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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떨림으로(2006년 1월15일,주현절후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6.01.15 13:39 | 조회 1637
두렵고 떨림으로

2006년 1월15일(주현절후세번째주일) 빌2:12-18

인터넷을 할 때 가장 짜증스러운 것은 첫 화면에 자기가 원치 않는 스팸이나 팝 업이 뜰 때 그리고 이 메일에 원치 않는 글들이 올라 올 때입니다.몇 일 전에는 고기교회 홈피 게시판에 원치 않는 글이 3건이나 올라와서 급히 지워버렸는데,이런 종류의 글들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함 없이 표현합니다.그리고 대부분 이러한 글들은 건강하지 않거나,좋지 않습니다.상대의 동의를 구할 수 없는 내용이니까 당사자를 무시하고 찿아서 글을 올리겠지요.사탄도 그렇습니다.사탄은 우리들에게 찿아올 때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다가오는데,일방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찿아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탄이 그 정체를 드러낼 때 전설의 고향의 소복 입은 귀신이나 드라큐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물론 전쟁이나,군부 독제의 억압 통치와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도 하지만,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 보다 더 교묘하게 우리들에게 찿아와 우리를 힘들게 하는데,고후 11:4에 보면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자기를 드러낸다고 합니다.사탄은 컴퓨터 바이러스나,해킹이 컴퓨터를 다운시키거나,아예 작동 불능하도록 만드는 것처럼,우리의 인격,가족,삶 자체를 파탄에 빠뜨리려고 합니다.또한 나라와 나라 사이에,민족과 민족 사이에 분쟁을 일으켜 전쟁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특히 우리의 감정을 잘 이용하는데 예를들어 화를내고,비방,질투하고,미워하기도 하고,겁을 내며,걱정하는 등...그리고 자기를 비하 하는 열등감이지나,아니면 그 반대의 오만불손함 등 이러한 것은 본래의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인데,스스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찿지 못하고 피해 숨는 것이 바로 한 쪽으로는 열등감이고,다른 한 쪽으로는 오만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이러한 감정들,그리고 합당하지 못한 자기의 모습은 적지않게 두려움에 그 바탕을 두는 것 같습니다.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도 두려움에서부터 옵니다.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거의 부정적인 감정에만 작용을 하는가?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데,그렇다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통해 구원을 이루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결론적으로 말하면 우선 ‘아니요!’입니다.

창3:10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고 고백을 합니다.아담이“벗은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그러자 하나님께서“네가 벗은 몸이라고,누가 일러주더냐?”고 합니다.그러면서“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네가 먹었느냐?”고 합니다.벗은 것이 두려운 것을 누가 일러주었나요?뱀이 말 해 주었나요?하와가 이야기 해 주었나요?아닙니다.

두려움은 자기 스스로에대한 자기 인식입니다.스스로 두려운 것을 자기 자신이 느낀 것입니다.그러면 두려움 자체는 나쁠까요?좋을까요?창세기는 우리에게 인간본질과 실존에대한 근원을 언어의 상징을 통해 말해줍니다.말씀그대로입니다.두려움은 좋은 것도,나쁜 것도 아닙니다.어떤 가치 기준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말씀 그대로 벌거벗은 것에대한 인간의 느낌입니다.다시말하면 벌거벗었다는 것은 연약하다는 것입니다.부족하다는 것입니다.가난하고,결핍이며,유한하다는 것입니다.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벌거벗음을 알게된 것입니다.그런데 이 벌거벗은 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나요?하나님이 바로 그 부분을 아담에게 묻고 있습니다.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한 말씀 더 하십니다.“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네가 먹었느냐?”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 아니야?’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입니다.어?그럴리 없는데,어떻게 알았지,벌거벗은 것을 스스로 알았다면,어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했군 그래!선악과를 따서 먹었군!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가리지 않고 다녔습니다.선악과를 따 먹은 이전이나 이후나 벌거벗은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서 먹은 후에,즉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후에는 벗은 것이 두려워 진 것입니다.은혜 안에서는 우리의 부족함,연약함,유한함,가난함,결핍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두려움이 우리를 부끄럽게도 하고,부족한 것을 느끼니 그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채워야 합니다.유한하여 무한에대한 갈망이 끝이 없습니다.약하여 강한 힘,수퍼 울트라 짬뽕에대한 욕구가 끝이 없습니다.부족하여 부에대한 욕망이 하늘 끝에 닿습니다.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집단으로 힘을 기르기도 합니다.인류의 역사는 이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흘러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에 하나님에게로 가는데,자꾸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지난 주 말씀처럼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스스로 비워 종이되는 모습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자리에로 나아가야 합니다.이것은 본래의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스스로 낮추어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우리를 지금 현재의 이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병든 모습 그대로,무능한 모습 그대로,나쁜 습관에 사로잡혀있지만 그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지금 아주 상황이 않좋다고 생각하십니까?도저희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용서할 수 없습니까?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요?교우여러분!사실은 그것이 본래 우리의 모습입니다,그 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실체가 있나요 없나요?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두려움은 느낌이라 했습니다.벌거벗은 것에 대해 두려워졌다는 것입니다.벌거벗은 것이 왜 두려운 것인지는 심리학자에게 돌리고,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벌거벗은 것에대해 두렵다고 느끼는 것은 이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지요?지난 주일에 코치 카터라는 영화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는데,코치 카터가 3년 연속 꼴찌를 하는 거의 무승의 리치몬드고교 농구팀에게 시합에 나가는 것이 두렵냐고 물어봅니다.그러니까 두렵다고 합니다.참피온 훈련을 강하게 받았지만 3년 동안 한 번도 승리 다운 승리를 못했는데,게임에 임할 때 마다 늘 타성에 젖어 이미 패배를 기정 사실로 하고 경기에 임했는데,이제 과연 승리할지 두렵다고 합니다.그 때 코치 카터가 이야기 합니다.본래 두려움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단지 두려운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요,그렇습니다.마음이 두렵다고 느끼는 것이지 두려움 그 자체는 없는 것입니다.그러니까 마음이 두렵지 않으면 두렵지 않은 것이고,마음이 두려우면 두려운 것입니다.그야말로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면 벌거벗은 것이 두렵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하면 그럴 수가 있을까요?시편 103편6,7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
문이며,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자신이 티끌이라는 것입니다.이것은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무엇이 두렵다고 합니까?자기가 티끌,즉 흙에서 왔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주님을 두려워 한다고 합니다.그래서 어떻다고 합니까?가엽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한글 개역에는 불쌍히 여긴다고 나와 있습니다.주님을 두려워 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합니다.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말씀에서 아담은 벌거벗은 것이 두렵다고 하지만 오늘 시편 말씀에서 다윗은 주님이 두렵다고 합니다.창세기에서는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아담이 자꾸 범죄한 것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변명을 합니다.책임을 떠 넘깁니다.그러나 다윗은 자신은 티끌,창세기로 표현한다면 벌거벗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두렵고,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벌거벗은 COMPLEX의 역사가 아닌지?이 벌거벗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회해 보려고 애 쓰지만 결국은 벌거벗음에대한 있지도 않는,없는 두려움 앞에 무릎을 꿇는 형국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그런 의미에서 두려움이라는 것이 벌거벗음에대한 인간의 당연한 자기 인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짓 두려움과 참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빌립보서의 말씀은 바로 참 두려움에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데,이러한 참된 두려움은 구원을 이룹니다.

오늘 빌립보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 합니다.그 다음 13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그 일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바라고,그리고 그 구한대로 행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이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어느 곳에 이르는 것,어느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뜻하는 일을 우리 안에서 마음 껏 할 수 있도록 마음 활짝 열고,다시 말해 스스로 낮추어,자기를 비워,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내 마음에 오셔서 늘 함께하는 삶입니다.

15절에서는
“흠이없고 순결해져서,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출발점이 두려움,떨림입니다.공포와 전율입니다.코치 카터라는 영화에서 처음부터 카터가 내세우는 약속 지키지 못하겠다고 농구를 그만둔 학생이 하나있는데,동네가 동네이니만큼 농구부를 떠나 마약을 밀거래하는 조직의 심부름꾼 역할을 합니다.그러다가 다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농구부에 들어와서 열심히 농구를 하다가,체육관 폐쇄 때에 또 농구부를 떠나는데,이제는 본격적으로 마약거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그러다가 길거리에서 반대파 조직에게 함께 가던 조직의 선배동료가 총에 맞게 됩니다.거기서 두려워 떨며 곧 바로 농구부 코치 카터의 집에 찿아갑니다.그리고는 두려워 떨며 그동안 자기가 잘 못 했다고 모든 약속을 다 지키고 벌도 받겠다고하며 애원을 하는데,그 때 집에 있던 카터는 자기에게 찿아온 아이를 품에 안으며,아무 조건없이 그 아이를 그 모습 그대로 맞이합니다.

교우여러분!이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불확실한 미래에대하여,자신의 무능,가난,나쁜 성격 등... 이러한 것들이 두려워 원치않는 일을 하게 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벗은 모습 그대로 주께 나갈 때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 들이십니다.아무쪼록 삶의 여러 가지 두려운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불쌍히여기는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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