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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 (성령강림절후 열두번째주일,2017년8월27일)

mungge | 2017.09.01 11:29 | 조회 1414

제목거룩한 분노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본문: 느혜미야211~18

 

1. 예루살렘의 멸망과 귀향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숨져 가면서, 먹을 것 마실 것을 찾으며 달라고 조르다가, 성 안 길거리에서 부상당한 사람처럼 쓰러진다.”(애가2:12)

젖먹이들이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고, 어린 것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도 한 술 떠주는 이가 없구나”(애가4:4)

굶어 죽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칼에 죽은 사람이 낫겠다. 다쳐서 죽은 사람이, 먹거리가 없어서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사람보다 더 낫겠다.”(애가4:9)

 

남유다가 주전 587년에 멸망할 때의 모습을 보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쓴 예레미야 애가의 시입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노약자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힘이 없고,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지탱할 힘이 없는 아이들이 잔인한 전쟁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존재입니다. 남유다가 멸망할 때 침략자 바빌로니아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은 2년동안 예루살렘 성벽 바깥 사방에 흙 언덕을 쌓고 포위하여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으로 고통 받도록 압박을 가했습니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도성안에 먹을 것이 떨어지니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인육을 먹었다는 말도 전해집니다. 상상하기 힘든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무너졌고, 솔로몬 성전의 성물들은 하나 남김없이 다 약탈당했습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도망치다가 붙잡혔고, 그의 아들들과 신하들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모두 목베임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자신은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52:11)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었고, 주요 귀족들과 지도자들, 학자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남아있던 백성들은 이집트로, 시리아로, 요르단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무너지고 황폐해져버린 예루살렘 성. 바빌로니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포도원을 가꾸는 가난한 농부들만 남아있는 예루살렘 성.(52:16) 이곳에 어떤 희망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무너져버린 이스라엘, 황폐해져버린 예루살렘에 또 다시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희망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천년만년 갈 것 같았던 강력하고 잔인한 바빌로니아 제국이 50여년 만에 새롭게 세계사에 등장한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근동지역에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은 칙령을 통해 포로로 잡혀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그것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무너져버린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허락도 한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35년 동안 겪었는데, 50년만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그런데 50년이 지난 후니 실제 끌려왔던 지도자들과 귀족들은 많이 죽었을 것이고, 포로지에서 살아남은 노인들과 죽은 이들의 자녀들이 돌아갔겠지요. 하여튼 이 고레스왕의 칙령 이후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네 번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구약성경 에스라와 느헤미야에는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은 또 얼마나 걸렸을까요? 첫 번째 귀향이 주전 538년도에 이루어지고, 네 번째 귀향이 주전 445년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약 100년에 걸친 귀향이었습니다. 장작 100년에 걸친 귀향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우리가 읽은 느혜미야서의 느헤미야가 마지막 네 번째 귀향을 이끈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느헤미야는 원래 페르시아 제국의 조정에서 왕의 신임을 받는 고관이었습니다. 포로신분으로 살다가 출세를 한 경우입니다. 그가 맡은 직책은 왕의 술잔을 맡는 시종장이었습니다. 독살이 많았던 고대시대에 이 직책은 왕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하니, 느헤미야가 누렸던 권력을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한 나라의, 그것도 강력한 통치력을 보이는 거대한 제국에서 왕의 신임을 얻으며 호의호식 할 수 있는 느헤미야가 느닷없이 자신의 조국, 황폐해진 팔레스틴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왕에게 요청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누리던 안락함과 막강한 권한을 포기하면서까지 불타버리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함께 느헤미야 11~4절까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가 한 말이다. 이십년 기슬르월, 내가 도성 수산에 있을 때에, 나의 형제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다에서 왔기에, 이리로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은 어떠한지, 예루살렘의 형편은 어떠한지를 물어 보았다. 그들이 나에게 대답하였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나는 주저앉아서 울었다. 나는 슬픔에 잠긴 채로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뢰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나요? 저는 조금 의아합니다. 느헤미야가 왕의 시종장으로 권력을 누리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 시기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 얼마나 지났을까요. 예루살렘을 실제 멸망시킨 바빌로니아 제국이 그로부터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당한 것이 50년 뒤, 페르시아 제국 고레스 왕의 칙령이 있은지 대략 100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150년이 지난 뒤의 일입니다. 150년이면 자손으로 5대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느헤미야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또 부모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기에, 까마득한 선조들의 땅 예루살렘의 회복을 자신의 꿈으로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현실에서 그 꿈을 이루려고 했을까요?

 

2. 거룩한 비전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너무 값싸게 반복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되면서 그 단어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된 것이 꽤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신앙의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비전이라는 단어입니다. 요즘 웬만한 교회 교육관 이름은 다 비전센터입니다. 청소년부, 청년부 수련회 주제는 모두 비전수련회입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정말 소중한 말인데, 그 뜻을 깊이 헤아리기보다 너무 남발되면서 왜곡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됩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멀리 바라보거나, 미리 내다본다." 또는 "이상으로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묵시', '계시' 혹은 '이상'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의 성경 원어는 '하존(카존)'이고 영어 성경에서는 비전(visio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존'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 구절 가운데 잠언서 2918절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진다. (개역개정)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라고 번역되었는데 영어 성경에는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비전을 단순히 미래에 대한 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전은 망상에 가까운 꿈이나 개인의 욕망에 근거한 야망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비전은 내가 뭐가 되었으면 좋겠어. 미래에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지금의 나를 완전히 다른 나로, 지금의 이 세계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만들기 위한 열정이자 강력한 소원, 명백한 목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비전이란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불만(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동시에, 가능한 현실에 대한 아주 선명한 이해(앞을 내다볼 수 있는 상상력)의 복합체다'라고 했습니다. 비전이란 현 상태에 대한 불만과 분노에서 시작하고 대안에 대한 진지한 추구와 함께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성도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에게서 온 비전이니 "거룩한 비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거룩한 비전은 거룩한 분노 없이는 생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3. 현실에 분노하라,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라.

이번 청소년부 수련회에서 거룩한 비전이라는 설교를 하고, 아이들에게 드림 리스트를 작성하게 해 보았습니다. 자신이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으면 리스트를 적어보고, 그것을 몇 년 안에, 그리고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표시하라고 해 보았죠. 청소년들이 발표했던 드림 리스트를 소개해 해보겠습니다.

가장 많이 나왔던 거: ‘뭐가 되든 하고 싶은 일 찾기’ ‘진로 정하기’ ‘나에 대해 알기’ ‘대학가기’ ‘잘 생겨지기, 키 크기’(183, 168)

자신이 관심 갖는 분야: ‘기타 마스터’ ‘노래 한곡 만들어보기’ ‘하고 싶은 음악하기’ ‘소설 써보기’ ‘여행’ ‘페미니즘 공부’ ‘4외국어’ ‘선교’(하나님 알리기)

사회에 대한 바람: ‘통일현장 보기-시베리아 횡단열차 타보기

그 외: ‘좋은 집 사기’ ‘강동원 손잡기’ ‘성경정독’ ‘원하는 게임 전부 사기’ ‘최신폰 사기

부모님 집사주기’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죽지 않기

우리 아이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지요. 우리 청소년들은, 우리 자녀들은 진정한 꿈을 갖고 싶어 합니다. 자신들의 삶에 강력한 추진력을 일으키고, 뜨겁게 가슴을 뛰게 해줄 비전과 꿈을 찾기 원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우리 아이들이 꿈과 비전을 품고 맘껏 펼칠 수 있는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아이들의 꿈과 비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아이들에게 이 현실과 질서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니 말입니다. 괜한 불만으로, 섣부른 의기 심으로 지금의 세상을 바꾸겠다는 불손한 생각은 집어치우라고 교육합니다. 지금 타고 있는 설국열차가 죽음을 향해 폭주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일단은 저 기관실까지 가서 권력을 획득한 후에 뭘해도 하라고 설득합니다. 심지어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권력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니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느헤미야에게 주신 비전은 15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도 지워지거나, 망각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18~9절 읽기)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약속을 기억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품으시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이에게 세상을 품을 비전을 주십니다. 이 비전은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한 부모를 통해 자녀에게 유산처럼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사는 부모가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기억하는 부모님이 되어 주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현실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는 욕망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의 동포들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고향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에 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주저앉아 울며 슬픔에 잠긴 채로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1:3~4) 그는 제국의 큰 권력을 행사하고 누리는 사람 이였지만, 비참하고 부당한 현실에 놓여 있는 동포들과 연대의 마음을 가지며, 현실에 분노하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과 정의에 어긋나는 이 사회의 부당함, 부조리에 대해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의 동포를 악마로 만들고, 전쟁무기 경쟁으로 한반도를 생명이 아닌 죽음의 땅으로 만들려는 집단과 주변의 제국세력들을 향해 분노해야 합니다. 소중한 노동의 권리를 빼앗기고 거리에서, 옥상 광고탑에 올라가 목숨 걸고 싸우는 해고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를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좌빨이라고 매도하는 기득권 세력에게 분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자리로 초대받은 성소수자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예배당의 문을 걸어잠그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꿉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생명과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맙시다. 아니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노를 품은 비전의 사람 느헤미야의 마음을 움직이셨듯이,(12)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현실을 향해 분노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성령의 바람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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