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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영적 사건이다(부활절세번째주일, 2018년4월15일)

하늘기차 | 2018.04.15 10:57 | 조회 1335


                          교회도 영적 사건이다.

2018415(부활절세번째주일)                                                                         벧전5:1-7

     지난 주에 부활은 영적인 사건이라 했습니다. 영적이라 함은 육의 반대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부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주가 지금도 창조의 질서 속에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와 크기로 확장되어 가는 것 역시 영적 사건이며, 영적 사건 중에 인류에게 베푼 가장 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할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감추인 죄를 드러내 주었고,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이면에 숨어있던 죽음의 힘, 사탄의 권세가 그 한계를 노출시키며, 생명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입니다. 죽음이 어떻게 세상을 조정하며 장난치는 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주님은 그 죽음을 받아,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선한 뜻을 드러내,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었습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맡겨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높인 믿음의 사건입니다. 믿음이야말로 피조물의 존재감을 한 껏 높일 수 있는 관계설정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논리나, 관계가 나를 나다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 나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믿음을 통해서이며, 그 믿음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볼 때, 선한 존재감이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결 고리는 결국 믿음이라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진짜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하늘 보좌 버리고 끝 까지 낮아진 사건입니다. 그리고 참 소망이 무엇인지를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다르며,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르며, 공중의 나는 새와 물고기와, 나무와 들꽃과 발에 차이는 돌맹이 하나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닮아 그 자존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백성들의 영광은 더 할 나위 없습니다. 부활은 자기에게 감추인, 육신에 머물고 있는 자기 자존의 영광을 드러내어 뽐내며 온갖 영광들과 하모니를 이루는 영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마지막 회복의 이정표입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시어 모두 다락방에 숨어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찿아오셔서 에이레네, 공감하라하시며, 평화를 선언하시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제자들은 변하여 예수의 부활을 선언하고, 증언하며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부활의 공동체이며,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고기교회는 다음 달에 설립기념 52년을 기념합니다. 교회는 많은 분들이 들고 나고 합니다. 교회에 익숙해지면서 자기자리를 잡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한 교회에다니면서 한 7년 정도 되면 이제 그 교회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에 동감을 합니다.

   교회가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에 간혹 오해스러운 것은 교회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몇일 전 건축을위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위원중에 한 분이 일이 있어 먼저 일어서야 했습니다. 마침 위원들의 전체의견을 알아야할 때였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급하여 먼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때 위원분 중에 그럼 나중에 투표를 하라고 했나 정확히 말이 생각나지는 않는데, 아마도 다수결을 염두에 둔 말을 한 것 같아, 그 때 제가 교회는 다수결이 아니라, 모두가 합의를 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2015년도인가요. 예배당을 중축하려하였습니다. 앞과 뒤를 4-5m 정도 트고, 뒤를 낮은 2층으로 하면 외견은 나름 그대로 유지가 되면서 12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뒤 밤나무 무대데크를 보면 예배당 쪽 데크가 잘려나간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앞으로 넓히고, 뒤로도 예배당창고 선 만큼 넓힐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 한 분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증축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근데 이정도의 증축은 신고하지 않아도 문제는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집사님의 제안을 존중하여, 기도하기로 하며 회의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날 다수결, 소위 민주주의 방식으로 결정을 했으면 증축이 진행되었을 터이고, 이미 120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또 다시 신축을 해야했을 것입니다.

     2013WCC세계대회 총회 때입니다. 수백명이 참석하여 의제를 논의하던 중에, 한 대표가 동성애에대해 2013대회의 신앙으로 고백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또 한 쪽에서는 아마도 남아프리카 쪽이었던 것 같은데, 동성애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고, 이어서 계속 몇 번에 걸쳐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결론을 얻을 수 없었고, 만일 민주주의 방식이었다면 다수결로 결의를 했을 것 같은데, 시간이 많이 지연되자 당시 의장은 동성애 제안자에게 혹 제안을 내릴 수 없겠는가 라고 정중히 물었을 때, 제안자가 의장의 권면을 받아들였으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대신 제안을 총회 기록에 명기할 것이라는 말을 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보았고, 교회는 노회도, 총회도 그렇게 합의로 의결하며, 그 원칙을 목회 동안에 지켜나갔던 분이 바로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님이셨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의결 방법을 택합니다. 세상의 방법입니다. 아마도 이만큼의 차선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합의제로 의사결정을 합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결의방법을 따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아니오!”하면 의사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을 존중해 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의견에 신중을 기하여야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교회를 향한 성령의 내적 감동을 따르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를 세상에 헌납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더 세게 말하면 사탄에게 교회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소위 민주적이라는 것으로 교회가 얼마나 세속적으로 되어가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성령의 내적 감동에따르는 합의제이고, 그것은 깊은 기도의 사람들, 서로 사랑의 띠를 띠는 공동체라는 것, 더 나아가 오늘 말씀처럼 믿음의 선배들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며, 젊은 사람들은 먼저 믿은 사람들에대한 순종으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편의적인, 다수주의와 차원이 다른 의결방법입니다. 깊고, 넓고, 높은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최근 부르더호프 공동체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꿈꾸는 인생>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 57-18일에 뉴욕의 부르더호프 공동체 목공공장을 416희망목공방 아빠엄마들과 다녀오게 될 것 같습니다. 부르더호프는 통장이 하나라고 합니다. 백여 가구 공동체의 재정지출 통장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이 공동체가 무엇을 지향하며, 그 정체성이 어떠한지를 한마디로 설명해줍니다. 늘 공동체를 염원했던 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제가 꿈꾸던 공동체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일 따름입니다.      

    부르더호프공동체는 1차세계대전이후 황량해진 독일 사회 속에서 하인리히의 부친 에버하르트와 그 부인 에미는 전쟁이 발발한 것은 수십년 지속된 탐욕과 사회의 불평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면서 자신의 부르주아적 특권을 다 내려놓고 하층계급과 결속을 하며 태동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의 하인들에게 부부침실을 내어주고 자기들은 거실에서 생활을 하고, 집안청소, 설거지, 하다못해 신발닦는것과 관련해서는 하녀에게 왜 신발을 닦아놓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받습니다. 드라마틱합니다. 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엔 수많은 사회운동의 분파들이 생겨나게 시작합니다. 공산주의를 포함해서, 시온주의, 무정부주의, 중세주의 나치즘, 국가주의적 보수. . . 그 속에서 참 진짜는 무엇일까 하며 찿은 것이 사도행전의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공동체는 자급자족을 위해 시골에 자리를 잡았고, 그 이후 당대의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도 그 공동체를 다녀갑니다. 칼 막스, 선다씽, 막스웨버, 주님이 임재하는 신비한 체험들, 그리고 나치에 전혀 동의하지 않자 공동체를 어떻게 해서든 해체시키려 집요하게 공작하는 속에서 공동체가 흩어지면서도 여전히 그 정체성을 지켜내며, 내부적인 독선과 관료주의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굳굳히 자율적인 섬김으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나치의 압박이 극심해질 때에도 어느 영웅적인 선택을 하기 보다는 공동체 그대로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셔야한다며, 우리의 능력이 조금이라도 도드라진다면 하나님의 영과 권위는 그만큼 물러난다는 고백이 되어지기도 합니다. 논의와 숙의를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지난한 영적 과정 속에 모범과 복종이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십자가의 삶을 통해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스며들어갑니다. 깃발들고 선명성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와함께하는 한사람 한사람과 사랑의 띠를 띠웁니다.

     제가 지금 까지의 신앙의 여정을 걸으면서 저의 길안내자가 되어준 분들은 토마스 머튼, 장기려 박사님, 함석헌 선생님, 다석 류영모, 김교신 선생님, 내촌감삼(우찌무라 간조)와 하천풍언(가가와도요히코), 문익환목사님 그리고 목회적인 관점에서는 한경직 목사님 등의 영향을 받았고, 신학적으로는 칼 바르트, 그리고 디히트리히 본훼퍼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을 따라 고기교회를 섬기며 이제 어렴풋이 조금씩 루터, 칼빈의 개혁의 한계가 보이는 것은 루터 칼빈의 개혁이 조직신학적이며, 국가교회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재세레파운동은 그 당시 말씀을 순전히 따르며 유아세례를 거부하다 보니, 캐톨릭과 루터, 칼빈 개혁교회 양쪽 모두에게 공격을 받아 피하고 숨어다닐 수 밖에 없었지만 끝까지 폭력적인 해결방법 보다는 평화적으로 그리고 자율을 바탕으로 국가교회가 아닌 공동체 신앙을 지켜나갔고, 근대에 그 정신은 부르더호프, 아미쉬, 그리고 떼제에이르기 까지 공동체 중심으로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르더호프의 하인리히 아놀드가 말한 짧은 글 중에

                제자도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자리를 내드려 우리 안에 사

                  시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얼마나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교회를 세워나갔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위 제자훈련 등 수 많은 집회와 모임과 훈련과 기도회들이 말로는 믿음, 영성 하지만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적 영성을 개인화 해버리고, 그리고 값싼 위로를 마치 하나님의 참 위로인양 치유와 회복을 무한정 남발하는,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소위 교회성장이라는 블랙홀에 모두 함몰되어버린 이 때에, 제세례파가 무수한 핍박, 음해, 폭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율과 평화의 공동체 정신을 되돌아 보아야하겠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선에 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고기교회는 두 가지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하나는 이번 제직회의 주제인 디아코니아, 22:27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

                          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또 하나는 올해 표어공모를 하였던 눅10:117

                         “다른 일흔[] 사람을 세우셔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며...”그리고

                         “일흔[] 사람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라고 하는 말씀이 우리 고기교회의 앞으로의 정체와 지향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두서없이 이야기하였지만 오늘 교회들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이것은 단지 한국교회 뿐만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에 이르러서는, 단지 프로그램이나, 제도나 교회나 신학이라는 프레임에 묶일 것이 아니라, 초대 기독교와 재세례파운동을 통해 보여준 자율과 평화의 공동체 신앙 정신을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풀어내야할지 숙제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고기교회의 처음자리 공간은 아버지 하나님이 바라시는영적, 신학적, 교회적, 역사적 역활을 다 하기에 합당한 복된 공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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