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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007년3월 4일, 사순절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3.04 15:09 | 조회 2437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007년3월 4일(사순절두번째주일) 요12:20-33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니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찿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헬라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3:35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내가 조금있으면 나를 보낸 이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헬라인에게 가서 가르치려나 하시려나? 하면서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 언급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헬라인에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거듭 언급됩니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은 이방인들 특히 헬라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을 위한 기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처음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번역으로는 말씀이지만 이 본문 말씀의 헬라어 원전에는 ‘Logos’입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의 언어, 사상 체계와 히브리인들의 언어사상 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헬라문화권의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해야 할텐데, 유대적인 언어나 사고 구조로는 도저히 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할 수 없으니까, 헬라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그리고 그들의 언어 사고 체계에 있어서 가장 고상하고도 귀한 Logos로 접근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Logos가 이 세상 질서를 보존하시며, 하나님의 Logos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복음을 이해시킵니다. 이렇게 요한 복음은 헬라 문화권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에대한 남다른 배려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의 기록자들이 무심코 지나간 헬라인들의 출현을 놓치지 않고 복음서를 기록하는 한 자리에 등장시킨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헬라문화권의 사람들이 보다 더 복음에 친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까지 올라왔을까요? 예수님 당시의 세계는 정치 군사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문화, 즉 학문, 예술, 철학은 여전히 헬라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전 세계, 그 당시로는 지중해권 이겠지요, 그 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미국인들이 전 세계를 누비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중해권 나라, 민족들의 문물, 종교를 보고, 연구, 답사하기 위하여 여행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예루살렘까지 온 헬라인들은 어쩌면 진리를 찿아 순례 여행을 하던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유대인들의 순례를 따라 예루살렘 까지 올라온 헬라인들은 놀라운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청소한 사건말입니다. 성전청소는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났으니, 이 헬라인들은 당연히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느낌이 어떻했을까요?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군사독재 시기에 명동 성당은 민주화를 위한 치열한 싸움의 중심부였습니다. 언제나 그 곳은 농성장이었습니다. 아마 6.29 선언이 있기 전, 6.10대회 전후 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도 그 곳에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집회에서는 미사가 드려졌고, 그래서 주님의 살과 피를 그 자리에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나누었는데, 그 당시 그 곳에는 기자들, 신부, 스님, 수녀, 그리고 외국인들도 적지않게 눈에 띄었던 생각이 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헬라인들이 그 유월절 해방의 열기 속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여호와 하나님 종교의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생명없는 잡신들을 섬기는 자신들의 종교와는 전혀 틀린 생명력 넘치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메시야 구세주라 하는 예수님에대해 더 관심이 쏠렸을 것입니다.

급기야 이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찿아온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합니다. 아마 이 말을 들은 헬라인 당사자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인자?”, “영광?” 아마도 이 영광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처럼, 아 이 예수라는 사람이 드디어 왕권을 회복하겠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는 말은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쉽게 알고, 기다려 왔던 말이기도 합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는 말은 “이제 올 것이 왔다. 곧 로마가 쫓겨 가고, 정통의 유대 왕권이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라는 뜻으로 받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과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별개였습니다.

이 “인자”라는 말은 단7:13에서 처음 사용이 되었습니다. 단7:1-8에서 보면 4 마리의 맹수들에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사자, 곰, 표범, 이외에 보다 더 강한 짐승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각기 앗수르,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제국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런 짐승들의 환상 가운데, 이런 강하고, 잔혹한 힘을 가진 나라들이 다 지나가면, 새로운 권력의 힘이 도래할 터인데 그 권능의 힘은 온화하고, 부드럽고, 자비로워서, 강한 맹수가 아니라 인간으로 상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수의 시대가 가면, 인간 중심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이것은 유대인들의 꿈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가 오면 유대인들은 세계의 주인,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황금의 시대는 언제 올까요? 이스라엘은 작고ㅛ, 힘이 연약한데, 인간의 힘과 수단으로는 결코 그런 황금시대는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이스라엘은 한 시도 그 꿈을 잊은적이 없습니다.

위경인 에녹서에도 이 인자에대한 말씀이 언급되어 잇는데, 에녹서의 인자는 그 힘이 엄청난데, 하나님께서 그를 가죽 끈으로 묶어두었는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풀어주어서 어떤 나라, 어떤 사람도 이길 수 없는 힘을 가지고 그는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세상을 정복하려는 길을 닦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인자’는 하나님이 보내실 세계를 정복할 자입니다. 그동안 다른 제국들에게 늘 점령당하고, 시달렸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이 다윗과 같은 큰 제국을 세워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이 꿈을 키우며, 늘 전쟁을 일삼는 것입니다. 이 꿈을 제국의 권력으로 바라보는 한 이스라엘은 주님 다시 올 때 까지 항상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유대인들을 숨 막히게 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승리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고, 하늘의 권능이 내려와 승리의 원정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광을 받느다.”는 것을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이 정복자인 인자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에대해 말씀하시고는 바로 이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것에대해,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 나를 섬기라는 것에대해 이야기 했을 때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전혀 의아해 하고, 당황하며, 혼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영광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장대 위에 높이 달린 구리뱀과 같은 영광입니다. 죽음이 영광인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요즈음의 시대가 자기 희생의 고귀함, 숭고함은 다 사라졌습니다. 쓰레기 같은 천박함만 남았습니다. 교회 왕국, 종교집단만 세워지고, 풍요로워 지지만 삶의 생명력, 삶의 고귀함, 숭고함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에게 헬라인들이 찿아 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이스라엘의 제사, 예루살렘의 성전, 유대의 율법 안에 갖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한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제사, 율법,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기득권 세력이 폭력적인 것인지를 낱낱이 보여 주었습니다. 말씀이시며, 생명이요, 진리와 자유이며 사랑이신 예수님이 그 율법과 제사와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온유한 예수님을 당시의 유대교가 받아들이지를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셨지만, 그 죽은 예수를 생명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으로 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따라 십자가에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신 이 자기 드림의 사랑이 온 우주의 섭리와 경륜의 힘이 되었습니다. 고전 1:22이하에서 볼 것 같으면

“유대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찿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 이라합니다.

어제 유시찬 신부님을 통해 참 만만치 않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히 “완전한 사람이 되시오”하였는데, 과연 이 말씀은 내 힘으로 완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바꾸어 하나님의 완전함 속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퍼즐과 같아서 전체 퍼즐이 퍼즐 하나, 하나의 구성을 통해 전체가 완전해 지는데, 그래서 그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 퍼즐을 완전하다 할 수가 없는데, 바로 그 퍼즐 하나가 나라는 것이고, 그 하나, 하나의 퍼즐이 하나님의 완전함 속에서 존귀하며,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퍼즐의 역할이 예를 들어 심한 질병에 걸린 사람으로서의 존재라고 한다면 이 역할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만도, 그것이 우주 전체의 하나님의 완전함 속의 나의 한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고말지 하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습으로 그 역할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육의 눈으로 볼 때 얼마나 참담하겠습니까? 얼마나 곤혹스럽겠습니까? 그런데 그 안에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기쁨과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어찌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요청이 됩니다. 실제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환자인 시인 송명희님 같은 경우도 어떻게 그러한 시를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 할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바로 아픔 속에 평화, 절망 속의 희망, 어두움 속의 빛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픔 과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권능,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따라 감당한 십자가의 권능을 통해 우리가 우리 역할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도, 어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 서도, 원수가 내 한 모습이며, 한 줄기라고 하는 생각에 다다르다 보면, 원수가 미워해야할 철천지 원수가 아니라, 내 다른 한 모습이라 할 때, 사랑의 날개가 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원수가 사랑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를 하자면 능력, 힘이 없으면 우리가 그 원수같은 사람을, 자식을, 아니 남편을 힘이 없으면, 능력이 없으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은혜, 십자가의 능력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기꺼이 성령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온 만물이 싹을 틔우며 역동적으로 살아나는 봄입니다. 이 자연의 빛은 참으로 찬란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역시 이 우주와 역사 속에 한 존재로써 역시 그 찬란한 생명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내 몫을 내가 사는 동안에 찬란하게 피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세상 눈으로 볼 때, 초라하고, 약하고, 부족해 보이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내야 할 몫이라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달려갈 길 다 달려간 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 하고 칭찬을 듣는 사람으로 하나님 의 품에 안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완전함 속에 스스로의 존귀함, 고귀함, 온존함이 우리들에게 넘치어 나누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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