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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신 예수님(신화를 버리고! 2007년2월25일, 사순절첫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2.25 14:05 | 조회 2051


변하신 예수님(신화를 버리고!)

2007년2월25일(사순절첫번째주일) 마17:1-9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 변화된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말씀이 “엿새 뒤에”라고 합니다. 그럼 그 엿새 동안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마16:16 말씀의 고백이 있었던 기간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는데, 그 곳은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 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6일 동안 계시다가 3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른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 곳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기가막힌 광경을 보고는 황홀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치면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자신들의 삶 속에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를 차지하는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와 엘리야가 지금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과 자리를 같이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 황홀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는 대뜸 이 좋은 곳에 3분을 위한 초막을 짓겠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풍광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영원토록 살고자 합니다. 그러자 빛나는 구름이 저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심히 두려워 엎드려 있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일어나 눈을 뜨고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3 제자의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 곳에 가셨을까요? 왜 힘겹게 그 높은 헤르몬 산을 오르셨을까요? 오늘 읽은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에도 이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있는데, 눅9:28에 보면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마16, 17장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분기점, 전환점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곳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가르치고, 병고치고, 먹고 마시고 했는데, 과연 내가 누구인지 제자들이 알까?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엘리야, 세례 요한, 선지자, 예레미야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유명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마16:16의 고백 이후 예수님의 활동은 바뀝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며 이적과 기사를 많이 베풀어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셨고, 그리고 그 질문에대해 정확한 답을 듣자, 예수님은 그 시점에서부터 고난, 십자가, 죽음에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그 질문이 있은 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변화산으로 가시어 그 곳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아니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유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한 질문이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나는 누구인가요?” 오늘 말씀 마17:15을 함께 일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 을 들어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글개역에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합니다.”

변화산은 예수님 생애에 있어서 자기 정체를 확인하는 최고의 정점이며 분수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나는 누구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치고는 너무 무덤덤하지 않나요? 그런데 집에서 아이들이 가끔 물어봅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너는 누구야?”하면, 뭐라 그럴까 요? “아빠 새끼!”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묻고, 그렇게 답하고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아이와 한바탕 딩굽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표현하지만 그 속에 무한한 신뢰와 배려, 관심이 담겨져 있는데, 예수님도 아버지에게 “아빠 나 사랑해, 내가 누구야?” 했더니, 들려오는 말이 기껏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아들”합니다. 어찌 보면 참 멋 없는 고백입니다. 그래도 그 말 속에는 그동안의 모든 언행을 내가 인정하고, 참 잘했다 하며 기뻐하는 것이니 어찌 무덤덤 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가끔 정치인들이나 경제계의 인물들이 어떤 정치적 결단이나, 어떤 특별한 일을 앞두고, 산행을 한다거나, 선산을 찿아간다거나, 국립묘지를 찿아가 참배를 하는 것을 봅니다. 아마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앞에 놓고 마음의 결단을 하려 한 것 같습니다. 무엇 보다 자신을 돌아 보고, 자기가 누구이고, 또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헤아리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정체를 확인하며 찿는 자리에서 주님은 변화하셨습니다. 변하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었을까요?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눅9:31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하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주님의 떠나가실 일에대하여 말씀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공생애의 한 정점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을 떠나야할 새로운 출발점에서 변화하셨습니다. 이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그 황홀함에 베드로는 아예 그 곳에 초막 3을 짓자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이 변화산에서의 놀라운 체험에대하여 벧후1:17,18에서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하실 때에,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벧후1:16절에 볼 것 같으면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 나아가 주님의 다시 오심과 영광에대한 복음의 소식을 전하지만,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변화산에서의 거룩한 체험에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화로 받아들였을까요? 당시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신화는 삶의 일부였습니다. 일리어드와 오딧세이, 플루타크 영웅전, 로마의 기원등 그리이스와 로마의 신화에 익숙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 복음의 신비는 역시 또 하나의 새로운 신화로 간주되었습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복음은 복음의 능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딤전1:4에 보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신화와 끝 없는 족보에 정신이 팔려있다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런 신화는 없는지요? 예수를 믿으면 물질, 건강 축복 받고, 자녀가 다 잘 되고, 만사 형통하고하는 이기적이고, 자기 탐욕적인 신화에 모두 목을 메는 것은 아닌지요? 어느 교회, 어느 기도원의 어느 은사 집회에서 난치병을 고치고, 그래서 사업이 100배로 잘되고, 어느 목사님이 개척한지 3년 만에 몇 천명이 모이는 큰 교회가 되었다는 신화이야기 말입니다.

이 것이 전부는 아닌데, 사람들이 자꾸 그런 것 만을 보려 하고, 쫓아갑니다. 또 세속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누가 어디다 돈을 투자했는데, 얼마나 벌었어 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어느 재벌, 어느 정치인에대한 성공담을 쓰면서 ‘00 신화’라고 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또 누가 어떻게 공부했는데 일류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신화를 만들어 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화에 정신팔지 말라고 합니다. 딤전1: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고 합니다. 사랑의 수고,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를 따르는 열매는 없고 쓰레기 같은 신화만 가득한 사회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천박한 신화에 빠져있는 이 시대의 병리적인 사회의 풍조 속에서 여러분은 누구인지요? 예수님이 만일 변화산에서의 자기 정체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행적은 또 하나의 신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화가 될 뻔한 최고의 정점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제자들에게, 그리고 긍국에 하나님께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기 정체에대해 질문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하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화답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화답은 예수님에게만 들리는 소리일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인가요?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릴 듣지 못 할까요?

그런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언제 또 들렸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였습니다. 그 때 성경은 무엇이라 기록하고 있는가요? 그렇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마음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조금의 허물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녀가 아무리 흉악범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자라고 해도 그의 부모는 그 아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인 것입니다. 어릴 때 동물원이나, 놀이 공원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정체,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성도로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지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영원한 미아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변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계심을 맛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대한 사랑으로 가득차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그 우리를 존귀케 하는 음성,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요? 눅9:29는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화나 성공담, 족보나 따지는 지역, 학벌과 관련된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여 하나님을 갈급해 한다면 아마도 우린 새로워질 것이며, 하나님의 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우리를 존귀히 여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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