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다시 사는 것 Ⅱ(2007년4월15일, 부활 둘째주일)

하늘기차 | 2007.04.22 14:27 | 조회 2012
다시 사는 것 Ⅱ

2007년4월15일(부활 둘째주일) 고전15:50-58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나서 다시 죽는다거나, 살아났는데 이 전의 모습 그대로의 삶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과정이며 변화입니다.

우선 말씀의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 한 가운데 나타나셔서 부활이 모세의 때 부터 준비되어 왔다는 것을 눅24:44에서“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을 통해 기록한 모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자기도 십자가의 고난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도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이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맞추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부활도 역시 이스라엘의 처절한 역사를 통해 예언되고, 고백되고, 기다려진 끝에 예수에 의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 부활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말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눅24:6-8에 보면 빈 무덤 앞에서 두려워 떠는 여인들에게 천사가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보면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부활은 말씀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말씀을 깨닫고서야 그 비어있는 무덤이 무엇인지를 알게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유령이라 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받아들인 것은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이성과 한계를 뛰어 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처음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은 두려움, 떨림, 불신이었습니다. 이러한 반응을 잠 재운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첫 단초는 말씀입니다.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스스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경륜과 섭리를 그리고 긍국에 부활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거듭 십자가와 부활에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두 번째 과정은 십자가입니다. 부활에서 십자가를 빼 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모두에게 드러낸 것입니다. 감추어 있던 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바로 설 자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가 보여준 죄의 정체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죽음을 잘 포장하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십자가를 보면 우리가 죽음이며, 죄인인 것을 감출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전15:55-57에서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외칩니다.

죽음의 힘, 어두움의 힘,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의 죽음에 사탄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사탄은 십자가 아래 바리새인들을 통해 자꾸 함께 살자고, 내려 오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대로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분께서 죄 있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한 번에 우리 모두의 죄를 씻기는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창세기3장에 보면 뱀이 여자를 유혹하면서 선악과를 먹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살라고 합니다. 사는게 왜 나쁠까요? 가끔 T.V 드라마를 보면 특히 부부와 관련된 드라마를 보면 서로 다투고, 성격이 차이 나고, 다소 부적절한 상황이 오면 갈라서라는 것입니다. 아예 이혼 예찬을 합니다. 뭐하러 그러구 사느냐는 것입니다.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자기 살자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패션이나 상품 광고를 보더라도 나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존심으로 치켜세우는 것을 종종 봅니다. 결국 상품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이고, 일상 생활에서도 그러한 자기 살리는,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살라고 외칩니다. 죽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사탄인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살라고 꼬득이는 그 삶은 불순종의 삶, 그러니까 욕망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삶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한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절제와 그 절제를 가득체우는 풍요와 나눔이 있고, 서로와 서로 사이에서 주고 받는 조화의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창 밖을 보면 바로 그런 자연의 다양함의 아름다운 조화를 봅니다.또한 부족함에서 오는 소망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한계, 그 부족함을 끝없는 욕망으로 뛰어 넘으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뛰어 넘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눔이 아니고 자기 혼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부등켜 안습니다. 그러니 벽이 생기고,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참지 말라고 합니다. 미워하라고 하며 모이면 험담하게 합니다. 자기 자식, 자기 가족만 귀하지 다른 사람, 다른 자녀는 싸워서 이겨야 하는 마지막 까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경쟁자에 불구합니다. 바로 지금 FTA를 통해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공교육이 무너진 참담함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조승희라는 젊은이의 사건 앞에 침울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의 힘, 죽음의 힘이 그 귀한 청년의 삶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일이 온 세계에 편만해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또한 지금도 이락, 아프카니스탄 등에서는 여전히 황당한 전쟁의 그늘 속에 무고한 죽음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질서가 있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그 부활의 첫 시발점은 그런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계략을 무력화시킨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으면 우리는 욕망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죄의 힘 앞에 우리는 힘 없는 한 마리에 양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보면서 어떤 죽음을 죽어야 할지를 봅니다. 바로 말씀을 따르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죽음은 그냥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믿음의 죽음인 것입니다. 말씀에 따르는 죽음인 것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부활을 맛 보는 것입니다. 그냥 믿음 없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죽음 다음에 말씀을 따라 생명의 부활이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부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영의 부활로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눅24:39에서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몸의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고전15:35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하여“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며 질타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차분하게 부활에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볍씨를 통해 부활을 이야기 합니다. 씨가 심기워져서 어떻게 발아하여 자라는지에대하여 설명을 함으로써 부활에대하여 이야기 합니다.한 번은 복숭아 씨를 받아서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고 그 안에 있는 연한씨앗을 살짝 잘라보았는데 그 안에 방금이라도 솟아나오려는 듯한 떡 잎 두장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씨앗 속에 있는 떡잎이 그대로 자라서 바깥으로 나와 복숭아 나무가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빌리면

우선은 뿌려진 씨가 죽어서 분해되어 그 형체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 주검에서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살아난 생명과 썩어 없어진 생명의 형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도 그 주검에서 다른 형체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부활하여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바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휴머니즘이 멈출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사고와 느낌과 노력이 몸의 부활 앞에서 더 이상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인류가 역사를 통해 이룩해 놓은 모든 총체를 통해서도 부활은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인본주의 앞에서 부활은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본주의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 아테네에 가서 몸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부활은 말씀과 십자가를 통해 신앙의 과정 속에 드러났고 그리고 부활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보다도 첫 부활은 어디에 나타났을까요? 예수님의 무덤일까요? 복음서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았고, 천사들이 일깨워준 예수님의 말씀에 고무되어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누가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그렇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지난 몇 일 동안에 순간적으로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돌이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침통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좌절, 두려움, 슬픔에 몸둘 바를 모르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마음정리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고향에서도 예수 쫓는 것을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핀잔도 들었을 법한 고향으로 아무 얻은 것 없이 공허함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동무 되어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분이 부활하신 주님임을 아아보지 못합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나누는 순간 이 분이 예수님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고,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두 사람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성경에는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되어있는데 왜 이들을 길에서 만나 주셨을까요? 아마 가장 절망한 제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래도 여전히 아쉬움에 그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바로 고향으로 향한 것을 보면 성질도 급하지만 일찍 포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 사람에게 부활을 보이신 것입니다.

부활은 아무나 무 작위적으로 연고 없는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먹고 마시고 동거동락 했던 제자들에게 부활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고 좌절하여 눈물을 흘리며 배반과 도피, 스승을 보필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젖어있는 제자들에게 찿아와 부활을 보이신 것입니다.

함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나가며, 평화를 만들어 나갔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여 낙심하며, 다시는 시작하지 않으리라하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기꺼이 찿아 오셔서 부활을 보이십니다.평택 대추리에서 주민들과 함께했던 문신부의 이야기입니다.

“졌지만 이겼다왜냐하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을 좌절케 하며, 힘들게 하며, 낙심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마음을 가만히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의 마음이 열리자 두 제자는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치욕의, 절망의, 허무의, 부끄러움의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라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힘들어 하시는 분은 없으신지요, 아무도 몰래 혼자 눈물흘리시는 분은 없는지요?‘도저히 안되’하는 분은 없으신지요? 마음을 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 것도 시작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수고, 자기 계획, 자기 노력에 전전긍긍 한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꼭, 꼭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4/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57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79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67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57 2005.09.02 16:30
115 [일반] 싸움 속의 은혜(2007년4월29일, 부활 네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6 2007.04.29 15:13
>> [일반] 다시 사는 것 Ⅱ(2007년4월15일, 부활 둘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13 2007.04.22 14:27
113 [일반] 다시 사는 것(2007년4월15일, 부활 둘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21 2007.04.15 15:01
112 [일반] 빈 무덤(2007년4월 8일, 부활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05 2007.04.08 15:12
111 [일반] 이 전에 없던 죽음(2007년4월 1일,종려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90 2007.04.01 16:55
110 [일반] 마실 잔과 고난의 세례(2007년3월25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6 2007.03.25 14:23
109 [일반]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2007년3월18일, 사순절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9 2007.03.18 15:42
108 [일반] 고기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신앙 집회 셋째날(2) 류민환 1576 2007.03.15 21:10
107 [일반] 고기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신앙 집회 셋째날(1) 류민환 1548 2007.03.15 21:08
106 [일반] 고기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신앙 집회 둘째날 류민환 1662 2007.03.15 15:39
105 [일반] 성장이 아니라 성숙(2007년3월11일, 사순절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1 2007.03.11 16:24
104 [일반]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007년3월 4일, 사순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38 2007.03.04 15:09
103 [일반] 변하신 예수님(신화를 버리고! 2007년2월25일, 사순절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2 2007.02.25 14:05
102 [일반] 헵시바라! 쁄라라!(2007년2월18일, 주현절후일곱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390 2007.02.20 12:16
101 [일반]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퍼함(2007년2월11일, 주현절후여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809 2007.02.11 14:42
100 [일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2007년2월 4일, 주현절후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00 2007.02.04 14:15
99 [일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2007년1월28일, 주현절후네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24 2007.01.28 15:31
98 [일반] 이만한 믿음..(2007년1월21일, 주현절후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9 2007.01.21 13:22
97 [일반] 처음, 그 다음, 또 그 다음...(2007년1월14일, 주현절후두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28 2007.01.14 13:36
96 [일반] 은혜의 해요, 보복의 날이라!(2007년1월 7일, 주현절후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04 2007.01.07 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