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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가득한 희망(2005년8월28일,성령강림절후열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5.09.01 20:19 | 조회 1734
사랑 가득한 희망

2005년8월28일(성령강림절후열다섯번째주일) 롬5:1-5
오늘 본문 말씀 롬5:2,3에서 사도 바울은 2가지 자랑에대해 말씀합니다.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는 희망에대한 자랑 거리이고,또 하나는 환난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하는 것에대한 자랑거리입니다.그러면 이러한 소망을 누가 누릴까요?누가 이런 소망의 자랑거리를 얻을 수 있을까요?오늘 말씀 1절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한 사람들은 이렇게 소망하는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있습니다.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최근 축구 선수 박지성이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유나이티드 맨체스타에서 뛰어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매일 언론의 스포츠란에 빠지는 적이 없습니다.내용은 그렇습니다.신형엔진,어느 포지션도 가리지 않고 소화해 내는 박지성이라고 합니다.박지성을 표현하는 많은 기사들이 떠오르는데,이 중 박지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언론,팬,가족,구단주,팀동료의 이야기 일까요?아닙니다.감독입니다.박지성은 감독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빨리 파악해서 감독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으로서 성도들은 어떻게해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기독인이라는 것은 바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그런데 홍수가 나면 온통 물 천지여도 정작 마실 물은 없듯이,이 곳,저 곳에 믿음의 일,글,행사들,모임들이 많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흔치 않다는 것입니다.실제로 예수님은 한 과부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때에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는가?”라고 합니다.그 밤 낮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소원을 어찌 들어주지 않겠느냐 하면서 ‘주님 다시 오실 때에 그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을까?’합니다.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 말입니다.과연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오늘 읽은 로마서 5장의 말씀은 믿음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롬1:17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라고 하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라고 합니다.그런데 4장3절 에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리고 6절 말씀에서도 보면 행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바로 이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바로 이 의로워진다는 믿음의 전통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이 되는데,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약속을 새롭게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정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도 시32편 1,2절의 말씀에서 보면 죄용서 받는,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는 믿음에 대해 다윗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복 되어라!거역한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사람!
주님께서 죄 없는 자로 여겨주시는 그 사람!
마음에 속임수가 없는 그 사람!그는 복되고 복되다!”

주께서 죄 없는 자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죄가 있어도 없는 것으로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괜찮다는 것입니다.이렇게 아주 중요한 성경의 흐름이 있는데 이 흐름이 하박국에게서도 나타납니다.하박국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치러오기 직전의 시대에서 활동하였는데,그 당시의 정치,경제,종교 모두에서 부정,부패,타락을 보는데 어느 한 계층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왕에서 백성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백성이 폐역한 모습을 보면서,그래서 하나님께 이 못된 백성을 심판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를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을 들어 심판하려고 합니다.바벨론은 이스라엘보다 더 타락한 우상 숭배의 나라아닙니까.그러니 하박국이 불만이 커져서 하나님께 왜 하필 바벨론입니까?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그 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말씀하시는데 이 때 특히 2장 2-4절 말씀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에 감동을 먹습니다.이 패역,타락,가치기준이 무너진 세상 속에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이삶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하박국이 4장2절에서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무화과 나무에 과일이 없고,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지라도,올리브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밭에서
거두어 들일 것이 없을지라도,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모든 가치 기준이 다 무너져 이 제는 이 나라 망해버려라 하고 터져나오는 감정을 품어 안아 위로해 준 말씀은 “믿음으로”였습니다.하나님 믿는 믿음으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4장 마지막 절에서 “나는 마치 저 산등성이를 힘차게 뛰어 올라가는 암사슴 같이 살리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하박국을 구해준 것이 바로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성경 속에서 속살 같이 흘러온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믿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믿음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말씀 드렸지만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는,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히 애를 쓴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었다는 것입니다.사도바울은 롬4장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가 한 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아무런 자랑거리가 있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일으켜 세울 때 그 앉은뱅이를 보면서“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다”고 하면서 “일어나라”합니다.그러자 이 앉은뱅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납니다.그런데 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신으로 모시고 화환과 황소를 바치고 난리 굿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기적은 그 기적 자체에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서 지금 전하는 말씀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겸손히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문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기적만을 본다는 것입니다.이것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은헤를,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체우려는 것입니다.기적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려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제사를 드리려 한 것입니다.하나님을 단 위에 모셔놓고 단 아래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체우려 하는 것입니다.자기가 마음 먹은 일을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라는 것”이라고 외칩니다.

사도바울은 앉은뱅이를 바라보면서“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가 인정받는 믿음에대해서 들었는데 그것은 아무런 한 것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과연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말씀했듯이 돌아서는 것입니다.진정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무엇때문 일까요?가시 떨기 타는 불꽃 가운데에서 모세가 돌아선 것입니다.모세가 귀한 것은 이집트의 왕궁 생활 40년과,광야 생활 40년 동안 모세는 자신의 삶을 헤프게 하거나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특히 광야 40년 동안의 곤욕의 생활 속에서 모세는 자기를 지키면서 준비하였습니다.왕궁에서의 그 화려함을 다 빼앗기고 광야로 내 몰렸을 때,신세 한탄하며 먹고 마시면서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고 자신을 준비하며,지킨 것입니다.결국 가시 떨기 불꽃 가운데에서 신비한 하나님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을 돌이킵니다.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을까요?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자기의 욕망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그런데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특별이 한 일이 있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까?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낼 때 특별히 한 일이 있습니까?없습니다. 한 가지 한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께 돌아선 것입니다.성경에는 믿음의 전통이 있는데,그 믿음의 전통 중에 한 가지는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가던 길에서 하나님께로 향하여 돌아설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랑거리를 주셨습니다.어떤 것입니까?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며,환난 속에 절망하지 않는 희망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5절에서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우리를 실망시키는 희망,소원,바램이 있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좋은,그리고 합당한 것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구했다는 것입니다.처음 볼 때는 좋은 것 같은데 시간이 갈 수록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바램이라는 것입니다.좋은 것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그럼 그 희망이 어디에서부터 온다구요?하나님이 인정하는 거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그러니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라는 것입니다.정말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엉뚱한 것 합당치 못한 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이 시대를 바라보면 출세,물질,욕망...모든 것이 돈에 표준이 맞추어진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공교육도 가정도,정치,문화... 경제사회의 모든 분야가 경제를 우선하다 보니 사람들이 망가집니다.서로가 서로에대해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합니다.

우리 준영이가 학업이 다소 떨어집니다.그래서 좀 특단의 조치를 취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그냥 좀 두고 보려고 합니다.스스로 자연 스럽게 자신의 학력을 다소 처지지만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지켜보기로 한 것입니다.기다려 주는 것입니다.이것은 바로 신뢰입니다.자녀를 키울 때,아니 많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기다려 준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자녀를 키우는 것이 마치 새를 손으로 붙잡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꽉 잡으면 죽고,풀면 날아서 도망가고,그러니 이 새를 어떻게 키울 수 있나요?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요?그렇습니다.사랑으로 키우는 겁니다.생명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지 못해요,정말 참된 사랑을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견디지 못합니다.아마 인생은 사랑 속에서 태어나서,사랑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그런데 오늘 이시대가 참되게 사랑하고,인정해 주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큰가하면 끝이없습니다.어릴 때는 물론이요,어른이 되어서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부부사이에,부모와 자녀 사이에,이웃 간에,직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사랑의 욕구,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늘 따라다닙니다.아마 우리가 늘 헛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인정 받고 싶어하고,사랑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바로 이것이 우리의 죄의 모습,하나님에게서 떠난 공허한 인간의 모습입니다.무엇인가 관심을 받고 싶어합니다.그러나 이미 가치기준이 무너진 세상 속에 사는데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부터 참 사랑을 받지 못한단 말입니다.참된 사랑 받지 못하고,인정 받지 못하고 물질 욕망,성적 욕망의 가치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허한 삶의 사회 속에서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들을 불러서 거짓된 소망이 아니라,참된 소망을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어떤때는 하나님은 거짓된 소망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려고 우리를 어렵게 하시고 견디기 힘들게도 하십니다.혹독한 어려움을 주시기도 합니다.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살 희망까지 끊어져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다고 할 정도의 혹독한 고난에 우리를 내어 모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내 것이라 생각하는 것,나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우리를 분리시킨다는 것입니다.나의 영욕에 붙잡혀 있는 우리를 그 혹독한 시련을 통해 돌아서게 하셔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혹독함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제 정말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신앙인으로 세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전에는 말씀이 안들어 옵니다.그런데 이제는 말씀 한 마디 마디가 다 기억이 납니다.주님의 은총을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 듯이 죽죽 빨아들입니다.그러니 내 안에 있던 무질서한,그리고 공허한,그리고 어두운 욕망,욕정들이 다 쫓겨갑니다.내 안의 악행과 나쁜 습관들이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그 하나님의 말씀이 새록 새록기억나면서 말씀과 반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 물러나고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덧 입혀진다는 것입니다.모세가 80년 걸렸습니다.야곱의 온 인생은 이 과정 속에 받쳐진 것입니다.헛된 것에서 돌아서는 믿음.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믿음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이런 혹독한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희망으로 인도하십니다.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을 보니까 환난에서 인내로 그리고 단련된 인격을 통해 희망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 혹독한 시련을 격는 과정 속에서 희망을 봅니다.무슨 소망을 봅니까?예수 그리스도에대한 비죤을 보지않습니까?인류를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에대한 희망을 봅니다.교우여러분 이것이 참된 희망입니다.지금까지 내가 바라보았던 희망은 우리를 모두 실망시킨 거짓된 희망이었습니다.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과 환란 가운데서 인도하신 그 희망은 참 희망입니다.그런데 그 것이 왜 참된 희망인가 하면,롬마서 5장5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참된 소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을 통해 환난 가운데서 희망으로 인도하시는데,5절 말씀을 보니 성령을 통해 사랑을 우리 마음 가운데 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사랑을 받지 못해,인정을 받지 못해 사람들이 공허한 일을 합니다.패륜적인 일들이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는데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주신 희망이 참으로 귀한 것은 그 희망 속에 사랑이 넘쳐난다는 것입니다.우리 안에 사랑이 없으면 욕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사랑에 목말라 엉뚱한 것을 찿아다니다가 공허하게 인생을 마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희망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희망 가운데 사랑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디모데는 마지막 때에 사랑이 없다고 하였습니다.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하나님이 없는 사랑에 목말라하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슨 사랑인가요?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여러분 그 사랑을 우리가 돈 주고 받았습니까?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해서 받았습니까?값없이 하는 일 없이 거저주시는 은혜가 아닌가요?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믿음의 전통입니다.교우 여러분 돌아서는 믿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정말 돌아섬으로 참 소망,그 사랑을 풍요롭게 맛보는 그 하박국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믿음을 기적과 연관시키려 합니다.그 바탕은 욕망입니다.우상이요,욕심입니다.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열광하며 마음껏 구합니다.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모세를 통해 기적으로 내려주신 만나를 먹었던 너희 조상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으니 이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내 빵을 먹으라고 합니다.맞습니다.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기적의 40년이었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기적의 만나를 베푸는 이유가“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말씀이 아니라,떡으로만,기적이 보여주는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눈에 보이는 떡으로 살았습니다.그래서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무엇을 해서 가 아니라“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입니다.바로 사도 바울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칠 때 보았던 믿음이 바로 그 믿음인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이 앉은뱅이에대해“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이런 순전한 믿음의 은혜,회복의 은혜를 보고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신으로 모시고 화환과 황소를 바치고 난리 굿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그 때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라는 것”이라고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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