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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의 신비 : 교회(창조절 첫째주일, 2017년9월3일)

하늘기차 | 2017.09.03 14:46 | 조회 1361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 : 교회

201793(창조절 첫째주일)                                                 45:3-8;1:15-23

     오늘 읽은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알아야 할 것이 4가지가 있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고 합니다. 이미 알려주셨는데,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17-19에서 알기를 원한다고 간곡히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에베소교회가 그 뜻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비한 뜻이라고 하는데, 그 신비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아니 교회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판타지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 평화와 기쁨, 감사와 성령의 내적 감동이 있습니다. 이 신비는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찿듯이, 파숫군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교회의 여러 갈래들과 흐름의 바탕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어야합니다. 사람들은 이 소중한 마음을 잘 잃어버립니다. 다 알고, 아주 익숙해져 가거든요. 오늘 우리는 복음 아닌 다른 것을 찿고 즐기며 바라며 바쁘게 살고 있지는 안는지요. 그래서 다윗이 율법궤를 찿아 오듯이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비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이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로움을 살아야합니다. 이 신비로움이 교회에서 샘물처럼 흐르지 않으면 교회는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세속적인 친목, 자기 욕심과 이기심, 그리고 세상의 헛된 이념, 철학, 경험들로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진행되어야할 일들이 무심코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진행되기 일 수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공지하며, 진행하며, 기도하며, 나누며 이루어가는 일들, 어떨 때에는 하잘 것 같아 보이는 순서 하나, 당번 하나, 작은 일들에 조심스레 귀기울이며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또 무슨 일을 진행할 때는 교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하며, 잘 모르고, 익숙하지 않을 때에는 목회자나, 먼저 믿은 선배신앙인들에게 물어보아야합니다. 선배라 했습니다. 먼저 믿었다는 것이 훈장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교회의 내용 깊은 역사를 체험하여 기억하는 먼저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진행되는 일들에는 항상 기도가 있어야 하며, 성도들간에 조화로워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좋은 것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의 한 동역자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속에 성령의 내적 감동이 서로와 서로에게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스러운 선한 흐름이 막히면 안됩니다. 이에대하여 사도 바울은 엡2:21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된다고 합니다. 어느 한 군데도 막히면 안됩니다. 그러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웃 자라도 문제이지만 안 자라는 것은 더 문제입니다. 자라야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자라려면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참 신비롭지 않습니까? 연결이요? 도 닦는 것보 다 더 어려우면 어렵지 덜하지 않습니다. 마음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연결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22절 말씀처럼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를 성령님께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늘 겸손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5(화요일) 광화문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기도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설교를 하신 여민회 소속의 젊은 여목사님께서 두려움과 떨림 에대해 짧게 말씀을 주신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두렵고 떨린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 날 여민회 목사님께서 키에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을 이야기하며,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침묵하며,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하는 아브라함의 두려움과 떨림은 자유로운자에게서 오는 것이라 하면서,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면 이는 냉소적이거나, 맹목적이거나, 광기어린 집단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자유의 신앙인으로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모함으로 이어져, 그리스도의 신비에로 나아갑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은 요셉이 갖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에서 형들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는 믿음의 조상들과는 좀 다릅니다. 아버지 야곱처럼 하나님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한다거나,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직접 떠나라고 명령하거나, 대화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노예가 되었을 때에 기록자는 그 때부터, 주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의 꿈을 해몽할 때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셉의 하나님에대한 관계를 결정적으로 말해줍니댜.

                      “. .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

                        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하며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록자와 요셉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요셉의 삶은 어느 믿음의 조상들 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격동적인데, 그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은 잔잔합니다. 요란하지 않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 때부터 흘러내려온 하나님 신앙이 마치 요셉에게로 다 모여들어 열매를 맺는 느낌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신앙도 이제는 드러 내놓는 시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삶과 말을 통해 보일 듯, 말 듯 잔잔한 파도 너울같이 드러나는 것이 맞습니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드러나는 것. 교회입니다. 누가 역사하는지 모르지만, 그 열매가 맺혀지는, 성령의 역사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족장들을 향한 구원의 손길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결국 요셉의 가족 모두가 이집트로 이민을 가게 되고, 이 후 이스라엘은 400년이라는 기나긴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왜 이스라엘은 이 아픔, 이 고난을 받아야만 할까요? 죄가 많아서요? 운명이 그래서요? 400년의 고통과 아픔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할 때에 그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마치 엡1:4절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한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통스러운 노예생활을 하게 하시고, 바로에게서 구출해 내심으로 하나님이 단지 개인이나, 한 종교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과 우주, 그리고 역사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요, 경륜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모든 과정의 포인트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 온 피조물의 구원에 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에 닿아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교회로 이어집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삶의 전부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동네에 하나 밖에 없을 때여서, 모든 것이 교회로 향하였었는데, 그 당시 좋고, 새로운 것은 다 교회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것들이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힘든 것은 그나마 교회생활이 종교적으로 익숙해져 가면서, 사모하고, 두렵고, 떨리며 설레는 마음이 다른 바램들과 뒤섞여 버립니다. 하나님 신앙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어제와 오늘이, 예배당이, 주일에 보는 성도들과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에 익숙해져 갑니다. 감동도 새로움도 시들합니다. 그러나 안에서 성령의 감동을 따라 흐르는 맑은 샘에 닿아있으면,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주일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 화해와 용서와 새로운 힘과 삶의 의미와 회복이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교회가 이러이러하게 합시다 할 때는 귀를 고추 세우고, 마음을 추수려, 내 주변의 여러것들을 멈추고 교회신앙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집중해야합니다. 그래야 다중화된 생활 속에 그나마 성도의 삶이 지켜질 수가 있습니다. 신앙은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2:23에서 교회는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라 합니다. 무엇이 충만한가요? 우리 교회에 무엇이 충만해야할까요? 다 알지 않나요? 사도 바울이 알기 원한다고 한 마음이 이런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무엇이 충만해야하는지 다 알잖아요?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들어서 아는 것이 내 반복되는 바쁜 일상 속에서 빠져나와 교회로 세워지려면 기도해야 하고, 성령의 감동에 민감하여 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에 성령을 따라 움직여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모해야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좀 더 멀리 나아갑니다. 3:10은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고자 한다고 합니다. 벅찬 사명이고, 왜 우리가 뻔한 삶이 아니라 감동적인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대한 답입니다. 그래서 18,19절은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아니라, 지금 고기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이며, 내가 교회입니다. 이 벅찬 삶의 주제를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정신이 버쩍 들지 않나요. 삶의 의미가 살아나지 않나요. 감동이 있지 않나요. 무언가 나누고 싶지 않나요.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이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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