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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이야기 4(천국잔치,2005년11월13일,성령강림절후스물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5.11.14 10:35 | 조회 2147
포도원 이야기 4(천국잔치)


2005년 11월13일(성령강림절후스물여섯번째주일) 마22:1-14


지난 3 주 동안 우리는 계속 예수님의 포도원의 비유에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하루 일 한 값으로 똑같이 1 데나리온을 주는 포도원 주인,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두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부모의 비유,또 포도원을 탐내어 주인의 종과 아들을 죽이기 까지 한 농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원 이야기에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예수님 때 뿐만아니라,구약에서도 특히 지난주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들은 포도원 이야기를 보면 주인이 포도원을 기름진 땅에다 만들어 망대를 세우고,술틀을 파고,포도 중 최고의 포도 품종을 심었는데,기대했던 좋은 포도는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이외에도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레위기나 출애굽기의 율법서에 보면 포도원과 관련된 조항이 많이 나옵니다.가난한자와 이방인을 위해 수확기에 포도를 다 따지 말 것,포도원에 2가지 종자를 섞어 심지 말 것,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거두지 못한자를 군무에서 면제 시킬 것,이웃 포도원에 가서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조항이 있는데,그러나 그릇에 담아 가지는 말 것...요즈음은 수확기에 밤,사과,포도 등을 마음꺽 먹으라 하기도 하고,가지고 가라고 하기도 하는데,그런데 단 돈을 얼마씩 네고 가지고 가라 합니다.하나님의 말씀과 다릅니다.요셉의 술 맡은 관원장의 이야기도 역시 포도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이렇게 포도나무,포도원,포도주는 이스라엘의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삶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지난 3 주 동안 예수님께서 3 번이나 계속해서 포도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어떻습니까?우리에게도 이렇게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들이 있지요?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요?호랑이 이야기도 있지요.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구요.그런데 호랑이 이야기를 하면 어때요,이미 그 호랑이 이야기를 들으면,그 결론이 어떻게 날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압니다.떡 할머니 이야기.수수밭 이야기,곶 감 이야기...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포도원 이야기를 하면 전체적으로 그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그리고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쉽게 이해합니다.실제 예수님의 포도원의 비유도 그 당시의 이야기들과 많은 유사점을 가졌습니다.아마도 이 포도원 이야기 중에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로는 극상품 포도를 심어 좋은 포도 열매 맺기를 원했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는 이야기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좋은 포도원을 만들어 농사 잘 지으라고 농부에게 주었는데,그 포도원이 거의 폐허가 되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지금 이틀째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예루살렘 포도원의 일꾼들이 포도원을 망쳤고 오히려 이제 그 포도원을 가로체려 하고 있는 모습을 이 비유를 통해서 들려줍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아름다운 포도원을 세우고자 했지만,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잘못을 깨우치려고 하나님의 종들을 수 차례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아무리 매를 들어도 되지 않습니다.자녀들이 바람직한 길로 가는 것 같지 않을 때 매를 들면 어느정도 고쳐지겠지만,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매로 아이들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많은 매를 때렸지만 이스라엘을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방법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발상을 전환한 것입니다.바로 오늘 말씀이 그러한 비유의 말씀입니다.마22:1에 보면“예수님이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라고 하는데,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어떤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만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기존의 예언자들의 전통을 잇기는 하지만,그 이상은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을 망친 이스라엘을 책망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망친 것 문책하는 것이 아니라,새롭게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포도원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유대교는 이제 자신들의 공과와 업적들을 통해 종교적인 기득권 만을 챙기는 종교집단이 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신앙이 아니라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인도의 종교가 매우 깊고 큽니다.모든 종교를 흡수한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종교성이 큰 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계급제도라고 합니다.종교성이 깊으면 백성들이 자유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철저한 계급사회입니다.종교는 기득권을 지키려 합니다.하물며 유대교는 정치,종교,경제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유대교의 추종자들이 그 소중한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깰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추평교회를 담임하는 전생수 목사님이 얼마전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는데 유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그 내용을 보니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 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이 땅에서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 또한 감사하노라...”또한“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목회자로 살면서 목회를 위한 목회, 교회를 위한 목회를 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목회를 하였으니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어우러질 수 있으리라 확신하노라.”고 합니다.


어떤 기득권도 없이 예수의 복음을 쫓았던 한 목사의 아름답고 귀한 삶에 감동을 받았습니다.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들려옵니다.어느 유명한 복음송 여가수인데,이 분의 남편이 목회자입니다.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분을 부를 때 사모님 000하고 부르는 것에 이 복음송 여가수를 사랑하는 어느 분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왜 사모님이라고 부르느냐는 것입니다.자기는 복음송 가수 000이 좋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이 호칭을 가지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그런데 사모라 불리우면 어떻고,가수라 불리우면 어떠냐는 것입니다.그 호칭문제와 하나님의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이미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는 생각이 듭니다.교회가 세속에서 누리는 명예,권력,재물과 같은 것으로 체워져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바로 종교적 기득권만 앙상하게 남은 포도원에 오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그렇습니다!잔치를 벌인 것입니다.축제를 연 것입니다.잔치에는 말이죠!죄인이나,의인이나,거지나,부자나,누구나 지나가는 길손까지,다 참여하여 먹고 마시고 즐겁게 축하하며 기뻐합니다.주인으로부터 종에 이르기 까지,어린이 어른 등,그동안에 적개감을 가졌던 사람끼리 미워하며 등 돌렸던 사람들도 못이기는 척 하면서 함께 어울리다 보면 격이 없어지고,벽이 무너지고 덩실 덩실 춤추고,노래부르고 하면서 그야말로 그 날,그 시간은 모두가 서로 하나가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다 망가뜨린 포도원을 바라보며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 폐허가된 포도원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그렇습니다.우리가 어찌 망가져버린 포도원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우린 그저 초대받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오늘 읽은 마22:1-14은 바로 그 잔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그런데 이 결혼잔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스라엘의 생활 풍속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결혼잔치 같은 큰 잔치를 열 때 미리 초청장을 보낸다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초청장에는 언제 그 잔치를 여는 지에대한 구체적인 시간은 적혀있지 않고,때가 되면 다시 한 번 전갈을 보내 오라고 할 때,그 때 잔치에 참여한 다는 것입니다.이 때에 지혜로운 사람은 임박한 때를 생각하며 준비하며 기다리다가,전갈이 오면 곧 바로 잔치에 참여하지만,어리석은 자는 아직 시간이 충분이 남었다고 하면서 자기 일에 정신을 빼앗겼다가,전갈이 오면 일에 매여 그만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아두고,덜 중요한 것에 모든 공을 드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을 다 했는지 한 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하지 않아도 될 것에,없어도 될 것에 늘 마음과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는지요?그리고 그 결과에따라 울고,웃고 하며 헛된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는지요?

또 오늘 말씀 7절을 보면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진멸하고,그 동네를 불살렀다고 하는데 무슨 임금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잔인할 수 있나 할지 모르겠는데,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이 복음서를 A.D80-90년 경에 기록을 하였는데,그 때에 예루살렘이 로마에의해서 멸망한 것이 70년대인 것으로 볼 때,마태는 이미 로마에의해서 예루살렘이 예언대로 어떻게 처참하게 멸망했는지를 이미 체험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여간 임금이 베푼 아들 결혼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자,종들을 거리에 보내 초청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거지들,병자들,죄인들,이방인들,떠돌이들,어린아이 할 것 없이...모두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여기에서 초청을 받고도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있던 유대인들이고,거리의 초청받지 않은 사람들은 소위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이방인들,그리고 아이들이었습니다.쉽게말해 주변부의 소외된 사람들이 이 임금이 베푼 잔치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를 베푼 임금님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나아가다가 마침“예복을 입지않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왜 예복을 입지않았는지 물어봅니다.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그래서 종들에게 이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라고 합니다.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청함받은 자는 많되,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합니다.

오해 할 수도 있습니다.아니 잔치를 열였으면 다 와서 그저 즐기면 됐지 왜 또 예복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거야 하면서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이 이야기에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익숙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물론 에수님도 알고 있었겠지요.

하나는 임금이 초청장을 보낼 때 예복을 깨끗이 빨아 잘 준비하라는 당부도 미리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시하고 있다가 예복을 지참하지 못하고 잔치에 참여했다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는 이야기이고,또 하나는 임금이 초청할 때 잔치에 입을 예복도 함께 보내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전갈이 올 때를 기다리며 예복을 깨끗이 빨아 깨끗하게 잘 마련해 놓고 준비를 하는데,어리석은 사람은 그 예복을 홀대하여 그 예복을 입고 밭에도 가고,그 예복을 입고 일도 하고 해서 이미 더러워져 예복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는데,바로 그 때 잔치에대한 전갈이 와서 그 예복을 그대로 입고 갔다가 쫓겨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어찌되었든지 지금 다 망가뜨린 포도원에서 예수님은 잔치를 벌이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보입니다.그래서 그 사람을 잔치자리에서 내어 쫓습니다.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난 토요일 음악회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이 번 음악회의 주제는 바람,들꽃,평화였습니다.이 주제는 성경의 주제이고 우리 신앙인의 삶의 주제이기도 합니다.그러나 기독교 뿐만아니라 모든 인류 공통의 주제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이 주제를 향하여 나아갈 때 기독교는 그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놓여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이 없이는 이 바람,들꽃,평화의 자유함을 맛 볼 수 없습니다.실제 이 주제를 쫓는 사람들의 결말이 60년대,70년대 때에 히피,마리화나,동성연애,남녀혼숙,알콜중독 등과 같은 퇴폐적인 흐름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까?휴머니즘의 자유함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인류 역사를 통해 그렇지 못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19세기 말엽과학 문명이 문화 혁명과 산업혁명의 탄력을 받아,인본주의의 최고점에 다달았으며,헉슬리의 신세계라는 작품을 통해 그 인본주의의 찬양의 극을 볼 수 있었지만,결국 극찬을 받은그 인본주의가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처참하게 망가지며 인간성이 폐허화됨을 맛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리심 앞에 겸허히 우리 인간됨을 그대로 드러내 놓을 때 우리는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입어 새로운 가치,새로운 생명의 삶,삶의 축제,역동성을 맛 볼 수 있을 것입니다.우리가 주일 날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도,다시말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아직도 얼룩진 옛 생각,습관,이기심,욕망,종교성,인본주의..등의 옷을 벗지 않고 이 잔치에 참여한다면 결국 이 새로운 나라잔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또한 그 잔치의 맛을 느껴보지도 못할 것입니다.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청함 받은 자는 많되,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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