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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창조절 둘째주일 , 2017년9월10일)

하늘기차 | 2017.09.10 14:01 | 조회 907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

 20179월10일(창조절 둘째주일)                                                                   눅19:41~44; 9:2-7

   예수님은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모르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원수들이 네 자녀들을 짓 밟고,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있지 못하게 할 것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로마제국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폭력을 휘두를 것인지를 본 것입니다.

     그에 앞서 17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하나님 나라대한 이야기를 하며 노아 홍수와 롯이 살던 소돔의 멸망에대해, 그리고 휴거에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저는 휴거도 이세상과는 다른 가치의 전환, 즉 오직 물질, 자본의 가치만 남아 있는 세상가치에 매인 생활에서의 전환을 이야기 한다고 보아요, 신비로운 알 수 없는 영적 전환, 그런데 저는 이 세상에 그러한 가치 0하나님 나라 가치의 삶을 살지도 않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대해 부끄러운 자기 인식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주여! 주여! 하며 휴거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건 이기적인 발상의 광기어린 천박함입니다. 역으로 아주 당연하지만 우리가 전혀 무관심했던 방법과 정황으로,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발상으로 휴거가 일어나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그 휴거가 눈에 보이는 만화와 같은 실제로 일까요? 아니면 이 세상을 살며 그렇게 우리를 울게하고 웃게 했던 세상의 가치가 그리스도의 신비로움으로 가치 0가 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올까요?)

     하여간 눅17:37에서 제자들은 두려운 마음에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님, 어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주검이 있는 곳에는 또한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 질문 바로 직전인 20절에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나라가 언제 임하냐?'라는 제자들과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시작이 되었는데, 제자들도 역시 여전히 내세적 종교적 틀에, 그리고 성전과 제사와 율법에 안주하는 종교기득권에 매여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한 것입니다. 독수리가 누구입니까? 로마의 휘장이 아닌가요? 왜 독수리가 모여드나요?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종교적 틀에 안주하여 평화를 들어내지 못하고, 죽음 만을 드러내 보인다면 반드시 독수리가 몰려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성전 희생제물의 피와 섞은 일,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진 죽음, 포도원 비유에서 등장하는 일군의 실업자들.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평화가 아니고 죽음이 넘치지 않았나 십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 죽음들이 널려있습니다.

   세월호의 미수습자들 중 5명이 아직 나오지 못했습니다. 304명의 꿈 같은 아이들의 죽음과 관련한 온갖 국가폭력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우리는 잘 보았습니다. 자살율1, 이혼율1,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노령사회, 저출산사회, 세계 최고의 핵발전소 밀집지역, 남과 북이 아직도 평화협정체결을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사드와 관련하여 미국으로부터 선제타격설이 우리 국민, 정부와 상관 없이 흘러나옵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접하며 독수리가 몰려온다고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가장 폭력적인 나라는 어느 독수리인가요? 우리가 남과북의 화해, 평화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핵발전소의 운행을 멈추지 않으면, 4대강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으면, 한반도와 전세계의 기후 환경을 지켜내지 않으면, 여전히 쌍룡, 용산, 강정, 밀양, 성주에서처럼 생명과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에 뒷짐을 지고 만 있는다면, 죽음이 넘쳐날 것이고, 반드시 독수리가 날아 와 더 큰 폭력, 더 끔찍한 주검이 펼쳐질 것입니다. 결국 올 것이 왔습니다. 독수리가 죽음의 냄새를 맡고는 사드를 배치하였습니다.

     월터 윙크라는 신학자는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예수님께서 왜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였는지에대해, 당시 왼손은 불결한 일에만 사용하기 때문에 하급자들을 때리려면 오른손을 사용해야하는데, 오른손으로 왼뺨을 치는 것이 아니라, 손등으로 오른 뺨을 치는데, 이것은 그 당시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사람들에게 왼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왜냐하면 왼뺨을 돌려대면 오른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쳐야하는데, 것은 만일 그가 오른손 주먹으로 친다면 그는 스스로 상대방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셈이 되어 약자를 비인간화 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 대응 방법은 수동성과 비겁함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자에게 도전하는 행동이 됩니다. 참 탁월한 폭력에대한 비폭력저항의 하나님 나라 행동입니다. 칼을 들지 않는 이 저항이야말로 피해자나 가해자나 관계되어있는 모두를 감동케 하는 행동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고유의, 남이 침범하면 안되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존귀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 밖에 없음이야말로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 닮은 모습입니다. 온 우주 137억년의 역사 속에 나, 안홍택 목사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는 하나님은 무한하며, 영원하다는 것, 그러나 피조물은 유한하다는 것 외에는 동등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스스로의 이름을 나는 나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나도 나는 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나는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꾸 그 피조의 고귀한 존재감인 유한함을 부족하며, 연약하니 넘어가라 충동질합니다. 그러나 유한함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무한함에는 충만함, 조화, 생명의 아련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에게 속한 선함입니다. 무한하다면 색과 향과 맛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뜻은 세상의 온갖 피조물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모습을 충만하게 드러내 다른 피조물과 어우러져 조화, 하모니를 이루는 것입니다. 평화입니다. 온 우주의 합창, 오케스트라입니다. 그러나 그 조화는 에덴에서 깨져 카인의 동생 아벨의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아, 온 세상이 폭력으로 물들어갑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엄을 무시하고 한계를 넘어갑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고귀함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 폭력이고, 인정해주고 존귀하게 여기면 조화, 하모니 평화입니다. 그 폭력 중에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력이 국가 폭력입니다.

   911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 이후 세계는 예외없이 테러에 노출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최근 유럽과 중동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테러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왜 폭력이 점차 극심해질까? 여러 가지 정치, 외교, 경제적 관점이 있겠지만, 나로서는 교회가 그 정체성을 상실하여서 이러한 폭력이 난무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상은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경계를 쉽게 넘어 돈과 폭력으로 향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세상일을 한다고 치지만, 그런데 교회가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평화도 모르고, 그러니 선언도 못하고, 평화를 이루는 것은 생각도 없습니다. 마치 거세당한 일만하는 노새처럼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자기 역할 못하니, 자기 정체성 조차도 지키지 못하니 온 세상에 폭력이 난무하며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유럽과 미국교회들이 존재감을 잃어버렸으며, 한국교회도 그렇게 되고있지 않나 십습니다. 호켄다이크라는 신학자는 흩어지는 교회라는 책에서 산업혁명 때에 노동자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며 고통스러워할 때, 교회는 그들 곁에 있지 않았고, 자본 곁에 있었고, 그렇게 노동자들은 중세 교회 이래로 내려오던 종교적 전통에서 벗어나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드 문제, 세월호, 강정, 쌍룡, 밀양, 콜트콜텍, 백남기 농민, , , 이 모두가 국가폭력입니다. 교회가 오늘의 역사 속에서 그 존재감을 잃어가는 이유는 국가폭력과 자본의 힘에 평화로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하며 많은 개혁과 진단과 대안을 내 놓지만, 그 원인은 교회가 폭력과 자본이 주인노릇하는 세상 속에서 평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평화를 선포하고,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산상수훈의 7번째 복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라고 합니다.

     양평 두물머리에서 전국의 강이 파헤쳐져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40일 릴레이금식기도회에 참여한적이 있었습니다. 묵상중에 계5장을 읽었는데, 하늘 보좌에 앉아있는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합니다. 저는 찬양과 존귀와 권세와 영광을 돌리기에도 부족할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 왜 죽음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죽음, 모두에게 버림받은 죽음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태어나 보지도 못한, 전쟁과 질병과 굶주림으로부터의 죽음들이 있습니다. 그 뿐인가요, 이 죽음의 일은 인간종에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2011년 구제역으로 죽어간 무수한 가축들, 그 울부짓던 소리. AI조류독감으로 또 얼마나 많은 조류들이 살처분 당하였나요? 지옥이 따로없는 살처분의 근본이유가 무엇인가요? 도시인들의 먹거리를 위해 가축을 폭력적으로 기르는 도시문명의 어리석은 탐욕이 아닌가요?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왜 대를 이어온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나요? 거대도시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폭력적인 핵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해, 과잉소비로 가득찬 도시문명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세월호의 304명의 아이들은 왜 죽었나요? 자본과 국가, 언론과, 시민의 무관심의 폭력이 하나가 되어서 비롯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존경하는 스승이 처형당할 때 저항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도망한 부끄러움에, 그리고 이제 자신들도 그렇게 예수님처럼 죽을 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때,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승의 죽음을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어 잊어버리려고 하였는데, 손과 발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보여주며, 그 죽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평화를 빌어주었습니다. ‘평화의 헬라어 에이레네의 뜻은 공감하다’, ‘함께하다’, ‘연합하다입니다. 스승의 죽음으로 마음이 흩어져 두려워 낙심하며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합하라, 연대하라, 서로에게 공감하라고 말씀하자, 자책감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기 시작했고, 예수님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보게되자, 그동안 보지 못하던 옆의 제자들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자신과 똑 같은 동지들과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평화가 찿아왔습니다. 두려움은 나는 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마음을 나누며, 공감하며, 기억하면 부활이 찿아오며, 평화입니다. 부활은 찿아오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고가 있은 지 한 달 지나 서강대에서 추모미사가 열렸는데, 그 때 유경근 대변인이 잊어지는 것이 두렵다고 하면서 한 달 뒤에도 잊지 않겠습니다.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며, ‘공감해 달라고 간청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공감하라는 말은 예수님이 두려워 떨며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하신 에이레네라는 말 그대로 였습니다. 유경근 대변인, 그리고 가족들은 그 때 평화를 간절히 갈구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손을 잡아주었어야 합니다. 대부분, 안산의 교회들이 가족들을 폭력에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기독교는 기억하는 종교입니다. 성찬도 그렇게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죽음을 선언합니다. 구약의 곳곳에서도 기억하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참 독특한 종교입니다. 세월호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으면 이 시대에 부활은 없습니다. 종교부활 만 있습니다. 휴거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 태어날 때, 헤롯의 공권력이 사내 아기들을 말살하려 합니다. 저는 세월호의 304명의 죽음이 어린 생명을 살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기는 극적으로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탄생을 보며 천사들은 하늘은 영광이요, 땅은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며 평화라 합니다. 이 아기가 언제 자라서 평화가 이루어 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로 고통스러워 할 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냥 자유, 평화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고통스러워 부르짖을 때, 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 역시도 영아살해의 끔찍한 현장 속에서 죽지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그 기적을 누가 일으켰는가 하면 성경은 히브리산파들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산파들은 바로가 히브리 사내아이를 태어나면 죽이라 하지만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내아이들을 살립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히브리산파들이 이집트의 바로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죽이는 죽음의 어두움 속에 하나님은 수퍼 울트라 파워의 평화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주 작은 마을의 갑돌이와 갑순이에게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 역시 히브리산파들 같이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태어나자 하늘의 천사들이 하늘 영광, 땅 평화라 합니다. 이 것이 뭔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지금 이집트에서는 바로에의해, 그러니까 폭력, 아니 국가 공권력에 의해 생명이 죽어가는데, 평화가 깨지는데, 또한 예수님 탄생에대해서는 한 아이가 마굿간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며 천사들이 하늘 영광, 땅 평화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평화에는 기성품이 없습니다. 완제품도 없습니다. 백화점에서 잘 포장되어 만들어지는 물건처럼 평화는 우리에게 갑자기 선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여린 순과 같아서 잘 보호하고, 돌보고 키우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고 죽습니다. 평화는 지키고 보호하지 않으면 폭력에 의해 영아살해 당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달라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 작은 씨앗을 사랑으로 품을 때 조금씩,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느덧 자라는 것입니다. 모내기 한 논에 가서 벼가 안 자란다고 쑥 뽑으면 다 죽듯이 평화는 그런 식으로는 자라지 않습니다. 한 걸음 씩, 한 걸음 씩,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을 드리대며,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고, 겉 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내주는 방식으로, 패한 것 같지만 결코 패하지 않는 한 땀방울, 한 땀방울 . . .아이들이 이유없이 수장되는 나라에서 생명 평화의 나라로, 자본의 욕망으로 부추켜진 4대강에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으로, 핵없는 세상으로, 평화협정체결하여 사드를 몰아내고, 강정해군기지가 철수하는 한반도로. . . 생명 평화는 그렇게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마치 아기 모세처럼, 아기 예수가 태어나듯이 말입니다. 종교적인 틀에서 벗어나 아픔의 자리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의 한걸음, 한걸음으로부터입니다.

     작년 1023~25일에 백남기농민의 장례식장에 집을 오가며 머물렀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아마도 부검을 거부하는 시민들의 숫자가 적었더라면 물리적으로 시신을 강탈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시민들이 장례식장을 빼곡이 메웠고, 국가폭력으로부터 가족들과 백남기 농민을 지켜내었습니다. 평화입니다. 장례식장에 있는 동안 여러 가지 느낀점들도 많았지만,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자리를 지킨 사람들의 면모였습니다. 노동자, 노점상, 장애인, 멀리 광주, 제주도에서 까지 찿아 온 농민들, 그리고 녹색당 등 원외 당들, 그리고 수녀님들과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모두가 국민의 삶의 기저를 떠 받들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새카맣게 탄 얼굴들, 지지 발언 할 때의 어눌한 말 솜씨, 그러나 한 분 한 분에서 느껴지는 정겨움은 어디서도 느껴 볼 수 없는 사람냄새 물신 풍기는 자리 였습니다. 정말 소시민들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를 다니실 때에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이 곳 백남기농민의 장례식장이야 말로 진정으로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천국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1일 대구새민족교회 담임목사님인 백창욱목사님이 소성리 기도처에서쓴 일기입니다. 사드가 들어오기 전입니다. . . “정말이지 내 일과가 사드를 막기 위해 소성리에 드나드는 일이 될 줄 몰랐다. 무엇보다 평택 대추리나 제주강정 해군기지나 밀양과 청도의 초고압송전탑 같은 대규모 분쟁현장은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 .그래서 문재인정권이 들어서면 내 본연의 일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현장에 가던 에너지를 돌려서 기도하고 책읽고, 노동하며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이게 다 일장춘몽이 되다니! 이렇게 시골의 작은 마을을 온통 긴장 속에 몰아넣을 줄이야!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정권의 오류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지. 정권이 한 시민의 삶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좌우하는 현실이 난감하다. 대의민주제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몰려온다

     주님이 부활후 제자들에게 찿아와 빌어준 평화는 에이레네입니다. 공감하라, 함께하라, 나누라는 평화입니다. 이 말을 연대하라는 말로 해석하면 어떨까요? 사람사는 세상입니다. 주님의 평화와 부활이 오늘 이 시대에 연대를 통해 이루어짐을 저는 믿습니다. 마음을 나누고, 함께하며 공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해 대통령탄핵도 그렇게 연대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웠습니다. 연대야말로 소중한 생명, 정의 평화의 가치를 이 세상 속에 실현합니다. 이것은 방법이 아니라, 그 자체 길이요, 평화요, 부활입니다. 교회가 가야할 길에서 연대하는 것에 관심하는 교회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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