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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떨림으로 2(2006년 1월22일,주현절후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6.01.22 13:38 | 조회 1841
두렵고 떨림으로 2

2006년 1월22일(주현절후세번째주일) 빌2:12-18

지난 주에 두려움에대한 말씀을 나누었는데,이 두려움이라는 것이 자기인식의 느낌이라고 했습니다.그러나 주일을 지키지 못해서,아니면 봉사를 게을리 하여서와 같은 자기인식은 아닙니다.그렇게 되면 그것은 윤리요,의무와 관련됩니다.이 두려움은 그러한 두려움이 아니고,다시말해 자기의 행위나,생각,계획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이것은 은혜로부터 오는 것입니다.자신에게서부터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마25의 달란트 비유에서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서워하여 물러가서,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다고 합니다.또 창3:10에서 아담은"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고 하는데 이런 두려움은 자신의 행위에대한 결과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무엇이 나타날 때 섬짓하며 놀랍니다.두려워합니다.없다가 있을 때도 놀라지만,곁에 있는데도 까마득히 잊어버리다가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이 있습니다.아마 하나님 만나는 두려움도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일이 생길 때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그런데 우리는 자꾸 윤리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창28:16절에서 그는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라고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고 합니다.그리고는“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합니다.하나님을 만난 두려움입니다.

속임수를 써서 장자의 축복을 받고 형이 두려워 정신없이 도망나오던 중에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형은 두려워 할 줄 알면서 하나님 두려워 할 줄은 모릅니다.자기가 저지른 일에 사로잡혀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사실 자신을 진정으로 도와줄 분은 하나님인데도,미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그러다가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깨달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바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 때,두 배 가득 하고도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놀라“주님,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친구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고 합니다.이 때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놀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잘 못 하여 야단맞는 느낌의 두려움이 아닙니다.오히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5장5에서 보면 밤새도록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니 보통은 아니신 것 같으니 어디 시키는대로나 한 번 해 보겠습니다라는 투입니다.그래서 밤 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에 생각이 머물러 있습니다.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일상적인 관념에서 깨어납니다.영적 잠에서 깨어나니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두려움으로 느껴집니다.이 두려움은 윤리적인 죄의식이 아니라,자신의 습관,관행에서 깨어나는 구원의 두려움인 것입니다.

호렙산 타지 않는 가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때 모세는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모세가 무엇을 잘 못해서 놀란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모세는 자기 민족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여,거들어주다가 지금의 처지에 까지 이르른 것입니다.그러나 40년 동안 반복되는 양치기의 일상성에 매몰되어 이대로 인생이 끝나는구나 하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습관적인 일상,반복되는 삶의 일상성 속에 찿아오셔서 잠든 모세의 영혼을 깨우십니다.사실 하나님은 늘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그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시간에 타지 않는 가시덤불 불꽃을 보며 만난 것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하나님을 경험할 때에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이 여인은 윤리적으로 보면 하혈하는 여인으로서 당시에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처지 였지만 용감하게 주님께 찿아온 사람입니다.오히려 당시의 율법은 그러한 여인을 정죄할 텐데,오히려 그러한 법률적,윤리적인 두려움을 무시합니다.이 여인의 두려움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바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병의 치유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맛 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거룩한 두려움,구원의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런 거룩한 두려움의 극치를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이라는 저서에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사흘길에서 볼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창22:12을 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이삭을 향하여 칼을 높이 들어올리는 아브라함에게 다급히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네가 너의 아들,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고 합니다.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알았다고 합니다.“아니 하나님도 너무하시지 그 것 알아보려고 그 해괴망측한 일을 아브라함에게 시켰단 말인가요?하나님 해도 너무하신 것 같습니다.아니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하고 물어보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자의 신앙의 자리에까지 끌어 올리시려고 하십니다.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쑥쑥 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그렇게 간절히 구한 상속자가 늘 아브라함 곁에 있으니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위기입니다.아브라함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이삭에게 기웁니다.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하나님 은혜가 가물 가물합니다.이삭이 신주 단지가 되었습니다.

교우여러분!이삭이 아니라,하나님이십니다.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삭이 있습니다.이것 없이는 못살아 하는 이삭이 우리에게 있습니다.그 이삭이 없기에 신세 한탄하며 죽겠다고 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은 이삭이 없이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 이삭에 발이 묶이는 경우가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통해 자손 대대로의 축복을 누릴 것을 약속하였지만,지금 하나님은 그 축복의 씨앗인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합니다.아브라함의 잠든 영혼을 깨우시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은 정신이 버쩍 났을 것입니다.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앞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숲 속에 준비해둔 양을 통해 구원합니다.이 때의 아브라함이 감당해야할 몫은 변치않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이것이 은혜이고 구원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이야말로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게 합니다.그런데 이 구원을 누가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까?오늘 말씀 13절은 바로 우리가 이루어야할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함께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
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뜻을 정하게 하시며,그리고 행동하게 하시는 것입니다.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감동하실 때 지금 하던 일,가던 길 멈추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이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그 때에 우리는 그 마음의 감동에 따라 예라고 할 것에 예하고 아니오 할 것에 아니오 하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값없이 댓가 없이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될 때에 이스라엘의 계획에 따라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여 강퍅한 바로와의 싸움을 거쳐 홍해를 건너 광야 40년의 과정을 거쳐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하나님의 섭리요,은총입니다.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심은 바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습니다.자기를 낮추는 모습이었습니다.자기를 낮추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기쁘시게 일하십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그 것도 마굿간 말 구유에 태어나게 하시어 공생애 3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그 때에도 하나님이 기쁘시게 일하신 것은 바로 자기를 낮추는 두렵고 떨리는 처녀 마리아의 마음으로부터 아니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실 때,아니 믿음의 조상들을 포함한 믿음의 선배들의 스스로 낮추어 두려워하는 마음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14절 말씀을 보면 불평과 시비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지난 수요일 시 100편 말씀을 나눌 때 “기쁨으로 섬기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어찌 기쁜 일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어찌 즐거웁고,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다윗은 시100편 2절에서 기쁨으로 섬기라고 합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지난 번 수요일에 성도의 삶이란 주님 안에서 사는 삶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은혜에대한 감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은혜가 없으면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받은 것이 없는데 어찌 섬김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섬긴다는 것이 나누는 것인데,내가 가진 것이 없는데 어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재산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지식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나눌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우리 마음 안에 찿아 오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신데,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일하지 않으시면 기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무만 남는 것입니다.여기에 불평이 생기고,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입니다.오늘 말씀에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라고 합니다.상황과 조건,눈에 보이는 즐거움을 찿을 때 차별과 구별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구부러지고 뒤틀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송명희 시인이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송명희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송명희 시인의 마음 가운데 오셔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구부러지고,뒤틀리면 나누지 못합니다.그러나 송명희님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구부러지고 뒤틀린 중증 뇌성마비 신체부자유자이지만 그 분의 마음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송명희님을 기쁘게 하십니다.감사하게 하십니다.그래서 송명희님으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증언하게 하십니다.이 한마디의 고백이 우리를 구원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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