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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있다(2006년 3월26일,사순절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6.03.26 16:09 | 조회 2411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있다

2006년 3월26일(사순절네번째주일) 마16:13-20

베드로가“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했을까요?예수가 단지 나사렛의 한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구주 메시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늘 예수님과 같이 다니며 보고 들었으니 알 만도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왜냐하면 예수님은 스스로가 자기가 누구인 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봅니다.그 때 예수님은"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만 말씀하시지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하지 않습니다.빌라도 법정에 섰을 때에도 빌라도가“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오늘 말씀처럼 제 3자의 고백이나,아니면 누군가 정확한 인식을 하면“네가 그렇게 말했다.”라고 하는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은 눈으로 보고 만지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고의적으로,의도적으로 믿지 못하도록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실재하며,현존하며,온 역사와 우주를 통해 시간과 공간 속에 편만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대해 설명할 때 주로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밭에 감추인 보화,진주를 구하는 장사,겨자씨 한 알 등 왜냐하면 우리의 기존의 생각이나 감정의 틀로는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했습니다.특히 이 베드로의 고백이 값지고 귀한 것은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되었는데,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영광만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특히 5병2어의 기적 이후 부쩍 사람들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합니다.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를 계속 밀고 가다간 예수님이 세상의 왕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누군가가 “예수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라고 해주어야 할 텐데,아무도 감을 잡지 못합니다.예수님은 꽤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교인들에게 권면을 할 때가 있습니다.그런데 신앙에대한 권면을 할 때 조심스러운 것은 그것이 말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저 이러면 좋겠습니다 해야지 그 이상을 넘어가면 서로 얼굴 붉히게 되고 신앙이 그 것 밖에 안되는데 자꾸 이야기 해 보아야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신앙은 깨달음을 통해,스스로의 믿음의 고백을 통해 자라는 것입니다.그리고 무엇 보다 은혜이지 억지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신학자들은 “메시야 비밀”이라고 합니다.이 주제로 무수히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었습니다.영적인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영이신 하나님,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대해서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지 말로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의 백부장은 그 때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두려워 하며“참으로,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구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을 하거나 메시야라고 강요하지 않더라도 이방인 백부장의 입을 통해 참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물이다’라고 할 때에 이 여인은 선생님은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면서,‘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십니까?’라고 물을 때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이 여인에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보면 대화가 깨질 듯 참 아슬 아슬 합니다.처음에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낯선 유대의 청년이었습니다.범상치 않은 모습에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조금 지나자 예언자라고 하면서 마을에 가서 마을 주민들에게 예수님에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그 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하고 증거합니다.이 여인이 자기 내면에서부터 조금씩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습이 점점 바뀌어가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몇 일 전에 “아버지의 그림 편지”라는 어린이 동화책을 보았습니다.

‘판자촌에 사는 열 살의 마이토 판두로는 이유도 모른 채 감옥에 끌려간 아버지가 그립기만 합니다. 수산나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시지만 마이토의 아버지는 글을 모르기 때문에 답장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이토는 아버지의 답장을 받고 깜짝 놀랍니다. 아버지는 글 대신 그림으로 자신의 일상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풍부한 감정이 담긴 편지들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오갑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아이의 학교 여선생님이 중간 역할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인상에 남습니다.그 그림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그림 속에서 아버지는 화분들에 둘러싸여 있었어요.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 되는 화분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나무에는 꽃들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화분들 위로는 커다란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하늘에는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습니다. 마이토가 했던 사인처럼 새는 판티토라는 이름 위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것은 아버지가 금방 감옥에서 풀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꽤 오랜 동안 수감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그 사실을 아이의 선생님이 아이에게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참 어렵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그러면서 진실은 진실이다 하면서 막 울부짖는 아이에게 힘들고 아퍼도 진실은 진실이라고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진리 그대로이십니다.더 할 수도,뺄 수도 없습니다.우리가 믿음과 은혜로 받아들인 예수님 그대로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리의 삶으로 진솔히 고백할 때 예수님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 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에서 8장에 이르는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중풍병자를 고치는 사건에서부터 생겨났는데 여기서 예수님이 유대인과 안다,모른다는 논쟁이 붙습니다.그러니까 예수가 메시야이다 아니다 라는 논쟁이 붙은 것입니다.그런데 유대인들이 일관되게 버리지 않는 관점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적인 관심입니다.그러니까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따지면 모세 보다 못하지 않는 것입니다.그러나 그의 출신성분을 볼라치면 한 갓 나사렛 목수의 아들입니다.말이나 행동을 보면 놀랍고,권위가 있는데,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코드가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율법,성전,제사의 틀에 맞추어지지 않습니다.그러니 고개를 갸우뚱합니다.더구나 중풍병자에게 죄를 용서한다고 까지 하니 이것은 신성모독에까지 간 것입니다.

요8:25에보면 유대인들이 결국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당신은 누구요?”합니다.그러자 예수님은 무어라고 대답했겠습니까?“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하고 반문합니다.이미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이 대화를 새겨들은 요한은 본문 말씀 27절에서 유대인들에대해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서 말씀하시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예수님은 43절에서“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아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아예 출신성분이 다르다고 선을 그어버리십니다.어떤 때 에수님 말씀은 섬뜻합니다.너희는 마귀에게서 낳았으니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답답한 유대인들이 53절에서 또 물어봅니다.그러면 “당신 스스로는 누구라 생각하느냐?”합니다.예수님은 직접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결코 안하십니다.스스로 누구인지 말씀하실 것 같은데 안하십니다.

8장에 이어 9장에서도 눈 뜬 장님의 기적을 통해 또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는데,그 눈 뜬 청년이 출교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그 청년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묻습니다.“네가 인자를 믿느냐?”그러자 소년이 대답합니다.“선생님 그 분이 어느 분입니까?내가 그 분을 믿겠습니다.”합니다.그 때 예수님은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다 라고 대답할 수 도 있을텐데“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이다.”라고 합니다.예수님은 결코 드러내지 않습니다.이것이 말한다고 메시야로 인정하고 믿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은 신앙 고백해야할 부분이지 예수님께서 손수 자기가 누구인지 설명해야할 것은 아닌 것입니다.또한 예수님께서 스스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임을 보여줄 자리는 속죄의 죽으심을 보여줄 십자가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였을 것입니다.

5월에 지방 자치 선거가 있습니다.양심적이고 바른 지도자들이 뽑혀야 할 텐데 백성의 의식의 변별력이 그것 밖에 되지를 않아서 안타깝습니다.점차 좋아질 것입니다.언젠가 한 선거 후보자가 나는 깨끗합니다.하면서 우유 광고 패러디를 선전에 사용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자기는 깨끗하다는 것입니다.그러면서 각 후보자들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 온 갖 것을 다 동원하는데 유권자들은 피식 웃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왕되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예수님의 왕되심은 믿는 사람의 신앙 고백을 통해 드러납니다.나사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향하는데 마을 어귀에 이르렀을 때에 마르다가 예수님께 찿아왔습니다.그 때 예수님이 마르다에게“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묻습니다.그 때 마르다가 주님이 바라시는 신앙을 고백합니다.“예,주님!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하나님의 아들이심을,내가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믿음이지,논리적,이성적,합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말씀과 기적,병고침,귀신추방을 통해 죽은 믿음을 다시 살려내셨습니다.“네가 믿느냐?”,“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나님의 나라는 이 신앙고백을 통해 확장되어 갑니다.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설명되어지는 것 만 가지고는 어렵습니다.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꾸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이 때 예수님은 믿으라고 합니다.그런데 유대인들은 수군거립니다.그리고서는 안식일에 일을 했으니 죄인이라고 합니다.기껏 안다고 하는 것이 나사렛 예수는 죄인이고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이런 흐름 속에서 베드로는“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기 직전에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이 예수님에대해 2번씩이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요1장31절에 보면“나도 이 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33절에서도“나도 이 분을 몰랐습니다.”라고 합니다.그런데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33절을 계속 보면“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고 합니다.그래서 세례 요한은 34절에서“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그래서 나는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고 합니다.

요한이 예수가 누구인 줄 알아본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즉 성령의 감동을 따른 것입니다.오늘 말씀에서도 베드로가 예수가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도 성령에 따른 것입니다.예수님은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요?“복이 있다.”고 합니다.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좋아서,내가 원하는 것을 내 방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특히 성령의 감동을 따르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이 그리하셨습니다.세례자 요한도 그리하셨습니다.베드로도 성령의 감동에 따른 결과 이렇게 아름다운 불후의 고백을 하였습니다.우리도 이런 성령의 감동에 따르는 고백의 삶으로 복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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