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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가 강물처럼 4(2006년9월10 ,성령강림절후열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6.09.10 14:17 | 조회 1859
생수가 강물처럼 4

2006년9월10 (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요7:37-39

예루살렘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그 곳에는 수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이 움직이면 그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 38년된 앉은뱅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다른 사람들 처럼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립니다. 이 모습을 보니, 이 베데스다의 못이 오늘 이 시대에도 흘러 넘치고 있음을 봅니다. 왜냐하면 먼저 들어가야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약하고, 느린 사람은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아도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물이 흘러 흘러 강남으로 모이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대치동의 어느 학원에 자녀를 등록시키기 위해 이틀이나 노숙을 하며 기다려서 자녀를 모 유명한 학원에 입학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또 지금은 판교로 모여들고 있지만 모든 정보망을 다 동원하여 부동산투기의 절호의 찬스를 잡기위해, 투기의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힘도 있습니다. 힘센 사람이 차지하는 물입니다. 그런데 이 물의 근원은 아주 깊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는 순간 그야말로 눈이 밝아져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보게되어 부끄러워 합니다. 이 벌거벗음은 가난함, 연약함, 유한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의 품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평안해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따서 먹자 상황은 바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창3:4에서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서 먹으면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데, 뱀은 오히려 선악과를 먹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뱀은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삶을 삶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인가요?그렇다면 뱀이 말하는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뱀은 하와를 유혹하면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성경은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갖고, 하나님과 대등한 자유함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구별이 된다면 하나님은 주인이고, 인간은 청지기입니다. 주권만 하나님에게 있지 모든 것은 하나님과 같은 자유를 누립니다. 그래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으며 영생의 삶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이 아담과 하와에게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면 뱀이 말하는 삶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나요?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뱀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그렇습니다. 힘의 하나님입니다. 수퍼맨의 하나님입니다. 물질을 제일의 가치로 인정하는 맘몬의 하나님입니다.오늘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휘어 잡으려는 공중권세 입니다, 이렇게 황폐케 된 것도 바로 이런 하나님, 물질의 하나님 숭배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창세기의 에덴 동산 이야기는 항상 이야기 하지만 먼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존재하는 삶의 틀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물과 똑 같습니다. 생존 경쟁의 치열함 속에 오직 1등 만이 살아 남는 시대입니다. 모두 제일 먼저 뛰어 들어 가려고 목을 메고 있습니다. 그 치열한 싸움, 그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한 숨, 그리고 그 하나를 얻기 위한 야합, 부정, 거짓 등등

최근 바다이야기를 들어보면 속상한게 있는데, 그것은 그 피해자의 대부분이 서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럭저럭 아이들 학교 보내고, 밥은 먹구 사는 그런 사람들이 이 게임에 걸려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제1에서 밀려난 제3,제4의 사람들입니다. 바람직한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혹 대박이나 터지지 않을까 해서 바다이야기를 기웃 거리다가 발목이 잡힌 것입니다. 농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해야할 일이 밭에 하나 가득인데, 농부가 밭에 있지 않고 바다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다이야기 도박장이 서울 시내에 창신동, 왕십리, 영등포, 안양 등 그만 그만한 가내 수공업자들이 몰려 있는 곳에 위치하여 모두를 걸어 넘어뜨렸습니다. 이 게임 오락장의 또 하나의 문제의 심각성은 접근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입니다. 저녁 식사하고 바람 쐬러 나가다 슬쩍 한 번 들르는 것에 발목을 잡힌다는 것입니다.

이 게임은 또 중독성이 있어 문제입니다. 아시겠지만 상어가 나타나고, 고래가 나타나면 대박이 터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률 조작을 마음대로 리모콘으로도 할 수 있어서 처음에는 상어도 자주 나타나고, 고래도 한 번 출연을 하는데, 본격적으로 하게되면 좀처럼 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모두 잠들었는지. 그런데 문제는 게임장을 나와 일상으로 돌아왔는데도 그 상어나, 고래가 나타날 때 들려주는 음악 소리가 귀에 들린다는 것입니다. 중독이어서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면 자신의 발걸음이 게임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사회가 게임에, 도박에, 전자 오락에, 마약에, 경마에, 인터넷에, 술에 중독되어갑니다. 이것은 이 사회가 심히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그 공허함을 체우려고 대리 만족을 찿는 것입니다. 그 갈증이 매우 심합니다.

이 갈증을 풀어줄 물은 없을까요? 창세기에서 물과 가장 관련이 있는 믿음의 조상이 있는데 누구일까요? 이삭입니다. 이삭은 물에 관한한 탁월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우물을 팠고, 또 그 판 곳에서 족족 물이 솟아 올랐습니다.사막에 물이 없다는 것은 죽음입니다. 오늘 이 시대 속에서도 생명의 물인 성령이 우리의 내면, 마음으로부터 감동하여 솟아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살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삭이 우물을 팔 때 마다 지역의 원주민과 싸웁니다. 왜냐하면 물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이 귀할 수 록 나눌 수는 없는지요? 그래서 창26:21에 보면 우물을 파고 그 이름을 지었는데 에섹, 즉 ‘다투었다’고 합니다. 또 싯나라고 하는데, 이는 ‘대적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조상 이삭은 물로 인하여 다툽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팔 때 마다 자신이 판 우물을 양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2절에 다투지 않은 우물을 팠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이름짓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브엘세바라는 곳으로 이동하는데, 25절에 보면 그 곳에서 또 우물을 파는데 32절에 보면 이삭의 종들이 이삭에게 와서 보고하는데,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라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생존 경쟁의 터, 광야와 같은 인생의 여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그래서 우물을 파야 합니다. 그러나 베데스다와 같은 물을 또 팔 수는 없습니다. 싸움과 분쟁과 이기심의 우물은 이제 메우고 믿음의 조상 이삭과 같은 양보하여 함께 나누는 우물을 파야합니다.

야생초 편지를 쓴 황대권님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에 <션찮은 반찬으로 맛있게 밥먹기>라는 글을 썻습니다. 참 감명깊게 읽었는데,여기서 황대권님은 요즈음의 식사 문화가 반찬 위주로 가는 것을 우려하면서, 밥 중심의 식사여야한다고 하면서, 자기는 현미에 콩과 견과류를 섞어 넣는데, 보통은 열 가지 남짓하지만 많이 넣을 때는 열다섯 가지가 넘기도 한다고 하면서, 밥을 한 입에 넣고 씹으며 느끼는 밥의 맛을

“현미의 씨눈이 어금니 사이에서 갈릴 때에 나는 고소한 맛, 녹두와
팥이 으스러지면서 내는 구수한 맛, 조의 까실한 맛, 수수의 텁텁한
맛, 보리의 미끄덩한 맛, 된장 콩의 비릿함, 밤의 달콤함, 잣의 기름
짐, 율무의 사각거림, 은행의 씁쓰름함….”라고 하면서

한 100번은 넘게 씹는데, 그 씹으면서 느낀 감정을

“씹고 씹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평범했던 곡식의 맛이 차원이 전혀
다른 천상의 맛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을 분해
된 음식물과 침의 물리화학적 작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는 그것만으로 설명이 모자라는 정신적 고양상태가 존재한다. 뭔가 흘
러넘치는 사랑이랄까, 감사 또는 은총이랄까. 아니면 무언가 커다란 ‘하
나’ 속에 안긴다고나 할까.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씹어 삼키면 이런 느
낌에 다가갈 수 없다. 씹는 행위 하나하나에서 그 음식물을 만든 사람
의 정성과 사랑, 그리고 그것이 내게 오기까지의 수많은 여정을 음미하
는 것이다. 음식물의 생산자와 생산방법, 이동경로에 대한 정보를 잘 알
고 있어야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밥이 보약이 되기도 하고 그냥 똥이 되기도 하
니까. 숟가락을 들기 전에 먼저 이 모든 음식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여기서 하느님은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니다. 그냥 모 든 신성의 공통분모 정도로 알고 가볍게 넘어가자. 다만 한 가지, 이 신 성은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에도, 부엌에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 한 마리에게도 깃들어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넘어가자. 그렇다면 밥을 먹 는다는 것이 밥 속에 깃든 하느님을 찾아 떠나는 ‘여행’과 같을 것이다. ‘여행’이라고 했다. 짧은 시간에 간단히 끝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 지하 시인이 “밥을 모시는 것은 하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이라고 노래 한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더 쉬워질 것이다. 라고 합니다.

저도 식사할 때 기도를 드리지만 보통 “하나님!, 쌩큐, 아멘”하고 수저를 드는데, 이 분은 밥을 하나님으로 보며, 온 우주안에 넘치는 하나님의 충만함을 식사 속에서 맛 본다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또한 처음자리 생태교실의 장수주 선생님은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코끼리 때문입니다.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이 아프리카나, 밀림지대, 초원 지대의 엄청남 살림, 목초지를 불태우고, 그 곳에 커피를 심어,커피를 다량으로 생산을 하는데, 밀림에서 사는 코끼리들이 숲과 풀이 없어지는 것을 보며, 먹을 거리에대한 염려 때문에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 그 다음부터 커피를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마음의 샘이 우리 안에 있는데, 관심을 안두니까 풀이 자라고, 넝쿨 식물이 자라, 그 그리스도의 생명의 우물을 덮어버렸습니다. 싸움과 욕심과 1등을 위해 살아가는 삶 속에 순전한 샘, 그리스도의 마음의 샘을 파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대안교회에대해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다른 좋은 가치를 찿자는 것인데,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 것이 아니라, 있는데, 다른 것이 소리를 지르니 마치 없는 것처럼 보여서, 본의 아니게 감추어져 있는 것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샘을 파자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물에대한 여라가지 상징의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상징은 예수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실 때, ROME 병정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찌를 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고 합니다.이 흐르는 물과 피가 우리에게 생명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심으로, 피와 함께 다 내어 쏟으신 그 생명의 물이 십자가에서부터 흘러 나와, 온 교회와 성도들, 그 가정에 흘러 넘쳐 교히의 그 심령 속에서 샘 솟듯 흘러 영생을 얻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고 합니다. 이 것은 바로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이제 더 이상 욕심괴 이기심과 편협함과,참지 못함과, 게으름과, 싸움과 거짓 등의 우물은 메꾸어 버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바라며, 온유와 자비와 선함의 오래 참음의 참 생수를 내 안의 우물에서 길어 올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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