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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2007년3월18일, 사순절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3.18 15:42 | 조회 2248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2007년3월18일(사순절네번째주일) 롬7:18-25

지난 주일 저녁 롤랑 죠페 감독의 미션 영화를 보았습니다. 명장면들, 명대사들이 새로웠습니다. 특히 가브리엘 신부가 이과수 폭포 위에 살고있는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기위해 폭포위에 당도하여 피리를 부는 장면, 그리고 멘도사가 친 동생을 한 여인 때문에 살해하고 참회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용병으로, 노예사냥꾼으로 활동하면서 사용하던 갑옷, 무기들을 한 꾸러미 밧줄로 묶어 그것을 끌고 몇 일 낮, 밤을 이과수 폭포 위, 원주민들의 땅으로 올라가는데, 멘도사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짐승취급하며 노예로 잡아가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던 원주민들이 자기의 죄 꾸러미 밧줄을 끊어줄 때, 울며, 웃으며 죄의 짐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두고두고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멘도사가 동생을 살인하게된 동기는 물론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동생이 빼앗은 것이지만, 직접적인 동기는 동생과 자기의 연인이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돌아서서 갈 때, 동생이 형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길거리를 지나며 어느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는데, 그 사람들이 무심코 이야기 하다가 웃는 순간에 이 멘도사가 그 웃는 모습을 보며 시비를 겁니다. “니가 날 보고 웃었어, 비웃은 거지”, 이 두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아연 실색합니다. ‘아니다, 그렇다’하며 싱갱이를 벌이는 중에, 동생이 형을 한 대 때리고, 그리고 결투가 붙었는데, 동생이 형을 이길 수 없지요, 형은 프로인데, 결국 동생은 그 칼에 죽임을 당하고, 형 멘도사는 오열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실은 죄의 모습 보다, 즉 살인보다는, 즉 동생에대한 분노가 길거리의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의 대화를 빌미잡아 솟아 오르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면서, 한 인간이 그로인하여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더 싫었습니다. 어찌보면 죄는 늘 죄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안에 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죄가 나에게서 표출되 나올 때 보면,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타고 교묘하게 우연을 가장하기도하며 나와가지고는 치명타를 날립니다. 이 때 내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윤리, 교육, 합리성,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다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죄는 자꾸 변명하게 합니다. 사실 죄를 저지르는 순간적인 상황도 문제이지만 죄를 저지른 이후의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중성이 사실은 더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면 스스로 포기하고, 결국 죄에 붙들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언듯 멘도사의 모습을 보면서 창세기의 가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구조가 가인과 아벨하고 똑 같습니다. 그런데 유시찬 신부님이 2번째날 아벨이 살해당했지만 사실은 가인이 희생자다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벨이 살해당했는데 어떻게 가인이 희생자란 말인가 했는데, 신부님 이야기가 역사는 항상 그렇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역사였다고 하면서, 사실 가인이 그 모든 죄를 다 덮어 썼다는 것입니다. 중세의 마녀사냥부터, 최근의 한미 무역자유협약, 미국과 이락의 전쟁을 보면 항상 약자가 그렇게 당했다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데, 유신부님의 입장에서 카인의 이야기를 바로 그렇게 풀어내려면 너무 비약이 있고, 그 중간을 설명하려면 너무 긴데, 그러나 그렇게 풀지 않더라도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당한 아벨에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하고 방황하는 가인에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봅니다. 가인이 약자다, 희생자다 라고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선한 아벨 보다는-아벨은 곧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죄인인 가인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가인이 몹시 화가나서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왜 화를 내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너 왜 아벨은 이렇게 정성껏 좋은 것을 바쳤는데, 너는 왜 이것 밖에 못했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을 보면 제물에대해 판단하셨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기 때문에 아벨을 더 사랑하고, 가인은 제물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인을 덜 사랑하고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부모의 입장으로서 하나님이 었다면 어떻게 했을것 같나요? 아마도 하나님과 똑 같았을 것입니다. 즉 오히려 가인을 불쌍히여겼을 것입니다. 가인에대해 안타까워 했을 것입니다. 바로 가인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궁휼, 은혜가 성경에 끊임없이 흘러 넘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에대해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죄에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합니다. 죄를 잘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롬7에서 보다 분명히 “죄가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이 후의 인간의 첫 죄과가 살인, 즉 폭력이었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가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문제가 아니라 죄를 어떻게 다스리는가가 문제인데, 여기서 인간은 완전히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미션의 멘도사의 모습이나, 창세기의 가인의 모습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어로,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집에서, 교회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일터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가인처럼, 미션의 멘도사처럼 얼굴빛이 변할정도로 울구락 불구락하며 상대에대하여 견디지를 못해합니다. 가인이나, 미션의 멘도사처럼 칼만 휘둘르지 않았지, 말로, 표정으로, 은연중에 보이지 않는 폭력을 휘둘러 상대에게 점점 상처를 입히고 그 마음을 죽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폭력, 이 죽음의 힘이 느닷없이 내 안에서부터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유시찬 신부님을 통해서 우리 각자가 완전한 존재라는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항상 못나고, 부족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소심하고 등등 늘 모자라는 존재로 여겼는데,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이 좋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착한 것들만 따로 뽑아서 그것들만 뫃아서 완전한 것이 아니라, 나쁘고, 추하고, 더럽고, 악한것들과 함께 있어 그것들이 서로 함께 공존하여 선하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긴 그런데, 한 쪽에서 여지없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가끔 만화영화를 봅니다. 예를들어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 콩쥐 팥쥐, 늑대인간 등 보통주제는 권선징악, 인과응보, 그리고 결국 선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소망일뿐 현실에서는 악이 이깁니다. 아니면 선과 악이 계속 싸우다가 지쳐버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니면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아무 열매없이 우리 삶을 소진시켜 버립니다.

창세기에서는 죄가 너의 문 앞에 도사리고 있다고 하면서, 죄를 잘 다스리라고 하지만 우리가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이 아니라 범죄한 가인을 보살펴 주고, 관심 깊게 돌보아주시며, 사랑으로 감싸줍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성경에서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등 돌리고 자기 원하는 길, 자기 갈 길 가는 바로 그 가인을 하나님은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가인을 안타깝게 보시며, 두팔 벌려 사랑으로 품으시는 구원의 은혜에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붙들리는 모습이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가인을 품는 사랑이 구약을 흘러, 흘러, 신약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아들 스스로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그 사랑의 완전함을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직장에 취직을 하려면 빠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력서입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가족은 어떤지 등에대해 묻습니다. 요즈음은 면접을 볼 때 끼가 있는 사람, 잘 노는 사람, 분위기를 잘 뛰우는 사람에게 +⍺를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이력서를 제출한다고 하면 무엇이라고 쓸까요? 목사경력, 장로, 집사, 성가대 지휘자로 몇 년 봉사...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이력서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애굽의 바로의 억압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에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입니다.

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을까요? 롬7:23은 내 지체 안에 다른 법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가 내 속에 자리를 잡고서는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죄가 주인 행세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자기 자신에대해 “아!나는 비참하다”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주인 행세하는 한 우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어떻게 하면 이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 죄를 이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죄책감에 허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쌍한, 연약한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우리는 이러한 죄에대한 콤플렉스가 극한 모습을 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눈먼사람 앞을 지날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이 먼 것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님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대해서도 사람들에게 “죄 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어라”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늘 죄책감에 붙들려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돌이 막 지날 때 쯤 되면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한 두발 뛰다가 넘어지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부모가 그 뒤뚱거리며 넘어지는 아이에게 너 왜 제대로 못 걸어 하겠습니까? “아이구, 내 새끼, 참 잘 걷네”하지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죄를 모른다 하십니다. 이사야서38:17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이 몸을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주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한글개역을 보면 말씀이 참 실감이 납니다. 무어라 번역되었는가 하면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습니다.”라고 합니다.
K.J판이나 NEB판에서도 보면 등 뒤로 나의 죄를 던지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등 뒤로 던졌으니 죄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이것은 어릴적부터 늘 듣는 소리가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말 안들으면 뒷 산 도깨비가 널 잡아먹으러 온다”, 또 교회에서도 보면 “나쁜짓하면 지옥간다”라고 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소위 나쁜짓을 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죄짐, 죄의식을 용서받지 못한체 나의 무의식의 깊은 창고에 가두어 두고 감금해 버립니다. 셀 수도 없는 수 많은 죄의 명목들이 내 마음 한 쪽 보이지 않는 곳에 가득쌓아 놓습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도 내 죄의 창고에 무엇을 어떻게 쌓아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건과 환경이 맞을 때, 그 죄가 내 안에서 불쑥, 불쑥 솟아오릅니다. 이 죄를 당해낼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내 안에 죄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여러분 그런데 바로 그 죄, 죄 짐으로 괴로워하며, 힘들어하는 우리를 주님이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죄 앞에 무력합니다. 연약합니다. 바로 이 연약한 모습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보시며 괜찮다 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나를 꼭 끌어 앉으시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그러니 이 은혜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더라도 죄에 붙들려, 죄의 종노릇 하지 말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를 따라, 참 자유, 참 평화, 참 사랑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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