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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받는 종의 노래(종려주일, 2018년3월 25일)

하늘기차 | 2018.03.25 16:01 | 조회 1534


                         고난받는 종의 노래

2018325(종려주일)                                                                     50:4-9;12:12-19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고, 자신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 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습니다. 설사 그런다 할 지라도, 곧 돌아 올 것 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포로생활은 7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였지만, 망할 때 까지 끝까지 자신들의 종교적 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순간까지 설마설마 하였고, 왜 포로가 되었는지, 무엇을 잘 못했는지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교만하여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법적공방을 벌입니다. 이 법정에서 이스라엘은 충격에 빠집니다. 42:24

                      “야곱이 노략을 당하게 버려 둔 이가 누구였으며, 이스라엘을 약탈

                       자에게 넘겨 준 이가 누구였느냐? 바로 주님이 아니시냐?”고 증언을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모세를 통해 홍해를 갈라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다윗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려가게 한 것입니다. 모든 변론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포로되게 하신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의 현재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누리며 욕망하였던 것입니다.

     41장은 고레스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해 가고 있다는 정세를 이사야가 정확히 알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바벨론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그리고 그 역사적 흐름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봅니다. 40:15는 하나님에대하여

                   “그에게는 뭇 나라가,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이다. 섬들도 먼지를 들어 올리듯 가볍게 들어 올리신다고 고백합니다. 당시 고레스의 출현을 이사야는 종말론적으로, 다시말해 이러이러해서 인과응보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러니까 단순히 너희들의 죄가 너희를 망하게 했어 가 아니라, 온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돌아가는 시대적 흐름 속에 개입하시어 적극적으로 지금의 지중해권의 판도를 바꾸고 있음을 말합니다. 민족주의와 종교에 갇힌 이스라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이사야가 한 것입니다. 44:28은 고레스에대해 너는 내가 세운 목자다. 나의 뜻을 모두 네가 이룰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45:1, 2에서는 내가 너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왕의 허리띠를 풀어놓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받아들이기 힘든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관점을 뒤집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자존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입니다. 이방사람,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의 왕을 종으로 삼아 다른 우상숭배의 나라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성전의 부재였습니다. 후에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배웠지만, 당시 바벨론의 우상숭배에 노출되어있던 이스라엘 포로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 한다는 것은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게하였습니다. 바벨론은 당시 최고의 문명, 문화, 예술, 학문 등의 나라요, 거대한 마루둑 신전앞에 야웨 하나님은 초라하였고, 무기력해 보였습니다. 또한 바벨론의 회유책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대 바벨론에서 발굴된 경제문서를 보면 바벨론에 순응하면 그에따른 경제적 보상이 상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며 그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며, 삶은 피폐해 갔습니다.

     저에게 볼펜이 하나 있는데, 이 볼펜이 흥미롭습니다. 볼펜에 5만원짜리 사진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 볼펜이 어디서 왔나 보았더니 우체국 보험글자가 쓰여 있더라구요. ! 그랬지 내가 택배를 붙일 것이 있어 우체국에 갔다가 그 볼펜을 그냥 가지고 온 것인데, 그 볼펜에 5만원권 지폐가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볼펜을 보며 우리가 지금 무엇에 붙들려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지금 자유인인 것 같지만,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포로가 되어 살 수는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나의 자존감에서 오는 것이고, 그 자존감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자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자존감으로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경외함을 받는 것과 피조물이 하나님께 경외하는 것은 11의 상황에서 각각의 존재로서 스스로의 역할을, 하나님은 창조자로선,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꾸 욕망에 붙들리어, 돈의 포로가 되어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40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제2이사야서는 이 전의 죄와 파멸, 심판이라는 말에서 위로하라!는 말로 바뀝니다. 지난했던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이제 그 죄를 용서 받았고, 충분히 징계를 받았으니 이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과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광야에 길을 예비하라며, 골짜기는 메꾸고, 산과 계곡은 깍아내려 평탄케 하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비천한 자는 높아질 것이요, 존귀한 자들은 낮아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자유와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한 종을 세워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부터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칼과 말과 방패를 두른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킨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종을 새롭게 세웁니다. 48:14는 고레스에대해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니, 그가 바빌론을 공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그의 능력을 바빌로니아 사람 앞에서 드러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 만이 아니라 인류와 온 세상 피조물을 위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마치 연한 순 같은, 훌륭한 풍채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볼 수 없는 아주 연약한, 보잘 것 없는 자를 종으로 세우십니다.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자유케하는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관점이 아니라, 그 폭력에 희생당하는 관점의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 의인이 고난받는다는 비죤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는 그 지평이 넓어져서, 어느 한 개인, 부족, 나라와 민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열방의 사람들을 위한 종을 세워 하나님은 그 종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저는 간혹 하나님에대해 의구심을 언듯언듯 갖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실까 라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며 당신이 야웨하나님인 것을 드러내실 때에,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며, 단지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피조세계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낼 때에도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을 즐기시는 하나님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지만, 천만에입니다.

     이사야는 자신들 뿐 아니라, 그 후손들의 삶도 타락시키는 변함없이 완고한 이 죄의 틀 앞에서 더 이상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에 도달합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지혜로는 인간구원의 불가능을 깨달으며, 바로 그 고통에 참여하는 종의 모습을 봅니다. 아니 피눈물나는 고통이 되신 것입니다. 이 종은 힘이 세고, 능력이 탁월한 것이 아니라, 49:4을 보면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은데, 주님께서 나를 올바르게 판단하시고, 나를 정당하게 보상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 종은 어떤 권력과 힘이 아니라, 오늘 말씀에 학자처럼 말 할 수 있게 하시고, 귀를 깨우쳐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붙들린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일들에대해 관대합니다. 나를 때리는 자에게 등을 돌리고, 수염을 뽑는 자에게 뺨을 맡기며, 침을 뱉고, 모욕을 당하여도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 것은 나를 모욕하여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마음 상하지 않고,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냅니다.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으며, 참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하시며, 나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는 이 종을 사42:1에서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

                                 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

                                 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기뻐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을까요? 이 종이 마음에 드는 것은 저도 마음에 드는데, 소리내지 않습니다. 향기가 나는 것이지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습니다. 조심스레이 피워 올린 불꽃을 존중해줍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로 공의를 베풉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종의 손을 붙들어 주고, 이 종을 지켜주어서 기필코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어 42:7의 말씀입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라고 합니다. 레위기의 희년정신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전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 합니다. 이 새로운 일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 고난의 종을 통해 하나님을 이스라엘민족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와 온 세상 피조물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시기를 바라고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역사를 우주를 본 것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는 바울에게서도 롬8:22를 통해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분명하고 확정적으로 그 하나님의 애뜻한 피조세계를 향한 연민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분명하며, 확정적입니다.

     이 세상죄를 대신 지고 가는 어린양의 십자가의 구속의 피로 우리는 우리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 평범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새로운 일을 일으켜 세웁니다. 바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열었습니다. 초대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본인들의 고난으로 받아들여 교회공동체를 해산하는 여인으로 보았고, 지금 겪고있는 시험과 환난을 주님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감당해 나갔으며, 주님도 요16:22에서 공동체가 누리는 기쁨을 빼앗을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쁨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이 기쁨이 초대교회공동체를 이끄는 동력이었고, 초대 교회는 그 엄청난 핍박을 기쁨으로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목자, 특히 종의 모습으로 공생애를 사셨는데, 올 해 우리 교회는 선교하지 않으면 친교단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바, 선교적 방향을 눅22:27, 그리고 눅10:1, 17에서 그 근거를 찿고 있으며,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의 이미지와 다른 두 사람을 세우셔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어, 17절에서 일흔 두 사람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 하였다는 이미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사42:1의 기쁨이 아닌가 싶은데, 그럼에도 섬기며, 봉사하는 종의 이미지 자체도 귀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고난받는 종에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연민, 이 긍휼, 자비가 바로 우리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게 합니다. 이렇게 천천히 하나님의 뜻에 합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이것은 가슴벅찬 기쁨의 출애굽 행진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나그네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그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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