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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 아니라 성숙(2007년3월11일, 사순절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3.11 16:24 | 조회 2080


성장이 아니라 성숙

2007년3월11일(사순절세번째주일) 빌3:12-16

최근 사학법개정에대한 것이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은 삭발을 하면서 까지 사학법을 재개정하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 재개정하자고 할까요? 사학법이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위 개방형 이사제도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이사가 들어오면 건학이념인 종교교육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정된 사학법 시행령 제7조 2항에 개방형 이사는 건학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자로 한정했기 때문에 각 사학에서 정관에 넣으면 되는데, 그렇게 반대를 하는 이유는 그 의도가 다른데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하고 싶다면,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하라고 주장해야 옳습니다. 진심으로 학생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하고 싶다면, 박정희 정권 시절 평준화 정책이 채택됐을 당시에 지금과 같은 투쟁을 했어야 옳다는 얘기입니다.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종교교육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학법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자신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현행 헌법에는 학교에서 특정 종교를 교육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많은 종교 사학은 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학법개정의 핵심은 그동안 사학의 재정, 운영을 이사회에서 운영을 하였는데, 그 이사진들이 거의 가족, 친척, 그리고 서로의 사적인 연고가 있는 사람들끼리 여서, 학원의 재정의 도용, 남용, 운영의 비합리성등을 서로 감싸주었는데, 결국 공적이어야 마땅한 학교가 사적인 의도에따라 움직이던 것이 드러날까 겁을 내어 이렇게 기를쓰고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사학비리에 가장 많이 연루되고 있는 것이 기독교개통의 학교라는 것입니다.

최근 도올 김용옥님께서 요한복음을 강해한다고 해서 교계가 또 한 번 시끄러웠습니다. 저도 도올이 구약을 폐기처분해야한다는 이야기에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그 분이 자꾸 한국교회에 도전을 하고 멧세지를 날리는 것은, 이 또한 우리가 겸허히 그의 말을 경청해야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쫒겨 한창 도망을 하는데, 사울왕의 먼 친척되는 시므이가 다가와서 자꾸 다윗을 저주합니다. 네가 이렇게 쫓기는 것은 바로 선왕 사울을 몰아낸 피 값이라 하면서 계속 다윗을 귀찮게 합니다. 부하 장수들은 개 같은 소리니 그 소리 멈추게 없애버리자고 하는데, 다윗은 삼하15:10에서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하면서 이 일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12절에서 이렇게 다윗이 말합니다.
“혹시 주님께서 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합니다. 그래도 시므이는 다윗 일행이 가는 길을 따라 계속 돌을 던지고, 흙먼지를 뿌렸다고 합니다.

잠깐 말씀드리면 다윗이 참 귀한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한창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어 심기가 착잡할터인데, 거기다 데고 시므이가 기름을 붙는 격이었을 것입니다만, 다윗은 그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 쓰면서 자신의 노를 발하지 않고 그 일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복있는 자의 모습이며,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도올 김용옥님이 어떤 성서 해석, 어떤 교회에대한 발언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2,000년 넘게 흘러온 교회의 진리가 바뀔리 없는 것이고, 또한 한국교회의 위상이 흔들릴리 없을텐데, 만약 흔들린다면, 한국교회가 어찌 한국교회 일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것이 혹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경청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분을 방대한 지식을 갖고있는 엔터테이너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 정의도 내가 내린 것이 아니라 문화평론가 김갑수님이 언급한 말인데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이 도올은 신학자도 아니어서 다소 오류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이야기 했듯이,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으면 그것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분이 노자나, 불경을 해석하는 것을 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을 텐데, 그저 들어주는 것도 큰 산과 같은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근 교회가 자꾸 보수화 기득권 세력화 되어간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이 출발은 5년전 그러니까 의정부에서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전차에 참사를 당하면서 1년여에 걸쳐 억울함을 호소하고, 또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미군 병사가 한국인에게 범죄를 저질러도 우리나라 군,경은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는 불공평 법을 개정하자는 촛불시위가 계속 이어졌고 그 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노무현 대통령에대한 탄핵무효 촛불시위로 민주개혁의 불꽃이 개속 타올랐습니다.

특히 효선, 미선이를 위한 불꽃 집회가 반미로 이어지고 하는 과정 속에 보수 기득권 세력은 이러한 데에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온갖 집회를 통해 반북친미를 강력하게 표방하고 급기야 한국기독당을 창당하여 제도권 정치의 진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군사독제 시절에는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당시에도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국가조찬기도회, 선언서 발표 등의 방식을 통해 독재정권을 간접적으로 지지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김진홍, 서경석 목사를 중심으로 소위 뉴라이트 운동을 피면서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하여 차기 대통령을 기필코 보수 진영의 사람을 세우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의 극우기독교도들이 대통령선거당시 영향력을 발휘하여 부시를 대통령으로 세우는 것을 보고 고무되어 자신들도 그렇게 하여 권력과 힘을 얻겠다는 유혹에 빠져버렸습니다.

사학법개정을 이렇게 목숨걸고 하는 것도 사실은 진정한 신앙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원 이사회에 참여하는 기득권 세력이 그동안 마음대로 죄지우지하던 사학경영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오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학법 개정을 찬성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사학은 오히려 사학법 재개정 운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를 통해 기독교 사학에서 진정한 신앙교육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닌, 세상의 성공만을 바라보는 교육이 아닌, 진정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신앙교육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기독교 사학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가 언제부턴가 강자의 편에 섰다고 합니다. 약자를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교회인데, 그렇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들이 안티 기독교 세력을 만들고, 사회에서 교회가 점점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1월에 한국기독교연구소라는 곳에서 “예수목회세미나”라는 모임을 가졌었는데, 저는 최근에야 박희영 목사님이 시무하는 수원의 고등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그 세미나가 개최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박희영 목사님은 예수목회세미나에 다녀 온 이야기를 하면서, 목회면 목회지, ‘예수 목회’는 또 뭐냐? 예수 없는 목회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런데 실제 목회에 예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가만히 내용을 음미해 보면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하고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로 건너뜁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한 마디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의 공생애에대한 고백이 없을까? 실수였을까? 반문하면서 하는 말이 일찍부터 교회는 예수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전도의 도구로 사용해 오던 사영리에도 예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죄인일 뿐이고 중보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영리에도 예수의 삶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있는데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에대한 고백은 있는데 예수에대한 고백이 없는 것은 그 삶의 자리가 바로 고난, 가난함, 핍박의 자리이기 때문에 오직 바랄 수 있는 것,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였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자신들의 고통과 아픔, 핍박의 현장 한 복판에 계신 예수를 고백하지 않더라도 그 삶 자체가 예수의 삶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상의 공인을 받고, 변두리에서 사회의 중심부로 자리 이동하면서, 그 고난, 핍박, 가난, 고통은 멀어지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 속에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는 없고 그리스도만 남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처음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 올 때를 보면 일제 강점기의 어두움, 치욕과 굴욕의 때에 유일하게 희망을 준 것은 기독교 였다는 것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개신교는 정말 참 열심히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탄압도 받고 피해도 많이 입었는데, 3·1운동 당시 개신교 인구는 약 2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870만 아닌가요, 그런데 사회를 이끄는 세력보다는 발목을 잡는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원인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교회를 탐탁치않게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사적 사실이나, 아니면 오늘 이 시대의 한국교회의 변질된 모습을 보면서 과연 교회의정체성을 어디에서 찿아야 하느가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다른 목회자는 지금도 성장, 부흥 콤플렉스에 빠져 어떻게 하면 성장할까하는데, 저는 지금 예수 콤플렉스에 걸려있습니다. 교회가 예수의 삶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가?라는 것에대한 컴플렉스입니다. 그러면서 꼭 하고싶은 말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올 해가 무슨 해인가요? 돼지해라면서요, 그것도 600년 만에 찿아온 황금돼지의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해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돈을 잘 벌어 부자가 된다는 터무니 없는 희망에, 근거 없는 열풍에 힘입어 출산율이 현재로 20%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는 것은 참 복된일입니다. 그러나 "황금돼지의 해"이기 때문에, 황금을 나으려고 아기를 낳는다면, 이러한 젊은 엄마, 아빠가 계시다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로 큰 것 먹는다는, 옛 말이 생각납니다.정말 부자되세요 라고 인사하는 나라의 정신구조, 사회심리는 병리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물신에 붙들려 있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 가지 시사적인 이야기를 하였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적 성숙입니다.

제가 늘 좋아하는 신앙의 목표는 예수께서 나를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3:15에서 계속 성숙한 사람은 이라고 하면서 비록 자기의 신앙적인 생각과 다소 다른 생각을 가지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 까지도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2:6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인격의 성숙, 신앙의 완전함입니다.

지난 신앙집회를 통해 우리는 신앙의 성숙함, 완전함, 하나님의 선한 뜻에대하여 그리고 기도를 통해 성령을 요청하라는 말씀을 유시찬 신부님을 통해 받았습니다. 혹자는 왜 개신교 안에도 좋으신 목사님이 많은데, 신부님을 모셨을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레임, 패러다임에대한 것 때문입니다. 세상을 볼 때 노란색 안경을 쓰면 세상은 노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입니다. 색안경을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이 기적 콤플렉스에, 헬라인이 지혜의 콤플렉스에 걸려있다고 본다면 성장, 부흥 콤플렉스에 걸려있어서 모든 것, 어떤 것을 교회 안에서 해도 성장, 부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개신교 안에서 짧은 기간 동안에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그 때 마다 온 교회들이 그 프로그램에 매달려 교회성장에 목을 멥니다. 그리고 성장의 신화를 창조해 갑니다. 최근에는 무슨 알파코스라는 것을 가지고 선전을 하는데,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무슨 셀 목회다 하며 온통 교회를 뒤 흔들었썼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그러한 풍조에대하여 도피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캐톨릭은 그러한 성장에 자유러웠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캐톨릭은 교회가 하이어라키, 즉 상명하복의 구조로 되어 있어서, 교회도 한 지역, 한 구역에 하나만 세워지게 되어있어 숫자에 연연하는 성장에관한한 철저하게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숫자 콤플렉스에 붙들려 걸신에 걸린 것 같은 천박함에 연연한 반면에 캐톨릭은 내적 성숙, 아니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며, 즉 사회, 나라, 더 나아가 인류를 향한 방향성을 가지고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하여 말없이 한걸음씩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성장에 붙들려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번에 그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의 한 점을 마련하고자 구지 신부님을 모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소 말씀 중에는 어렵기도 하고, 받아들이기가 거북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신부님의 말씀은 우리 개신교에서는 맛 볼 수 없는 내적 성숙의 귀한 신앙의 길에대해 맛을 보여주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 노파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 홈피 게시판에도 글을 올렸지만, 영성이라해서, 어떤 영적 신비, 어떤 일반인이 느끼지 못하는 체험에대해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 짚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인디언의 영성 같은 자연과 인간이 합일하는 삶의 모습과 같은 신비로운 삶의 소중함에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바, 겸손히 신비한 영성에대해 문을 닫지 말고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중요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늘 교회에 이야기 했듯이 거짓 교사들이 항상 교회에대해, 즉 유대교나, 헬라철학, 기타 금식을 요구하는 금욕주의나, 천사 숭배 같은 것들을 복음 외에 더 요구하는 것에대해 철저하게 거부하였듯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있어서 마치 영적 신비가 없으면 신앙에 다소 부족한 것이 있어 그것을 체우기 위해 영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잘 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듭, 거듭 이야기 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우리가, 인류가 구원 받기에 완전하며,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기록된 신구약 성경과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일상적인 삶의 관계 속에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들려주는 소리가 바로 그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가 아니라, 사로잡으셨다고 합니다. 주님이 지금도 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꼭 품고 계십니다. 이 어떤 것 보다 귀한 은혜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이 은혜를 잊지 말고 꼭 기억하며 그 사로잡은 사랑을 바라 볼 때 우리는 보다 성숙한 내적 성숙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의 지평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언자적인 통찰력으로 역사를 보며, 종말론적인 가치관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지향하며, 지구온난화로 인류공동체에 위기가 찿아온 시점에서 자연생태지향적인 교회로서, 기존의 패러다임과 틀을 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의 것들을 품고, 새롭게 하며,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교회요, 성도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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