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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로의 부르심(2005년4월10일,부활절세째주일)

하늘기차 | 2005.04.18 23:02 | 조회 2163
부활로의 부르심

2005년4월10일(부활절세번째주일) 빌립보서3:7-16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과의 깊은 관계를 구구절절히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자신이 그 동안 누렸던 모든 것을 예수님 때문에 포기했다고 합니다.

학문,계급,명예,재산---,자신에게 매우 유익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합니다.이유는 한 가지,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왜 바울은 그 당대의 사람이 누렸을 좋은 것들,예를들어 가족,직장,친구 등을 소위"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을까요?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이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이 그렇게 소중하였을까요?

빌3:10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 분의 죽으심을 본 받는 것입니다."그리고는 11절에서"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고 합니다.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이유는 바로 부활이었습니다.그래서 바울은어떻게 해서등지"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에 이를 수가 있을까요?어떻게 다시 살아날까요?우리는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에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합니다.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부활에 이르를 수가 있을까요?그리고그 부할 자체 만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물론 성경에도 마지막 때에 모두가 다,마지막 나팔 불 때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한다고 합니다."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빌3: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면서 "나는 이 희망을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할 뿐입니다."고 합니다.그러니까 부활은 감 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식의 기다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바울은 지금 부활을 희망하고,부활을 위해 달음질 친다고 합니다.애쓰고 수고하여 얻어낸다는 것입니다.그렇다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서 부활이 이루어 진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예를들어 농사꾼이 농사를 지을 때에 씨뿌리고,거름주고,풀 뽑고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햇빛과 비와 바람이 열매를 맺게합니다.생명의 부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그의 누이 동생 마르다와 만나 대화를 나눌 때에,마르다가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을 것이라"고 하자,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합니다.
그 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합니다.이것은 무슨 뜻입니까?예수님 재림 할 때에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은 믿지만,나사로는 이미 죽어 다시 살길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했지만, 마르다는 그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왜 마르다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을 못 받아들였을까요?

우선은 지금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분이 어떠한 분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그 분이 생명의 주님이신 것을 모릅니다.그리고 또한 마르다의 신앙은 관념적이기 때문입니다.머리로는 믿는데,온 몸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것입니다.이것은 단지 마르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우리는 예수님이 문 꼭꼭 걸어 잠그고 무서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20:27)

그렇습니다.마르다도 그렇고 도마도 그렇고,이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부활은 믿지만 그 믿음이 내 몸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주님 앞에 무릎꿇은 어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심정일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믿기는 믿는데 아직 그 믿음이 온 몸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믿지만 믿음없어하는 그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간구를 주께서 들어주십니다.

믿음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믿음은 "있다","없다"라고 할 수 있는 거이 아닙니다.있다고 해서 잇고,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믿음은 인정받는 것입니다.그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사오니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하고 주께 부르짖을 때,주께서 그 귀신들린 아버지의 아타까워하는 마음,그리고 주님께 무릎을 꿇는 마음을 인정하셔서 그 아이를 괴롭히던 귀신을 내어 쫓아,그 아이를 구원하셨습니다.

믿지만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 마음이 바로 마르다의 마음이요,도마의 마음이고,우리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변화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그러나 그 믿음이 우리의 현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의 부활에대한 바울의 신앙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부활신앙의 한 단초가 됩니다.
바울은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나누고,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
를 바랍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어느날 갑자기 한 순간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그리스도를 알고,부활의 능력을 깨닫고,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그리고서야 마침내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의 부활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과정,즉 고난,죽음.깨달음,그리스도와 하나됨---등,이런 신앙의 과정을 통해서 부활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부활은 어떻게 보면 한 순간,한 순간씩 준비되고 만들어져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실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부활에대해 거듭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은뿐 아니라,그 이전 부터 부활은 성경을 통해 계속적으로 말씀되어 온 것 이었습니다.그러나 정녕 주께서 부활하시자 그 부할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아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마 같은 사람들,그들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할하셔서 아무 사람에게나 다 나타나시지는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은 부활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부활을 보이셨습니다.다시 말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것입니다.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듯이,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듯이,볼 수 있는 눈,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 만이 예수의 부활을 볼 수 있습니다.내 생각 같아서는 그 당시의 빌라도,헤롯,가야바,그리고 군중들에게 본 때 있게 나타나셔서 "자!봐라!,내가 말한 대로 부활했다."라고 하실수도 있지만,주께서는 볼 수 있는 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때,주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지만,주님은 주님과 함께 3년간 한 솥 밥을 먹으며 지냈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부활을 보이셨습니다.베드로-12제자-오백 형제-야고보-모든 사도-만삭되지 못한 자와 같은 바울에게도 부활을 보이셨습니다.바울은 고리도전서15:3에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부활은 이렇게 창세 때부터 주님 다시 오실 종말의 때까지,아니 창세 이전의 때부터 오랜 동안 준비되어 온 것입니다.우리는 바로 이 부활을 위해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주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는데,이것은 단지 마르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모든이에게,예수님 다시 오실 때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믿사오니,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하는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부터 시작된 인류 구원의 역사의 한 정점에 서 있으며,주님은 그 구원의 역사의 한 정점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장차 있을 부활이 아니라,지금 살리라는 것입니다.지금 구체적으로 부활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과연 지금 나에게,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 부활은 어떤의미가 있을까요?

고기교회 처음자리 동산에 봄이 찿아왔습니다.매년 보며 느끼는 것은 그 자리 그 곳에서 꼭 작년에 보았던 그 꽃을 다시 본다는 것입니다.제비꽃이 튤립을 피워내지 않고,노루귀가 다알리아를 피워내지 않습니다.꽃들은 꼭 자기자리에서 자기를 피워냅니다.그런데 그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습니다.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다른 자리,자기 자리 아닌 것을 넘보고,본래의 자기가 있는데, 자기아닌 다른 자기를 피워냅니다.부활은 아마도 그동안 눌려왔던 자기 자신을 피워내는 것,그것이 "지금 살리라!"는 말씀의 부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욕심,이기심,미움,증오,불평,불만 등을 통해서 만들어진 거짓 나를 버리고,하나님이 나에게 거저 주신 본래의 내 모습을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 마치 새 순이 돋듯이 - 찿아 피워내는 것,그래서 기쁘고,즐겁고,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지금 살리라"는 부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아무 쪼록 타인이 아닌 나의 부활의 꽃을 찿아 피어내는 여러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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