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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순종, 완전(사순절제5주, 2018년3월 18일)

하늘기차 | 2018.03.18 14:24 | 조회 1485


                      

                        고난,   순종,   완전

2018318(사순절제5)                                                                  10:35-45;5:7-9

     오늘 말씀 막10:35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예수님의 말로 한 번 바꾸어 볼까요? 15:7 포도나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16절에서도 거듭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

                    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과 제자들의 말은 같으며, 다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오늘 히브리서 말씀은 구약의 희생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한 참 희생제물이 되었으며, 영원한 대제사장임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멜기세덱에대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광야로 나아갈 때 만난 야웨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중동의 통상적인 일반 신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중동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 온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합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 이스라엘을 뛰어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으면서 멜기세덱이 베푼 호의를 거절합니다. 즉 싸워서 얻은 전리품을 호리라도 갖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재산은 군사력이나, 정치력과 같은 세상적인 방법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이든지 달라고 구하는 모습과 비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었을까요? 7절 말씀에 보면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탄원을 올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마가복음의 제자들의 모습과 교차되며 다른 모습을 봅니다. 그 차이의 근본은 어디에서부터일까요? 하나님께서 예수의 경외심을 보셨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시며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지를 시33:12-22에서 교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은 큰 소리를 내거나 미사여구가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을 통해서입니다. 경외하는 마음은 자발적인 마음인데, 이 자발적인 마음은 나의 자존감에서부터 옵니다. 이 자존감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에게 닿아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아들 이삭을 받치며, 외아들 예수를 내 놓으신 하나님의 마음에 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다른 마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마음을 우리는 이집트의 바로에게서 봅니다. 바로가 마지막 재앙인 첫 번째 태어난 모든 것들의 죽음(아브라함의아들 이삭,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릅니다)을 보고서야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보내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아 홍해 앞에 당도한 이스라엘을 추적합니다. 이에대해 출14:4은 바로의 고집을 꺽지않고 그대로 둘터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자기 좋은대로 하나님 경외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의 마음입니다. 이것 역시 자존감인데, 하나님은 그 교만과 욕망을 그대로 두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보다 선명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롬1:24에서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대로 가면 처음에는 모르지만 결국 고통, 그 끝인 죽음에 이릅니다. 죄의 고통,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고통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난은 한가지로부터 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부터 옵니다.

     히브리서는 고통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고난, 아버지뜻에 따르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잔과 죽음의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자기 욕심, 이기심, 욕망으로 내버려지는 인류를 위해 기도와 탄원을 올리시는데, 하나님께서 경외심을 보고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주님은 처음에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람산에서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십자가, 완전한 죽음을 드립니다. 영과 육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죽음입니다. 5:8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것이 막10장에서는 그 잔, 그 세례입니다. ‘고난을 당하심으로의 순종은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합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 경외에서부터 오며, 이 마음은 자발성이며, 이 자발성은 나의 자존감이며, 이 마음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고뇌하며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예수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자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자발적인 경외함으로 마주 섰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자존이 아버지의 뜻에 합하여지는 순간 완전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로 나아가 8절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워, 9절 자신을 완전케 하시어,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자존감이 고집스러워 교만한, 그래서 버려지는 쪽으로 가면 고통입니다. 툥상 나 혼자 만의 고통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를 부르셔서 순종하게 하시어 버려지는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순종, 고난, 완전이 교회를 통해서도 계속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교회를 도우시려고 하며, 구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시려고 합니다. 모두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실언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자들이 달라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버려지는 길입니다.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자유로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경외, 자발적인 자기 존귀함의 마음으로, 즉 아버지의 뜻, 섭리와 경륜에 합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은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받으십니다.

   지난주 수요성서강해를 통해 저는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까지 김준표 목사님께서 3번에걸쳐 에스겔서를 강의하였습니다. 그 중 지난 수요일에 들려준 말씀은 에스겔서를 새롭게 보게 했습니다. 에스겔이 제사장 계열의 사람이고, 제사장이었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셨고,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마른뼈 환상, 새로운 영을 넣어 주어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그러나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복종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을 내 쫓으시고, 친히 참 목자가 되시겠다는 말씀, 그리고 그 유명한 마른뼈들이 살아나는 환상,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회복에대한 비죤을 선포하는데, 그 시작이 새 예루살렘과 새성전이며, 그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모든 생명을 구원하고 치료한다는 말씀에 이르러서, 더 나아가 유월절, 초막절, 안식일 등 모든 절기와 규례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48:35 마지막 절에서 김준표 목사님께서 강의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 성읍의 이름이 이제부터는 여호와샤마라고 불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샤마가 무슨 뜻이지요? ‘주님께서 거기에 계심입니다. 공의를 저버린 예배로 이스라엘이 멸망을 했는데, 이제 다시 예배를 통해 찿아오셔서 그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예배에 온 정성을 다하는 것일까? 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이스라엘에게 역사와 우주의 중심은 성전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성전에서의 제사와 절기의 회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없어졌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지은 마음의 성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3:16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

                     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스라엘에 온 세계의 중심이 예루살렘인 것처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우주의 중심은 어느 별, 어느 성단, 어느 은하계가 아니라, 주님이 계시는 내 마음의 성전이 있는 내가 바로 우주의 중심이요. 역사의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샤마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멸망한 이스라엘에게서 성전회복을 통해 여호와샤마’, 즉 주님이 거기 계심을 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 고기교회에서도  여호와샤마를 봅니다.

     자존감은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로운 자존감이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속내를 드러낸 것처럼 교만과 욕심, 이기심으로 넘어가면 내버려질 수 밖에 없으며, 그 길은 고통과 죽음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가 강제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마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자존감으로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순종, 그래서 고통이 아니라, 고난일 수 있는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예배는 여호와 샤마입니다. ‘주님이 거기 계심의 예배입니다. 회복과 완전은 어떤 특별한 기도, 특별한 만남,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정하신 예배의 규례와 절기를 통해서입니다. 예배가 예배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자존감이 야웨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대한 연민과 거짓 종교와 세속의 흐름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꺽고,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에게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 기도와 탄원을 올리며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순종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역사를 이루어 완전하여 지셨으며, 이제는 교회를 통해, 특별히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분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여 버려진 심령을 하나님께로 돌려 하나님의 자존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자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 그 회복된 온전한 하나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살아내는 가슴 벅찬, 복된,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게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 안에 머물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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