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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 하나님 시간 (대강절두번째주일, 2017년12월10일)

하늘기차 | 2017.12.10 13:51 | 조회 2094



                                       기다림 : 하나님 시간

20171210(대강절두번째주일)                                                               21:1-3;3:20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기다림입니다. 휴일을 기다리고, 행운을 기다립니다. 시험날짜와 합격 통지를 기다리며, 연인들은 첫 눈 오는날의 데이트를 기다립니다. 그 행복감에 작은 소망을 간직하고 기다리는데, 기다리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일이 익기도 전에 나뭇가지를 흔들어 떨어뜨리는 조바심, 참고 기다리면 화합할 수도 있었는데, 끝내 서로 등을 돌리는 아픔도 있습니다. 기다림은 삶의 지혜입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GODOT)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시골길 말라 죽은 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이 무언가 기다리는데 오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도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고도가 사람인지, 신인지, 희망인지도 모르고, 온다고 하지도 않은 것 같고,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도 무한정 기다리며 50년이 지나가는데 또 기다립니다. 작가에게 고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내가 알면 이 작품을 썼겠느냐?”고 반문을 하였습니다. 등장인물이 모두 5명 정도였던 것 같은데, 특별히 무대장치도 없고 해서 얼마나 지루할까라는 생각도 드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선사했던, 그러나 허무와 공허와 혼돈의 무채색이 온 무대를 가득 메웠던 기억이 납니다. 고도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올지 않올지도 모르는, 약속도 없이 왜 기다리기 시작했는지, 언제 기다림이 끝나는지도 모르는 기다림입니다. 우리 실존을 드러내준 탁월한 작품입니다.

   성경도 기다림에대해 이야기하는데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말씀 창21:2

                           “사라가 임신하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

                                 로 그 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태어났다고 합니다. 약속의 기다림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하란을 떠날 때에는 곧 응답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원하는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조카 롯과 양을 치는 일로 분쟁이 일어나 갈라서고, 온 중동지역에서 일어난 전란을 겪으며 족장으로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며 초조해 집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대한 집중력이 떨어지며, 몸종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지만, 하나님은 환상가운데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게하시며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갱신합니다. 하나님은 후계자를 세우려 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이어지는 믿음의 자손을 보려한 것입니다. 같은 것 같지만 다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주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 이름 걸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아브람은 그 약속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식이 없자 아브람은 또 한 번 흔들려 하나님과의 어떤 대화도 없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족장 후계자를 세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을 양팔저울에 올려 놓고 하나님이 인정한 삶과 인정하지 않는 삶을 올려 놓으면 어떨까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을 따라 믿음으로 우리를 인정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에 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람은 그렇게 인정을 받으며 아들 이삭을 바치는 자리 까지 나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신앙은 하나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던 표상에 까지 아브라함이 다가갑니다. 25년 걸렸습니다.

     모세는 40년 걸렸습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모든 것을 누리는 삶을 살다가 히브리민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기독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내려놓을 것, 버려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변명이나, 이유를 대지 말고 돌아서야 할 때 돌아서야 합니다. 모세는 한창 혈기 넘치는 40세에 누리던 것들을 뒤로 하고 광야로 내 몰렸습니다. 그리고 원주민과 결혼하여 아이 낳고 4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사실 모세에게 하나님에대한 신앙이 온전히 있기나 했겠습니까? 그저 유모로 왕궁에 들어 온 히브리 노예 어머니로부터 유아기를 지내면서 간간히 조상들에대한 이야기를 들었겠지요? 그 말씀이 씨앗이 되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찿는데 40년 걸렸습니다. 광야로 내몰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을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그저 술이나 마시고, 농이나 치며, 왕년에 내가 어떠했는데 하며 추억을 먹으며 살았으면 어땠을까요? 그러나 모세는 왜 내가 하찮은 히브리사람이 맞을 때 격분했지? 나를 격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답을 찿고자 40년 헤메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언제 태어나는가 하면, 그리고 모세가 왜 태어나는가 하면 출2:23-2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

                                       손이 고된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

                                       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

                                       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

                                       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부르짖고,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80년 전 모세가 태어나기 전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 것을 고된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탄식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합니다. 성도들의 기다림은 언약의 기다림이요, 기도의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다림입니다.

     2장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시므온의 별명이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기다림은 시므온의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26절에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평생사무치게 기다렸을까요? 25절에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합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가족은 제대로 돌보았을까? 아브라함 같았을까? 모세 같았을까? 아니면 세례 요한 같이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였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누가는 시므온에대해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오다가 예수를 만나,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시므온의 삶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공허하거나 허무하지 않은 것은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보듯이 기도와 성령의 감동을 통한 기다림 때문입니다. 2:27은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라고 합니다. 2:38에는 예루살렘의 여예언자 안나에대해 바로 이 때에라고 하며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대해서도 창21:2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때가 되니라고 하며 에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시간에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의 때에 믿음의 사람, 기도와 성령의 감동을 따르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응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마태복음은 무어라고 말하고 있나요. 우리와 함께하는 것’, 즉 임마누엘이라고 하지않나요.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믿는 것입니다. 23:19에 보면 발람이 모압왕 발락에게 예언을 하는 중에 하나님에대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변덕을 부리지도 아니하신다.

                                        찌 말씀하신 대로 하지 아니하시랴? 어찌 약속하신 것을

                                       이루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고 있습니다. 이 변덕스럽고, 비겁하며, 편협하고, 집착하는, 게으르며, 부족하고, 흠 많은 우리를 하나님이 믿고 있습니다. 우리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의 자리 까지 이르른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아브라함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믿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에 힘입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된 것입니다. 공과나 업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까요? 감사해야지요. 구원받은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평화의 실마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며 주신 말씀입니다. 4:6, 7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

                                                  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을 보라며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데, 돌아서서 염려하잖아요. 그런데 염려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어디에서 온다고 합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시간을 말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생을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한 번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나의 타임테이블을 맞추지 못해 보았다면, 얼마나 억울한가요? 다시 말하면 기다림의 기도와 성령의 감동이 없다면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신앙한다는 것을 모르고 신앙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지요, 근데 사실은 부모가 아이를 믿는 것입니다. 그 부모의 사랑과 믿음을 따라 아이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계3:20을 주제로 윌리엄 홀만 헌터라는 사람이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왼손에 등불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문을 노크하며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습니다. 안에서는 아기 우는 소리, 웃는 소리, 이야기 소리, 아니면 환자의 신음소리, 다투는 소리 어떤 소리들이 들려올까요? 일에 몰두하다보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문을 자세히 보면 밖에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안에서 열어주어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도 사실은 우리가 가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간의, 세상의 기다림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내 신앙으로 내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다림을 기다릴 때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기다림을 기다리며 다가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기다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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