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2(2006년 6월18일,성령강림절후두째주일)

하늘기차 | 2006.06.18 16:22 | 조회 2058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2

2006년 6월18일(성령강림절후두째주일) 요4:19-24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1:13,14에 보면 구약 시대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줍니다.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스라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실의와 회의에 빠지고 신앙은 점차 냉소적이 되어가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그러니 예배가 제대로 드려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훔친 것,병든 것을 드렸다고 합니다. “주께 드리는 제사 더러우면 어때? 아무 음식이나 차려드리면 됐지” 하면서 “에이 귀찮아” 했다고 합니다.자신의 양떼들 중에 하나님께 드릴 귀한 것이 있음에도 쓸모없는 짐승을 주께 바친다고 합니다.이것이 이스라엘의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때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40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러한 무뎌진 신앙이 이스라엘에 편만해진 때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인 것입니다.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의 심령은 다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마치 깊은 겨울 잠에서 깨어 나는 것 같이 잊은 신앙을 되살리기 시작합니다.그 때에 다시 신앙이 살아나면서 이 여인이 찿은 것이 예배입니다.비록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면서 예배에 대하여 냉소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그래도 이 여자가 영적으로 깨어나 바라본 것은 예배였습니다.이 전에는 예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예배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변화되었습니다.변화되자 그 비아냥 거리며,남의 일로 여겨지던 예배가 나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삶의 중심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만나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이 곳에서 예배드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쉰들러리스트라는 2차대전 당시의 유대인들의 고난을 그린 영화가 있는데,여기서 한 독일인에의해서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넘어갈텐데 극적으로 구출되어 폴란드의 어느 공장으로 가게되어 그 곳에서 자유를 얻게되는 내용인데 참 감동 깊게 본 영화였습니다.그 때 본 기억으로는 폴란드의 어느 공장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예배를 드리는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왜 이리 예배가 중요할까요?예배의 중요성에대해 생각해 보셨는지요?안네의 일기라고 있습니다.그런데 영화로도 여러번 만들어졌는데,어느 장면 중에 안네의 식구들이 다락방에서 불 빛이 세어나가지 않게 밀폐시킨 상태에서 부림절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부림절 예배는 페르시아의 하만에게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의 하만으로부터 구원받듯이.지금 안네의 식구들도 나치의 치하에서 구원받기를 기원하며 드리는 예배였는데,극히 간절하고,엄숙한 분위기이면서도 머리에 고깔 모자를 쓰고,촛불을 밝힌 모습과,원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이 그 억압 속에서도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저는 이 영화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예배가 왜 중요한지를 보았습니다.이 예배를 통해 가족이 위로받고,희망을 다시 세우고,서로가 하나되며,내적 생명의 역동성을 키워 점차 다가오는 억압을 온 몸으로 감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이러한 생명의 자유함은 예배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창세기에서 야곱이 그의 식구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집니다.그의 외동딸 디나가 그 지역의 청년들에게 욕을 당하자,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자기 여동생을 욕보인 가족을 몰살시킵니다.그 소식을 들은 세겜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가족을 멸절시키려 합니다.일생동안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그 때에 야곱은 그의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자!”고 합니다.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벧엘을 야곱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다시말해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자는 것입니다.

야곱은 온 가족을 데리고 벧엘로 향하였고,창35:5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여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합니다.결국 야곱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가 일생 모은 땀의 결실인 재산을 모두 구했습니다.

교우여러분!예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예배는 생명을 살리고, 삶의 힘을 얻고, 역동성을 일으키며, 살 소망을 다시 세우기 때문입니다.특히 나의 영혼을 참 자유로 인도합니다.지난 주에 카인에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너를 지배하려고 한다.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하나님께서카인에게 찿아와 함께하시며 보호해 주시지만 카인의 후손들은 점점 더 깊은 죄에 빠져갑니다.죄의 노예가됩니다.이 때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여 나오라고 할 때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합니까?그렇습니다.바로 예배드리려고 바로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예배는 바로의 힘,어두움의힘,죄에 얽매였던 나를 죄로부터 끌어내어,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죄에 얽매여 올무에 붙들린 것 같이 꼼짝을 못하던 영혼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섬으로 자유함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러니까 나의 참 주인에게 돌아서는 것입니다.그동안 나에게 서 주인 노릇을 했던 온갖 잡다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참 생명과 참 자유,참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그동안은 온갖 잡다한 것들에 무릎을 꿇었지만,우리의 삶이 걸레와 같이 너덜 거렸지만 이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순전한 절받음,즉 예배에로 나아갑니다.그런데 그렇지 않다구요?예배드려 보아야 그게 그거라구요?아무런 삶의 힘도,기쁨도,소망도 예배를 드릴 때가 없다구요?

몇 일 전에 밤토실 도우미 엄마들 모임이 있었습니다.여기서 밤토실어린이도서관의 정체성과 운영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집고 넘어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그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우리가 책을 기증받을 때 전집류나 오래된 책들은 사양하기로 하고,책을 기증해 주는 분들의 드리는 마음을 고마워 하면서도 나름대로 규정을 엄격하게 세워 책을 선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그래서 지금 도서관에 꽂혀있는 책들은 어떤 책을 읽어도 아이들에게 좋은 정보가 될 수 있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도우미 엄마들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그런데 책이 하나도 없을 때 이 책도 좋고,저 책도 좋으니,그리고 이 사람은 이런 친분이 있고,저 분은 저런 고마운 분인데 기증한 책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어 했다면 아마 밤토실어린이 도서관의 장서에대해서 각 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마 밤토실에 봉사하는 도우미 엄마부터 스스로 자기 도서관에대한 신뢰성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결국 자긍심도 약해지고,도우미로서의 열정이나,기다림,좋은 도서관이 될 것이라는 소망이 조금만 힘든 일이 닥쳐도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밤토실은 5년 전에,그리고 작년 3월에 마을에서 첫 모임을 가진 이래 나름대로 애쓰고 수고하여 여기까지 왔고,앞으로 보다 더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이 것은 바로 자기 존귀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즈음 교회에대한 외부의 시각이 곱지가 않습니다.교회를 세습한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로 시끄럽습니다.그러나 외부는 그렇다 치고,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잘한다,잘한다 하면 잘하지만 못한다,못한다 하면 정말 못하고 결국 거기에 발목잡힐 수가 있습니다.신아도 마찬가지입니다.스스로 교회에대하여,예배에대하여 자긍심을 잃어버리면 결국 생명을 살리는 예배는 나에게서 점차 멀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이쪽이 아니면 저 쪽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하고 비아냥 거리듯이 말을 합니다.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셨는가요?그렇습니다.오늘 말씀 요4:23,24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
는 사람들을 찿으신다.하나님은 영이시다.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진정으로 예배 드린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진정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는 것입니다.입고 있는 옷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가능한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려야 합니다.몇 일 전에 T.V를 통해서 보았는데 잠자리가 알에서 유충이되고,그리고 거기서 껍질을 벗는데 5번 정도 거듭 허물을 벗어야 잠자리가 된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껍질을 벗을 때 보면 혼신을 다 해서 시도를 하는 것을 봅니다.이 때가 가장 힘들고 약 할 때인데 이 때 물고기나,다른 곤충들의 밥이 되기가 일 수 입니다.잠자리만이겠습니까 가재도 껍질을 벗을 때 온 힘을 다하여 껍질을 벗습니다.그러다가 힘들어 죽어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이렇게 껍질을 벗는 일은 피조물 모두에게 생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버린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벌거벗은 존재,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그러니까 은혜를 입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우선은 내 본래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아무런 업적이나,공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만약 껍질을 벗지 않는다면 그 껍질에 갖혀 고사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돈의 껍질도 있고,술과 마약,도박,컴퓨터 같은 중독의 옷도 있을 것입니다.명예나,권력이나,또 나쁜 습관의 옷들,그리고 열등감의 옷,그 외의 껍질들을 미쳐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에 감추어진 상처,아픔의 껍질 등...하나 하나 벗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어찌 보면 하나님 존전에 벌거벗은 모습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자꾸 껍질을 덮어 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곤충들이 알에서 유충으로 번데기로 그리고 성충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생명의 살아있음을 봅니다.생명의 역동성입니다.우리도 그렇습니다.우리의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가 되려면 생명의 예배가 되려면 이러한 처절한 자기 변신,껍질 벗기가 있어야 합니다.오늘 한국 교회가 허물 벗기를 하지 않는다면 고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예배라고 하였습니다.그러면서 신령으로 드린다고 할 때,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예물로는 영이신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히브리서 10:5 말씀의 뒷 부분을 보면 우리들이 드리는 눈에 보이는 제물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면서,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라고 합니다.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을 하나님께서 손 수 마련하신 것입니다.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의 은혜입니다.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예물로 드려지는 예배가 영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그럴 때 진정으로라는 것이 우리에게 남는데 그 진정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자기 정체성을 찿는 것, 하나님 앞에 자기를 벗는 그러한 모습입니다.그런데 이것은 우리 모든 피조물에게 다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생명의 예배를 드리는 한 사람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누구냐 하면 지난 주일 저녁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눈 여인입니다.눅7:34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대해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마시지도 않는데 너는 먹고 마시고 세리와 죄인들과만 지낸다고 합니다.그래서 그랬는지 36절 이하에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하자 흔쾌히 그 초청에 응합니다.그래서 식사를 함께하는데 그 때 마침 한 여인이 그 바리새인의 집에 찿아와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사건이 벌어집니다.이 사건은 충격적이었고,어느 관점에서 보면 외설스럽기도 한 사건이었습니다.모두 놀래고 당황할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예언자였다면 이 여인이 누구이며,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여자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500데나리온 빚진자와 50데나리온을 빚진 자들이 빚을 탕감받았다면 누가 더 탕감해 준 사람을 사랑하겠는가?’하고 묻자,시몬은 더 많이 빚을 탕감받은 자라고 합니다.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너는 내게 발씻을 물도 갖다주지 않았는데,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아주었다.너는 내게 입을 맞추어 주지 않았지만,이 여자는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지만,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고 합니다.그러면서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여인은 자기 죄를 용서받았다.왜냐하면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러면서 바리새인들 앞에서 구원받았음을 선언하시고,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마을에서 이미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사람이었습니다.그래서 그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일반 사람들 앞에 설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이 날 이 여자는 죄인으로서 사람들 앞에,그것도 남자들 앞에,아니 자신을 정죄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인 바리새인들 앞에 섰습니다.이 여인을 바라보는 바리새인들 남자의 정죄하는 눈초리를 등에 엎고 이 여인은 자신의 일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자기 껍질 벗기 였습니다.지금도 자기를 짓 누르고 있는 죄짐을 짊어진 체, 사랑의 주님에게 나아가 자기 모든 것을 다 고하였습니다.그러자 주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율법으로 이 여인을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용서할 수 없지만, 사랑의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사랑으로 감싸며 그냥 더 이상 죄의 멍에를 지지말라고 하십니다.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눅7:47에 보면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
하였기 때문이다.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 여인을 구원하여 주셨고 평화를 베풀어 주셨습니다.이것은 진정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기 껍질 벗기 였습니다.이렇게 자기의 것을 벗어버리기위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자신의 열등함이나,그 어느 것도 이 여인의 주님 사랑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파 사람들은 많이 사랑하지 못할까요?예수님은 많이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렇다면 왜 많이 용서받지 못할까요?그섯은 자기 의로움 때문입니다.실제 예수님은 눅18:10 이하에서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가 성전에 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도둑질 하지 않고,불의 하지도 않으며,간음하지 않았고,십일조와 금식을 철저히 지켰다는 바리새인이 아니라,땅을 치며 죄를 고백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고 합니다.그렇습니다.바리새인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기 의로움 때문인 것입니다.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교회를 덜 사랑합니다.가까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자기 의 때문에 참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의 그 진정을 받아주신다고 했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참 사랑해야 합니다.주님을 사모하는 이 여인의 사랑처럼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예수님도 공생애 마지막에 십자가 앞에서 자기 의를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바로 이러한 진정함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우리 고기교회가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6/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42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74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53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46 2005.09.02 16:30
75 [일반]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낫다(조광호 목사,2006년8월13,성령강림절후 첨부파일 하늘기차 3002 2006.08.14 23:01
74 [일반] 들으시는 하나님 2(2006년 8월 6일,성령강림절후아홉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50 2006.08.06 13:17
73 [일반] 들으시는 하나님(2006년7월30, 성령강림절후여덟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71 2006.07.30 14:52
72 [일반] 하나님의 나라와 경건(2006년7월23일,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4 2006.07.23 15:42
71 [일반] 오직 기도!(2006년7월16일,성령강림절후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1927 2006.07.16 15:18
70 [일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5(2006년7월9일,성령강림절후다섯번째주 하늘기차 1731 2006.07.09 13:08
69 [일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4(2006년 7월2일,성령강림절후네번째주 하늘기차 2140 2006.07.02 16:21
68 [일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3(2006년 6월25일,성령강림절후세번째주 하늘기차 1811 2006.06.25 15:12
>> [일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2(2006년 6월18일,성령강림절후두째주일 하늘기차 2059 2006.06.18 16:22
66 [일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1(2006년 6월11일,성령강림절후첫째주일 하늘기차 4021 2006.06.13 11:39
65 [일반] 도우시는 분,변호해 주시는 분(2006년 6월 4일,성령강림주일) 하늘기차 2328 2006.06.05 10:53
64 [일반] 한 므나의 귀한 은혜(2006년 5월21일,부활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3032 2006.05.22 09:40
63 [일반]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 (2006년 5월14일,부활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2003 2006.05.15 07:54
62 [일반] 사랑의 가정(2006년 5월 7일,부활네번째주일) 하늘기차 2038 2006.05.07 13:50
61 [일반]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2006년4월30일,부활절후두번째주일) 하늘기차 2351 2006.05.01 12:53
60 [일반]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열자 (2006년 4월23일,부활후첫번째주일) 하늘기차 1995 2006.04.24 22:00
59 [일반]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부활(2006년 4월16일,부활주일) 하늘기차 1940 2006.04.16 13:47
58 [일반] 집 모퉁이 머릿돌(2006년 4월 9일,종려주일) 하늘기차 2309 2006.04.10 11:56
57 [일반] 나는 누구인가?(2006년4월2일,사순절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1834 2006.04.03 22:33
56 [일반]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있다(2006년 3월26일,사순절네번째주일) 하늘기차 2412 2006.03.26 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