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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으로(2006년11월12일,성령강림절후스물세번째주)

하늘기차 | 2006.11.12 14:01 | 조회 2217


예수 이름으로

2006년11월12일(성령강림절후스물세번째주) 막9:38-50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읽을 성경 본문의 앞 뒤의 장 절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 성경에서 본 문 한 구절을 택해 앞 뒤 문맥을 보지 않고 성경 본문을 읽음으로 인해서 성경이 전하는 의미를 놓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의 경우, 이 말씀이 입시생들에게, 한창 연예중인 젊은이에게, 주식, 부동산 투자에 그리고 개인 사업에 적용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장 1절 이하에서 일관되게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래서 본문 그 자체 만이 아니라, 앞의 장절과 연결하여 말씀을 보아야 그 의미를 잘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9:30-37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고난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고,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것에대해 2번째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2번째 고난에대한 예고에대해 깨닫지를 못하고, 두려워 하면서 왜그런지 질문을 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고난은 커녕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서로 누가 제 일인지에대해 자신들의 공과를 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한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 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교회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하면서 그저 교인이 주일날 예배출석만이라도 하면 그것으로 자기 역할 다 하는 것으로 인정을 하는데, 초대교회 때 성도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6:1,7에 보면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났다’고 하는데 행 11:26에 보면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리운 것은 안디옥교회에서부터 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를 처음 믿을 때, 그들을 제자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그 뒤에 생겨난 별명이기도 한데, 아무쪼록 오늘날의 교회성도는 너무 병약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저 평신도인데 하면서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놓아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인류를 위한 사랑을 보이시려 하는데, 제자들은 지금 사랑이 아니라,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마땅히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는가?하는 싸움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 하나에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어린 아이는 약하고, 보잘것 없는, 힘 없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가장 소외되었던 사람들은 어린이, 과부, 이방인, 병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에 어린 아이를 안으시며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요한은 대뜸 예수님께 답변을 합니다. 요한은 나름대로 꽤 의기 양양 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무어라 말합니까?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을 잘했다고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막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지지하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말씀해 주듯이 예수의 제자인지 아닌지는 “우리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 말씀 속에는 초대교회 당시에 새로운 제자들이 어떻게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인지에대한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새로운 제자들이 태어납니다. 지난 추수감사주일에 주리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성도를 따라다니는 것인가요? 성도들과 함께 다니는 것인가요? 성도들과 함께 차도 마시고, 여행도 가고, 등등 성도들과 함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함께 따라 다니는 것, 함께 다니는 것이 제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같은, 42절의 경우에 보면 작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작은자를 영접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이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못 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이 고난에대해 예고했을 때, 전혀 무관심하던 제자들이 오히려 서로 자기의 의 공과가 크다고 하면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해 볼 때, 요한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자신을 따라 다니지 않았다고 막았다는 것은 서로 누가 큰지 다투었던 싸움의 연장이 아닐 수 었습니다. 자기와 한 편이 아닌데, 자신들과 같은 일을 하면, 나중에 자신들이 거두어 들일 공과, 자리를 그들에게 뺏길 수 있으니, 아예 그 씨를 잘라버리겠다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고난에대해 말씀할 때도 제자들이 그 의미를 못 알아 들었는데, 지금도 서로 자리 다툼을 하는 것을 보며 예수님께서 낮아지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할 것에대해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자리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패거리를 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좋은 풍속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고질 적인 나쁜 것들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회 생활 속에 학연, 인맥, 출신지역을 따지는 것입니다.,,,서로 함께하지 않으면 한 자리를 차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T.K, K.S 등이 그렇지 않습니까? 영남, 호남이 그런 것 아닙니까? 함께 하는 자가 아니면, 함께 따르는 자가 아니면 적이요,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 원한도 없고, 만나본적도 없는데 지역, 학교, 인맥을 따지다 보면 함께 하지 않으니까 적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함께 몰켜서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됨의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더 나아가 죄짓지 말라합니다. 회개하라 합니다. 그런데 그 회개하라는, 죄짓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 섬뜻 섬뜻 합니다.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 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버려라.”

“네 손이, 네 발이 죄를 짓거든...”하고 무시 무시한 납양특집, 엽기,괴기에나 나올 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데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이 불에 절여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엽기이겠습니까 만서도, 이 얼마나 극한 말씀인가 하면서도, 한편으로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러한 엽기의 반대 쪽을 보면 또 어휴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를 70번씩 7번하라, 또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돌려라, 5리를 가자 하면 10리를 가 주어라, 겉 옷을 달라하면 속 옷 까지도 내어 주어라 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끝없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랑의 반대 쪽에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욕망의 두드러진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패거리치는, 우리 아닌 것에대한 배타, 나 아닌 것, 내 것 아닌 것에대한 무시, 내가 크냐, 네가 크냐하는 것에대한, 죄에대한 뉘우침, 깨달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게는 나로부터,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 까지 바로 자기내끼리 패거리치는 인간의 저급함, 천박함, 속물성이 우리 인간을 파멸시키지 않는가 말입니다. 생존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리싸움을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파당을 짓습니다. 여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연약한 사람들이 도태되고, 점차 스러져 가는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여전히 백인우월 주의요 철저한 계급사회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이 엘리트 집단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큰나라들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이에 맞서는 아세안, 아셈, 유럽연합, 중남미 연합 등, 하나의 세계라는 전 지구적 경제틀 속에서 생존경쟁에 뒤처지지 않기위해 기득권을 선점하려는 치열함이 국가간에도 일어납니다.

우리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교단입니다. 소위 장자교단이라고 자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단의 마크가 만들어졌습니다.한반도 모양의 두루마리위에 십자가가 놓여있는 모습의 마크가 바로 우리교단 마크입니다. 그런데 교단 마크를 교회 앞에 다는 이유가 글쎄 그것이 결국 다른 교단과의 차별화를 통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지, 교단 마크를 꼭 만들어야하는지, 오히려 하나의 장로교로 합쳐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저희 교회는 이 마크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또한 자신을 패거리치는 천박한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갈릴리에서 활동하던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막9장30에 보면 “갈릴리를 가로 질러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33절에 보면 제자들이 길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셨나요? 바로 길에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길위에서 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로드 무비(Road Movie)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길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뜻합니다. 얼마전에 “모터 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남미의 전설적인 인물의 청년 때의 여행을 영화로 표현한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번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말씀도 바로 그 길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길에대한, 즉 제자의 길, 제자도에대해 말씀하고 계시는데,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 말씀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아파트와 사교육문제로 인해 모두들 힘들어 하며, 골 머리를 앓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정말로 삶이 무너지며, 주변부로 밀려나,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까지도 생겨납니다.

이럴 때 정부의 지도자들은 마음과 뜻을 모아 어떻게 해서든지 백성들이 힘들어 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을 써야 하는데, 서로 파당을 짓고 자신들의 기득권 만을 유지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패거리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반드시 그 결과물에대해 물으시겠다고 하십니다. 회개하라는 오늘 말씀은 바로 이렇게 패거리하며 소외된 자들을 품지 않는 잘못된 길을 가는 것에대해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정말 교회가 어떠한 길을 가야할지를 잘 말해줍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다고 합니다. 다른 종교는 도에대해 말하라고 하면 마음과 몸을 닦기 위해 문서와 명상과 적선에대해 주로 이야기 하지만, 기독교의 길, 도는, 제자의 도는 명확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가난하며, 병든 사람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품고 가는 길에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 바로 바위의 샘이 터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있는 것입니다. 참 기쁨, 소망, 평화, 그리고 마땅히 누려야할 선하고 좋은 것들을 맛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인도하시는 이 길, 도로 아아가 하나님의 귀한 축복,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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