 때에 하나님에게 순전히, 그리고 솔직히 답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아비판식으로 자기가 원치 않는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주님 맞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달콤한 말이나 위안의 말로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고, 직설적인 말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초대를 합니다. 강직한 말로 우리를 꾸짖으시어 변화의 잔치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마치 법정에 선 것과 같은 상황이 설정되기도 하는데, 거기서 고백과 찬미, 감사와 기쁨의 잔치가, 자유와 해방의 탄성이 소리쳐집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나를 우슬초로 정결케 해 달라고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소리를 듣게 해주시고,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양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죄의 고백의 모습이 찬양과 기쁨과 감사로 이어집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관계 속에서 혹 교회를 해 하거나 덕이 되지 못할 때에, 우리는 뒤에서 말을 하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고도 진실되게 상대방의 마음을 흔드는 충고와 권면이 필요합니다. 20년 전인가요? ‘작은 소리로, 찬찬히, 정확하게라는 대화운동을 했던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신약시대, 초기 교회 때에는 성도들 끼리 서로 잘 못을 고쳐주는 습관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15에는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에는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좌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또한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상대에게 진실을 말해주기 보다는, 자존심을 꺽고, 그동안 맺힌 것, 곱지 않게 보던 것들을 충고와 권면을 핑계로 상대방 마음에 상처주고, 수치스럽게 하며, 창피하게 하여 오히려 분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자기 이기심의 발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13절에서 주의 도를 가르치겠다고 하는데, 교실에서 행해지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참회의 길을 걸어 본 사람이 삶의 어두움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출구가 있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영웅적인 인고와 초인적인 노력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입니다. 우물쭈물, 중언부언 하거나,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혀로 의를 높이 노래하고, 입술로 주를 찬양하는 자발적이면서 자연스러운, 기쁨에 복받치는 성령께서 입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라고 외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식사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술이 열리고, 혀가 풀리고, 기쁨에 북받쳐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영적 사건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는 죄를 스스로 인정을 하면서도 일어나지 말었어야 했어,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야,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잖아, 그리고 전혀 예측하지 못하게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야 하면서 하나님께는 죄를 고백하지만, 죄를 유발시킨 사람에대해 분노합니다. 물론 잘 못 되었지만 나 만 잘 못 한 것이 아니야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4절에서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법정에 세워 우리아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일까요? 하나님께서 홍택이가 죄를 지었는데, 그래서 홍택이가 죄를 범했다고 판결을 선언하는 법정인가요? 그래서 가해자는 지옥, 피해자는 천당인가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가 피해자일까요? 이 재판의 피해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향한 사랑, 지켜주심, 인도하심, 구원하심, 보호하심, 감싸심, 축복하심, 막아주심, 승리하게 하심, 미래에대한 계획과 비죤을 손수 계획하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다윗이 하나님을 친것입니다. 밧세바를 간통하고, 측근인 우리아를 살해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해자인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앞 마당에서 정신없이 아이들과 뛰놀다가 저녁 때가 되어 해가 기울면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참회이고, 우리의 통회이며,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해하고, 신의를 저버리고, 배반한 분 앞에 섰는데, 바로 그분이 다시 자신을 가해한자의 오른손을 들어줍니다. 그래서 회개는 자아비판이나, 자해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 복음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는 인상적인 말씀이 눅22:61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모닥불을 피워논 곳에 무리들과 함께 섞여 엉거주춤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닭이 울었고, 그 때 재판을 받던 예수님이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제서야 닭이 울기 전에 3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통곡을 합니다. 왜 베드로는 통곡을 하였을까요? 첫번째 부인, 2번째 부정, 3번째로 모른다고 할 때에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대해, 자신의 양심이 부끄러운짓을 하고 있다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의식이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자아에 머물러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서서 베드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베드로는 나에게 한없는 신뢰와 관심, 배려, 용서, 사랑을 부었는데 하며 가슴아파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피해를 당하시고, 배반당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무참히 짓밟히고도 불쌍히 여기는 눈길로 멀없이 베드로를 응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정죄의 눈길이 아니어서, 예수님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베드로는 마음 아파하며 모든 생각과 감정을 내려 놓았습니다.

     회개는 나의 잘못을 윤리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찿아와 에이레네, 평화가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먼저 찿아오십니다. 먼저 사랑입니다. 그래서 복음이고, 은혜입니다. 주님과 눈이 마주치며, 마음이 열리자, 부끄러움, 비겁함, 두려움, 혼돈 속에 있던 제자들이 그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서로를 인정해주고, 마음을 나누며, 그렇게 두려워했던 로마의 권력과 이스라엘의 종교 앞에서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적 사건은, 부활은 그렇게 은혜로부터, 자비로부터입니다. 베드로가 가야바 법정에서 보았던 그 눈빛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처음 만나 그물을 던지라고 했던 그 눈빛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칭찬하시던 그 눈빛이며, 52어의 기적으로 들떴을 때에도, 서로 누가 높으냐고 하며 서로를 미워하며 질시하였을 때에도 그 눈빛 그대로 이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주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감사와 기쁨으로 회개와 부활의 영적 사건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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